(9)타협 없는 대결은 몰락을 부른다, 한나라와 흉노가 그러했듯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
[경향신문] ㆍ몰이해의 비극 ‘공멸’
유라시아 유목사회에 대한 오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돌궐제국 이전까지 그들이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그베다> 등 상고의 구전기록들이 있지만, 그조차 종교생활의 극히 일부만 반영하고 있다. 이런 경우 인류학과 고고학과 역사학이 만나 협력해야 하지만, 인류학과 고고학은 관찰과 발굴에 상당한 자금이 소모되기에 기본적으로 열강의 학문이고, 사료가 여러 언어에 걸쳐 있으며 역대 제국의 기록이 태반인 세계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학문적인 쏠림이 클 때 정치권력의 어젠다를 퍼트리는 사이비 과학이 등장한다.
■ 내가 모르는 이, 남
최근 이를 최대한 활용한 이들은 나치 집단이겠지만, 우리 주위에서도 위서(僞書) 몇 권을 입맛대로 가공하거나 타 인종 혐오를 부추기는 부류를 목격할 수 있다. 학문의 탈을 쓰고 무지를 숨긴 채 정치권력에 복무하는 사이비 과학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의 부재(不在) 속에 싹튼다.
서안(西安) 한무제 유철(劉鐵)의 능은 ‘소년 장군’ 곽거병(藿去病)의 묘가 지키고 있다. 곽거병은 무려 80년간 이어진 흉노와 한의 처절한 투쟁의 선봉에 서다 약관을 갓 넘겨 요절한 외척 출신 장군이다. 그 묘지기 격으로 말 한 마리가 흉노 병사를 밟고 있는 ‘마답흉노(馬踏匈奴)’ 석상이 있다. 당시 중국은 대형 석조물의 전통이 짧았던지라 동시대의 타 문명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하지만, 정교함을 제거한 결과, 제작 의도는 오히려 더 확실히 부각되었다. 옹골찬 말 한 마리가 수염이 덥수룩한 흉노 병사를 밟고 있는데, 깔린 병사는 왼손에는 활을 들고 오른손에는 화살을 들고 버둥거린다. 메시지는 단순하고 강렬하다. ‘말 타고 다니는 녀석들을 내가 말로 밟아 주겠어.’ 멀리 앗시리아의 전승(戰勝) 부조는 물론 아마존 여전사나 페르시아인을 공격하는 그리스 조각이나 켈트인을 죽이는 로마 병사들의 석상처럼 이방인을 이기는 장면을 묘사한 석조물의 전통은 길다. 한무제는 그런 타자화(他者化)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 급기야 짐승 아래 사람을 두었다.
■ 흉노-한 80년 각축, 타자 말살의 전쟁
서기전 200년 유방, 흉노와 화친 그의 부인 여태후 사망 직전인 20여년간 한·흉노 ‘평화의 시기’ 정치의 기본 ‘타협’ 지켜진 시절
서기전 200년, 흉노가 마읍(馬邑·오늘날 산서성 삭현(朔縣))을 공격하자, 그곳을 지키던 한신(韓信·‘토사구팽’ 고사의 한신과 동명이인)이 흉노로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신생 한나라의 국력을 시험하기 위함인지, 단순한 약탈인지, 국경 분쟁 때문인지 침공의 원인은 분명치 않다. 한고조 유방이 대군을 이끌고 작전에 나서자 선우는 뒤로 물러나며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 유방은 기세를 몰아 추격했지만 본대와 떨어진 채 백등산(白登山·오늘날 산서성 대동(大同)시 동북)에서 흉노 기병에게 포위당했다. 사서에 40만이라고 하나 작전 가능한 기병 한 군단이 1만 남짓임을 감안하면 총 군세는 4만 정도였을 것이다. 그때 유방의 한군은 포위 속에서 굶다가 연지(선우의 부인)에게 뇌물을 바치고 흉노가 원하는 조건을 들어줌으로써 포위를 탈출할 수 있었다. 연지는 “흉노가 한을 얻어도 그 땅에 살 수는 없다”고 선우를 설득했다고 한다. 선우도 한의 본대가 곧 도착할 것이 걱정되어 유방을 풀어주며 화친 조약을 맺었다. 그때 양자가 맺은 조약의 내용은 1) 장성을 국경으로 삼는다. 2)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는다. 3) 한의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낸다. 4) 매년 흉노에 옷감과 누룩과 곡식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한은 훗날 관시(關市)까지 열어 화친을 공고히 한다.
유방 사후 실권은 그의 부인 여후(呂后)에게 넘어갔다. 여후가 미망인이 되자 묵특 선우가 이런 서신을 보내왔다. ‘나는 우마가 자라는 광야에서 사는 고독한 군주요, 폐하 또한 홀로되어 즐길 거리가 없습니다. 중국으로 놀러 가고 싶으니, 우리 서로 있는 것을 없는 것과 바꿉시다(以所有易其所無).’
한과 흉노가 형제의 의를 맺은 것을 핑계로, 선우는 흉노의 형사취수(兄死取嫂) 관습에 따라 위로하는 모양새를 하며 다양한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이에 격노한 여후가 흉노를 치려 하자 제부(弟夫) 번쾌가 냉큼 나서서 ‘10만을 주면 흉노를 꺾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계포(季布)가 나서 ‘고제(유방)의 능력으로 대군을 이끌고도 실패했는데, 번쾌 따위가 호언장담하니 당장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고 반박했다. 여후는 계포의 말을 들었다.
그 결과 그래프가 보여주는 바처럼 유방 시절부터 여태후 사망 직전까지 거의 20년에 달하는 장기 평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서기전 182년과 181년 흉노 우현왕(右賢王) 관할구역 남쪽의 감숙성 일대에 흉노의 약탈군이 나타났지만 한은 지키면서 반격하지 않았다. 만리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양대 세력이 이토록 오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문제(文帝) 즉위 후 약탈과 방어가 종종 일어났으나 역시 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참을성을 발휘하여 흉노에 화친을 재확인하는 서신을 보냈다. 선우 또한 서신에 답을 하며 사과를 했는데 은근히 싸움의 원인을 상대에게 넘긴다. “한의 변경 관리가 우현왕의 치소를 침범하여 우현왕이 제 명을 받지 않고 싸웠습니다. … 황제께서 흉노가 변경에 접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면 한의 관리와 백성들을 멀리 물러 살도록 영을 내려주십시오.”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이 흉노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기에 선우께 보내드리는 물품이 심히 후합니다. 허나 형제의 약조를 어긴 쪽은 언제나 흉노였습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으나 양자가 거리를 유지하며 전면전을 피하려 했음은 확실하다. 문제 사후 경제(景帝)도 정책을 바꾸지 않아서, 가끔 일탈은 있었으나 평화가 유지되었다. 대립과 타협이라는 정치의 기본이 살아 있었던 셈이다.
한무제 등장하면서 평화도 끝나 선우 몰래 불러내 기습 시도한 뒤 서기전 60년까지 보복전 계속 한은 피폐, 흉노는 동서로 갈려
그러나 한무제 유철의 등장과 함께 상황은 일변했다. 흉노는 기존의 화친 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가 한 번도 도발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차고 조언자인 할머니 두태후가 사망하자 무제는 본심을 드러냈다. 마침 선대가 쌓아놓은 곡물 비축분이 넘쳤다. 서기전 134년 그는 첩자를 마읍의 성 밖으로 보내 일부러 흉노와 교통하게 한 후 선우를 유인했다. ‘마읍을 넘길 테니 대군을 이끌고 오라.’ 그리고는 사면에 매복군을 두어 선우를 치려 했다. 제국의 황제로서 상상하기 힘든 비열한 행동이었다. 한편 선우는 변경의 큰 읍이 통째로 들어오는 줄 알고 출격했지만 들판에 가축만 널렸고 인적이 없었다. 괴이하게 여겨 한의 관리 한 명을 잡아 심문하니 음모의 전모가 드러났다.
격분한 선우는 화친을 파기하고 변경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싸움은 해를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한은 거침없이 흉노의 영내로 들어가 전투를 하고 포로를 잡아왔고 흉노 또한 보복전을 펼쳤다. 그때 의심 많은 무제가 등용한 이들이 위청(衛靑), 곽거병, 이광리(李廣利) 등 외척이었다. 사서의 과장이 상당히 심하지만, 한 번 전투에 쌍방 수천수만이 사망하고 포로를 만 단위로 세었다고 한다. 흉노의 전투에서 군왕이 죽는 경우도 있었고, 7만에 달하는 이광리의 군단 전체가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도 있었다. 흉노가 강하지만 막대한 물자를 가진 한이 고비 남쪽은 물론 북쪽까지 들어오자 선우정을 사막 북쪽 몽골 고원의 중심부로 옮겨 장기전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싸움의 결과 한은 피폐해져 쇠락의 길을 걷고 흉노 역시 동서로 갈리고, 서기전 60년 무렵 동흉노의 선우가 한에 투항하여 제국 붕괴 직전에 이른다.
■ 착취의 기술 ‘이중타자화(二重他者化)’
기억해야 할 바는 한무제가 타자화한 대상은 흉노뿐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죽인 적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자국민을 학살했다. 그에 비하면 진시황의 폭행이 새털처럼 가볍다. 당대의 중국 사서는 ‘천하 호구의 반이 줄었다’고 묘사한다. 철저한 남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죽일 수 있을까? <한서·형법지>에 국가에 의한 체계적인 살인의 메커니즘이 나와 있다. 먼저 싸움이 벌어지면 전사자와 불구자가 생기고 이들을 떠안은 가구가 가난해진다. 이어 말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대느라 국고가 비고, 이를 보충하고자 세목이 늘어나 보통 백성들까지 가난해진다. 가난해진 이들은 범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황제는 오히려 범죄 항목을 더 늘려 범죄자를 양산한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생긴 범죄자에게 속죄금을 매겨 국고를 충당하는 것이다. 원정과 빈곤과 범죄가 악순환에 빠져 돌아가는 상황에서 황제의 사치가 극에 달하니 백성들은 죽거나, 숨거나, 흉노 땅으로 도망갔다. 물론 무제가 의심병으로 직접 죽인 사람들도 한 번에 수만을 헤아렸다.
그런데 강력한 진(秦)이 만리장성을 쌓고 남월과 싸우다 겨우 열 몇 해 만에 망했는데, 무제는 어떻게 수십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그 기술을 필자는 “이중타자화(二重他者化)”라 부른다. 이중타자화의 도식은 이렇다. 1) 먼저 ‘타자(흉노)’를 치고 있으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2) 그러나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백성들 또한 적과 같은 타자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독재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본질인데, 외적을 구실로 내부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일례로 곽거병 역시 음식이 남아도 아래로 주지 않는 등 부하들을 전혀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한무제에게 백성은 철저한 남이었듯, 그에게도 흉노와 마찬가지로 부하도 남이었던 셈이다.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랬듯이 ‘내우외환’ 내세워 통치한 한무제 수많은 백성 학살할 수 있었던 건 철저히 ‘남’으로 인식했기 때문
정치는 피아가 흑백으로 완전히 갈라지는 것을 예방함으로써 갈등을 조절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싸움이 있으면 화해가 따른다. 화해를 배제한 정치의 부재 상황에서 한무제는 장성 안에 백성을 가두고 마음대로 학살할 수 있었다.
북방으로 눈을 돌려, 유목민은 전투를 통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가.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 듯하지만 인류학이 알려주는 바는 그와 정반대다. 러시아 인류학자들이 밝힌 바를 종합하면 19~20세기 유라시아 초원에서 유목민 한 가구가 사는 데 필요한 가축 수는 양(羊)으로 환산하면 대략 100마리에서 200마리 사이였다. 돌볼 수 있는 가축 수가 정해져 있고 환경이 용납하지 않기에 무작정 늘릴 수도 없지만, 100마리 이하로 떨어지면 단순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잉여가 발생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빈곤 상태로 떨어지기는 아주 쉽다. 필자는 야쿠츠크 공화국 일대에서 늑대 무리에게 한 해에 순록 수백 마리를 잃은 마을들을 목격했다. 늑대 한 마리가 양 우리에 뛰어들면 단번에 수십 마리를 죽일 수 있다. 남자가 전투에 나가면 총포도 없는 아녀자와 아이들이 쉽사리 가축을 잃는다. 남자가 전사하면 가족이 다른 가구에 흡수되지만, 불구가 되었을 경우 가계에 훨씬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목민은 불리하면 도망치지 절대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지 않는다. 초원에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흉노가 동서로 흥안령에서 천산산맥, 남북으로 오르도스에서 바이칼호까지 차지한 직후 순간적인 생산량이 일시적으로 크게 늘었을 것이다. 여러 강대 세력 사이의 비무장지대를 비워둘 필요가 없어서 초지가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우는 이 지대를 활용하면서 초원 통합 전쟁에 소모된 비용을 충당하고, 제국 내 24장(長)의 구역을 유연하게 조정했을 것이다. 아울러 덕분에 이란계, 투르크계, 몽골계 등 수많은 언어집단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중국과의 남부 국경도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무제가 전면전을 걸어왔고, 타협 없는 싸움 속에서 양자는 공멸의 길을 걸었다.
양자의 대결은 세계사의 향배를 바꾸는 커다란 외부효과를 불러왔다. 한은 흉노의 물자 공급원인 타림분지 일대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발아래 끌어들이고, 흉노에 패해 서쪽으로 밀려난 유목민들을 배후세력으로 이용하려 했다. 나아가 파미르 서쪽에서 군마를 공급받고자 원거리 원정도 감행했다. 그때 오아시스 국가들이 겪은 참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지만, 동서 교통로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것이 비단길이니,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 필자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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