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데 매력있고 이상한데 사랑스러우며 삐딱한데 즐겁다

한소범 입력 2019. 3. 22.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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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이디 버드'에는 고향 세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으로 가고 싶어 하는 고등학교 졸업반 소녀가 등장한다. 고향을 지긋지긋해하며, 도시로 떠나고 싶어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성장 서사의 단골 소재다.

지난해 미국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전미비평가협회상 작품ㆍ감독ㆍ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레이디 버드’에는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 새크라멘토에 사는 고등학교 졸업반 크리스틴이 등장한다. 그는 구린 동네와 허름한 집과 낡은 자동차가 부끄럽고, 한시라도 빨리 학교를 졸업해 뉴욕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당장 뉴욕으로 갈 수 있을 핑계가 될 뛰어난 재능이나 성적을 지닌 것도 아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 어딘가 꼬여 있는 그는 우정, 사랑, 가족의 문제에서 진한 성장통을 겪은 뒤 결국 뉴욕으로 떠난다. 그리고 비로소 ‘어른’이 된다.

‘가능성과 미래를 옭아매는 족쇄’로서의 고향과 고향의 대척점으로서의 도시, 그리고 도시에 대한 갈망은 소녀 성장 서사의 단골 소재였다.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이 그랬고, 신경숙 소설 속 인물들이 그랬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장편소설 ‘아일린’의 주인공인 아일린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보스턴 외곽에 사는 아일린은 소년원에서 비서로 일하는 24세 여성이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버리고 뉴욕으로 탈출할 계획으로 하루하루를 견딘다. 아일린은 탈출을 갈망하면서도 게으름과 두려움에 짓눌려 실행을 미룬다. 소설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집을 떠나게 된 아일린의 일주일을 그린다.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ㆍ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372쪽ㆍ1만 4,500원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형식을 따르지만, 아일린의 욕망만큼은 생경하다. 짝사랑하는 소년원 교도관을 스토킹하고, 가게에서 정기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비행도 서슴지 않는다. 깡마른 몸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이 ‘너무 거대하고 역겹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혐오와 타인에 대한 경멸, 성적 억압과 망상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 아일린은 성장소설의 주인공으로는 부담스러운 인물처럼 보인다.

고여 있는 썩은 웅덩이 같던 아일린의 일상은 어느 날 소년원의 교육국장으로 리베카라는 여성이 부임해 오면서 흔들린다. 아름답고,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어느 모로 보나 아일린과 정 반대인 리베카가 손을 내민다. 그런 리베카를 흠모하게 된 아일린은 그와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내기로 한다. 크리스마스이브 당일 리베카의 집으로 향한 아일린은 동경했던 존재의 민낯과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치고, 인생을 뒤바꿀 선택을 내리게 된다.

죽은 어머니의 옷을 입고 다니고, 섭식장애에 시달리며,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뒤틀려있는 아일린은 혐오스러우면서도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얼핏 괴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통의 불안하고 외로운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웅크려 있는 아일린은, 그렇기 때문에 리베카의 손을 덥석 잡는다. 리베카가 자신이 저지른 일의 공모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할 때, 아일린은 어떻게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애쓴다.

2016년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오테사 모시페그가 자신의 책 '아일린'을 들고 있다. 문학동네 제공

너무 솔직하고 적나라해서 불편하기까지 한 소설은 미국의 가장 주목 받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인 오테사 모시페그의 첫 장편이다. 1981년 보스턴에서 이란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오테사 모시페그는 200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2015년 발표한 이 소설로 “놀라운 장편 데뷔작”이라는 찬사의 주인공이 됐다. 2016년 펜/헤밍웨이상을 받고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모시페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베스트셀러를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다른 ‘멍청이들’에게도 가능하다면 나라고 못할 게 뭐냐고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로 아일린만큼이나 솔직하고 냉소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상하고 엉망인데, 애처롭고 사랑스럽다”(워싱턴 포스트)거나 “매력적으로 불안하다. 기분좋게 음침하다. 즐겁게 삐딱하다”(NPR)는 모순된 반응에서 알 수 있듯, 소설에 대한 감흥을 하나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아일린이 마침내 고향을 뒤로하고 뉴욕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탈 때는 앞으로 펼쳐지게 될 그의 삶을 기대하고 응원하고 싶어진다. “조수석에 몸을 푹 파묻고 술을 마시며 김 서린 창문을 내다보았다. 옛 세상이 스쳐 지나며 멀리 저 멀리, 가고 가고 또 가서, 결국 나처럼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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