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다 속..아담해도 '꽉' 채웠다

대구 | 황민국 기자 입력 2019. 3. 14. 20:49 수정 2019. 3. 14. 22: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K리그의 ‘미니멀리즘’…작은 경기장에 숨겨진 ‘품절 마케팅’

축구팬 불러모으는 ‘대팍’ 대구FC의 새 구장인 DGB대구은행파크에서 지난 9일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1 홈개막전을 앞두고 경기장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프로축구연맹 제공

한국 축구는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던 2002년 전성기를 구가했다. 광장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넘쳐났던 그 시절 우뚝 선 6만석 안팎의 커다란 경기장은 한국 축구가 유럽 축구 못지않게 번성할 것이라는 기대를 키우는 상징물과도 같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우람한 경기장들이 외면받고 있다. 대구FC는 2002년 월드컵 조별리그 당시 한국이 미국과 1-1로 비겼던 대구스타디움을 떠나 지난 9일 개장한 DGB대구은행파크에 입주했다. 인천 유나이티드는 2012년 인천문학월드컵경기장 대신 인천축구전용구장에 둥지를 틀었다. 두 경기장의 공통점은 수용규모가 적게는 1만명 남짓, 많게는 2만명 남짓의 작은 구장이라는 데 있다.

기존의 작은 구장들도 이미 축구 시장 속에서 입지가 커졌다. 부산구덕운동장(1만2349석)이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을 밀어냈고, 포항스틸야드(1만7443석)와 광양전용구장(1만3496석)은 각 구단이 바라보는 이상적인 구장 모델로 떠올라 있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유산을 버리고 작은 경기장을 선택하는 것은 우선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조광래 대구FC 사장은 1만2415석 규모의 새 구장을 짓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거센 비난 속에 놓였으나 K리그1 평균 관중이 고작 5458명에 그치는 현실을 인정하고 작은 구장 걸립 계획을 밀어붙였다.

조 사장은 “우리 현실에서 과도하게 큰 경기장은 축구에 대한 관심만 떨어뜨릴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 K리그를 중계하는 방송사들은 곳곳이 빈 공간인 관중석으로 카메라를 향할 때마다 민망함이 컸다. 수원 삼성과 FC서울 같은 대형 구장의 인기 구단이 관중석 2층을 가림막으로 가리는 촌극을 벌인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작은 경기장이 대세로 자리잡은 데는 각 구단의 마케팅 전략도 숨어 있다. 한때 유행했던 스낵 ‘허니버터칩’처럼 ‘품절 마케팅’을 노렸다.

개장 첫 경기에서 매진된 DGB대구은행파크는 평일 열린 지난 12일 광저우 에버그란데와의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F조 2차전서도 만석을 알렸다. 매표소 창구의 한 관계자는 “경기 2시간을 앞두고 현장 판매를 시작했는데, 10분도 되지 않아 다 팔렸다”고 전했다.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 돌아서는 팬들의 얼굴에서 작은 경기장의 효과를 짐작할 만했다. 2003년 대구 창단 당시부터 17년 팬이라는 권영규씨는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ACL 경기 티켓은 사전 예매로 구입해야 하는 걸 생각도 못했는데, 그냥 발길을 돌리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야구장에서만 들리던 매진 소식이 이젠 축구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경기장은 그라운드와 관중석 사이의 세밀한 교감도 이끌어내고 있다. 스탠드와 그라운드가 가까워지면서 선수와 팬이 더욱 근거리에서 서로를 느낄 수 있게 됐다.

대구 골잡이 에드가는 매 경기 골을 터뜨린 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팬들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에드가는 “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보니 체력이 떨어질 때 한번 더 뛸 수 있는 힘이 된다”며 “경기 결과가 나쁘면 욕도 잘 들릴 것 같다”는 농담을 했다. 대구는 오는 17일 울산 현대와의 홈경기에서도 매진을 예고하고 있다. 대구 관계자는 “원정팀인 울산에서 티켓을 확보해달라는 요청이 왔다”며 “여러 면에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국 축구가 영원히 작은 경기장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작은 경기장이 가득 차는 일이 일상이 될 때 경기장 규모를 점차 늘려가야 한다. DGB대구은행파크와 인천축구전용구장 모두 상황에 따라 증축이 가능한 설계로 지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조 사장은 “그날이 3년 내로 왔으면 좋겠다”며 “한국 축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날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대구 |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