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외식의 품격] 햄, 김치, 라면이 한 냄비에 부글부글..부대찌개는 한식일까?

이용재 음식평론가 2019. 3. 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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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가 아니어도 맛있는 부대찌개는있다
부대찌개는 한식…라면 사리가 끓으면 바뀌는 식감도 예술

서교동 ‘의정부 부대찌개’./사진 이용재

의정부를 필두로 미군 부대가 있는 동네가 부대찌개의 고향이자 성지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혀 상관 없는 지역에서도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을 수 있다. 2000~2001년에는 인사동에서 부대찌개를 열심히 먹었다. 인사동과 부대찌개라니 좀 뜬금없지만, 골목 어딘가에 직접 만드는 두부를 넣어 끓이는 집이 있었다. 부대찌개와 고슬고슬한 밥만으로도 훌륭했으니, 살얼음 낀 시원한 동치미와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어묵볶음은 그저 덤일 뿐이었다. 열심히 먹다가 삼겹살 등으로 메뉴가 늘어나면서 맛이 변해 발을 끊었다.

◇ 부대찌개 먹으러 서교동에 간다

근 20년이 흐른 요즘은 서교동에서 부대찌개를 먹는다. 지하철 6호선 합정역과 망원역 사이니까 뜬금없기는 인사동과 매한가지이다. 다만 상호가 ‘의정부 부대찌개’라 먹는 동안이라도 의정부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순 있다. 메뉴는 단출하게 부대찌개와 각종 사리가 전부인 가운데, 부부로 보이는 운영자 가운데 남편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 믿음을 준다.

주문을 받으면 뚜껑이 덮인 냄비를 화구에 올린다. 그리고 ’끓을 때까지 볼 테니 뚜껑을 열어보지 말라’고 말한다. 종종 유명 맛집에서 찌개를 끓이거나 고기를 구울 때 ‘손님은 손대지 마라, 여기는 주인 마음대로 하는 곳이다’라고 강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과는 다르다. ‘내가 책임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기다렸다가 먹으라’라는 의도를 점잖은 목소리에 담아 전달한다. 그렇게 식탁을 오가며 중간중간 뚜껑을 열어 익은 정도를 확인하고 마지막에 라면 사리를 넣는다. 보살필 찌개가 없을 때는 집게로 좌식 자리의 신발을 부지런히 돌려놓는다.

바야흐로 찌개가 완성되어 ‘먹어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면 소시지와 햄-기본적으로 추가하는-위주로 건져 먹으면서 라면 사리를 곁들여 탄수화물의 균형을 맞춘다. 빨갛지만 그렇게 맵지 않은 국물을 라면 사리가 조금씩 머금으며 바뀌는 질감을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라면을 다 건져 먹은 후에는 좀 많이 익은 떡과 당면 차례. 종종 딸려 나오는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 무를 씹어 입을 가시면 찌개와 동치미의 뜨거움과 차가움, 소시지나 햄의 부드러움과 무의 아삭함이 주는 대조가 유쾌하다.

햄과 소시지는 고춧가루 바탕의 양념 맛을 북돋아 주고, 라면 사리는 끓으면서 국물의 질감을 바꿔준다./조선DB

의정부든 인사동이든 서교동이든, 어디에서 먹든 부대찌개는 태생적으로 흥미로운 음식이다. 음식점별로 맛을 따져보는 재미도 당연히 있겠지만, 음식이 짊어진 몇몇 큰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다. 일단 맛부터. 부대찌개는 왜 맛있을까? 핵심은 햄과 소시지다.

끓이면 조미료와 짠맛이 우러나오는 것은 물론, 지방이 녹아 지용성인 고춧가루 바탕의 양념맛을 한층 더 북돋아 준다. 사실 소시지나 햄 등의 가공육은 서양의 국물 요리에서 맛의 기초로 많이 쓰인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의 명물 수프 클램 차우더(걸쭉한 조개 수프)나 프랑스의 대표 스튜 뵈프 부르기뇽(쇠고기 와인 스튜)는 일단 베이컨(혹은 프랑스어로 라르동)을 기름에 볶아 맛의 바탕을 잡아 만든다.

◇ 부대찌개는 ‘부대찌개’여서 맛있다

한편, 짠맛과 기름만큼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라면 사리나 떡의 전분, 경우에 따라 들어가기도 하는 치즈의 지방 등도 국물에 걸쭉함이나 감칠맛을 불어 넣어 촉감을 강화한다. 마지막으로 김치나 베이크드 빈은 신맛으로 균형을 잡아주거나 단맛으로 복잡함에 가세한다. 말하자면 음식의 기원이 그렇듯 부대찌개를 부대찌개처럼 만드는 요소는 좋든싫든 서양에서 비롯된 식자재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소시지와 햄이 양식 재료로서 맛의 한 축을 잡는다면, 한식 재료로서는 김치가 다른 축을 확실히 잡아준다. 김치는 양념으로 맛 전체를 아울러줄 뿐만 아니라 익으면 소시지, 햄 등과 라면 사리 가운데서 질감의 중재자 역할도 맡는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가장 큰 물음, 즉 부대찌개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부대찌개도 한식으로 보아야 할까?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원 때문에 한식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한국 음식이 아닐까?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이 있다. 전후의 굶주림 등 절박한 상황이 우연히든 아니든 음식의 형식이나 문법을 탄생 및 강화했다는 사실 말이다.

한국의 현실을 강하게 반영했으니 이보다 더 한국적인 음식이 없지 않을까? 치킨 등 현재의 한국이 즐겨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외국, 특히 서양이 기원이지만 한국적인 정황이나 요소가 독창성을 생성 및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한국 음식으로 보는 게 맞다. 그래야 외연이 넓어진다.

마지막으로 부대찌개의 명칭에 대해 생각해보자. 앞에서 언급한 부대찌개 탄생의 정황은 물론 슬프고 비참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칭을 '순화'해야만 하는 걸까? 부대찌개의 핵심인 맛-김치와 햄, 소시지 등의 조합-은 그야말로 '부대'가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름을 바꿔버릴 경우 정체성도 지워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닭도리탕의 예를 들 수 있다. 애초에 닭을 볶아서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정확하지 않은 근거로 '닭볶음탕'으로 '순화’시켰다. 인간에게 음식의 감정적인 측면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닭볶음탕’에서는 ‘그 맛’이 안 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전혀 다른 음식이 되는 것이다.

◆ 이용재는 음식평론가다. 음식 전문지 ‘올리브 매거진 코리아’에 한국 최초의 레스토랑 리뷰를 연재했으며, ‘한식의 품격’, ‘외식의 품격’, ‘냉면의 품격’ 등 한국 음식 문화 비평 연작을 썼다. ‘실버 스푼’, ‘철학이 있는 식탁’, ‘식탁의 기쁨’, ‘뉴욕의 맛 모모푸쿠’, ‘뉴욕 드로잉’ 등을 옮겼고, 홈페이지(www.bluexmas.com)에 음식 문화 관련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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