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향, 불맛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19. 2. 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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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불구이, 가스 토치, 목초액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맛 입힌 음식인기
불맛의 원조는 중화요리… 중식大家"탄내나 그을음은 불맛 아니야"

짚불구이 고깃집 ‘몽탄’의 대표 메뉴 우대갈비. 몽탄에서는 소갈비와 돼지삼겹살을 참숯에 초벌구이했다가 짚불로 불맛을 입혀 낸다. 손님상에 배치된 무쇠 불판에 완전히 익혀 먹는다./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식당 개장시간인 오후 5시에 맞춰 도착하니 이미 11팀이 입장 대기 중이었다. ‘운 좋게’ 대기 15분 만에 테이블에 앉았다. 서울 삼각지 ‘몽탄(夢炭)’은 대기시간이 평균 2시간이라는, 요즘 가장 인기가 뜨거운 고깃집이다. 비결은 독특한 ‘불맛’이다. 테이블로 직원이 가져온 소갈비와 돼지삼겹살에서 불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 가볍고 경쾌한 훈연향은 짚을 태워 나는 연기를 입힌 것이다. 조준모 몽탄 대표는 "전남 무안 몽탄면(夢灘面)의 유명한 짚불구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불맛의 인기가 사그라들 줄 모른다. 몽탄 때문에 짚불구이가 화제가 됐지만, 식당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불맛을 음식에 씌운다. 서울 신사동 ‘우가’는 가스 토치로 표면을 살짝 태워 육회에 불맛을 낸다. 삼성동 ‘와라야키 란주쿠’는 짚불로 살짝 익힌 고등어를 얇게 저며 소스·부재료와 함께 바게트에 올린 ‘사바 브루스케타’를 낸다. 스모크(훈연)향 목초액으로 불맛을 내는 ‘편법’을 쓰기도 한다. 일부 캠핑요리 마니아들은 고기나 볶음밥을 토치불로 그을려 불맛을 내기도 한다. 방송에서 외식사업가 백종원씨가 파기름으로 불맛 내는 법이 화제가 됐고, 불맛을 강조한 짜장라면과 짬뽕라면은 여전히 잘 팔린다.

불맛은 선사시대 고기를 불에 구워 먹던 오래된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건드리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언제나 가슴 설레이는 냄새다. 식품공학자 최낙언씨는 "(고대 원시인이) 춥고 배고프고 무서운 세상에 불가에서 따뜻하게 사냥해온 고기를 구우면서 맡은 냄새가 어떠했으며, 생고기를 먹다가 소화가 잘되는 구운 고기를 먹었을 때의 감동을 상상해보라"며 "그 감동적인 구이 요리가 우리의 DNA에 각인된 것"이라고 했다.

숯불에 굽는 소갈비와 고추장 양념 돼지구이, 된장 발라 굽는 맥적, 불고기가 한국의 대표적 불맛 음식이다. 짚불구이는 부산 기장 ‘짚불곰장어’도 있다. 살아 꿈틀대는 곰장어를 짚 더미에 넣고 불을 지른다. 겉이 새까맣게 탄 곰장어를 목장갑 낀 손으로 쥐고 껍질을 벗겨내면, 타지 않고 완벽하게 익은 속살이 드러난다. 불 냄새는 만끽하면서 태우면서 생기는 쓴맛이 전혀 없는 효율적인 요리법이다. 특별히 불맛을 내려고 고안됐다기보다는,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지푸라기를 활용했는데 불맛도 덤으로 얻게 된 경우다.

불맛은 정확히는 혀로 느끼는 맛이 아니라 코로 음미하는 향이다. 음식을 불과 닿게 했을 때 나는 맛과 향, 식감을 불맛이라고 하는 듯하나 명확한 실체가 잡히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확한 정의는 없다. 전문가들도 제각각 다르게 정의한다. 요리연구가 이보은 쿡피아쿠킹스튜디오 대표는 "화염의 흔적이 남긴 향"이라며 "특정 맛과 결합하면 더 깊고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씨는 "지방이나 단백질을 태우면서 나는 탄내가 음식에 밴 것"이라고 본다. 짚불구이는 짚이 타면서 발생하는 연기와 그을음이 고기에 배어 풍미를 더하는 경우다.

중식에서 불맛을 뜻하는 ‘웍헤이’를 내려면 웍(중식 프라이팬)을 쉴 새 없이 불 위에서 돌려야 한다./조선일보DB

불맛을 낸 음식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서양에는 장작을 때 나오는 연기(스모크)로 익혀내는 바비큐와 햄, 소시지 등이 있다. 하지만 불맛 하면 역시 중국음식이다. 중식에선 불맛을 ‘웍헤이(鑊氣)’라고 한다. 베이징을 기준으로 하는 표준 발음으로는 ‘훠치’이나, 세계적으론 광둥어식 웍헤이로 더 널리 알려졌다. 아무래도 세계 곳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화교 중에서 광둥성(廣東省) 출신이 가장 많고 광둥 스타일 중식이 가장 익숙하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웍의 숨결(breath of the wok)’이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설명된다.

둥그렇고 오목한 중국식 프라이팬 웍()을 연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뜨겁게 달군 뒤 적당량의 기름을 두르고 식재료를 넣는다. 요리사가 강력한 팔힘으로 웍을 빠르게 돌리면 식재료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화염에 직접 닿으면서 불맛이 요리에 입혀진다. 이것이 웍헤이의 기술이다.

중식 대가(大家)들은 "탄내와 그을음은 불맛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레스토랑 가이드 미쉐린으로부터 별 하나를 받은 서울 연희동 중식당 ‘진진’ 왕육성 오너셰프는 "불맛은 재료 본연의 맛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지 태워서 쓴맛이 배어들면 안된다"고 했다. "웍에 기름을 두르고 재료를 볶으면 재료가 가진 수분에 의해 기름이 아주 미세한 크기의 방울로 쪼개집니다. 이 기름이 불길에 닿으면서 순간적으로 재료 표면으로 굳혀 맛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고, 기름이 불에 타면서 구수한 향이 배어들도록 하는 게 이른바 웍헤이라는 겁니다. 기름이 불길에 타야지 재료 자체가 타면 안되는거죠." 그러니까 짚의 탄내 혹은 그을음 향이 배이는 짚불구이는 중식에서는 불맛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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