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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대신 태극기를! ‘전주 3.13만세운동’



전북

    책가방 대신 태극기를! ‘전주 3.13만세운동’

    전주 신흥·기전학교 학생 주도… 전북 최대 규모 독립만세운동

    신흥·기전학교, 미국 레이놀즈 선교사 설립 한강 이남 최초 근대교육 시설
    전주서문교회 김인전 목사를 통해 독립선언문 학생들에게 전달
    거사에 붙잡힌 일부 학생 옥사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미완의 과제
    신사참배 거부, 5.18민주화운동 등 민족의 어려움마다 학교와 학생들이 앞장

    전주신흥고등학교 조재승 교장(사진=전북CBS)

     

    ◇ 유연수>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찬양찬양이있는곳에’ 초대석에서는 전북지역 기독교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독립운동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시간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시간 신흥학교·기전학교 학생들, 그리고 전주서문교회가 주축이 됐던 ‘전주 3.13 만세운동’에 대해 알아보죠. 신흥고등학교 조재승 교장선생님 나오셨어요 반갑습니다.

    ◆ 조재승>네 안녕하십니까.

    ◇ 유연수>신흥학교와 기전학교는 예수병원, 전주서문교회와 함께 특정 종교를 넘어 전라북도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라고 할 수 있죠. 학교 설립의 배경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해주시겠어요?

    ◆ 조재승>우리 신흥학교는 1900년 9월 9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레이놀즈 선교사의 집에서 학생 한 명으로 시작된 학교입니다. 1928년...지금은 소실돼서 사라진 학교 본관건물에서 요즘 표현으로 따지면 두루마리로 되어진 ‘타임캡슐’이 나왔어요. 신흥학교 최초의 학생이었던 김창국 목사가 기록을 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하신 박연세 목사가 감수를 하셨습니다.

    1900년부터 신학교 본관건물이 만들어진 1928년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자료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신흥학교가 1900년 9월에 학생 1명으로 시작되었던 학교다.’ 이런 것들을 알 수 있게 해줬거든요. 저희 신흥학교는 전주서문교회나 예수병원처럼 선교의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 중에 하나죠. 그래서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도와주는 사람을 길러보겠다’고 하는 그런 목적으로 시작된 학교 같아요.

    학교에는 한국인 교사들도 계셨는데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었던 것 같아요. 이 분들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예수교 학교’였다가 ‘신흥’이라고 하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데 ‘신흥(新興)’은 문자적으로 ‘새롭게 일어나다’의 의미뿐만 아니라 영어로 이야기 하면 ‘Dawn’, 즉 여명.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첫 시간 이지요 이런 여명의 뜻으로 ‘신흥’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풀어서 이야기 하면,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겠다.’ 그런 어떤 민족적인 웅대한 비전을 가진 학교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봉건으로부터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이죠. 자유, 평등, 자주, 주권재민의 새로운 세상의 주역으로서 학생들을 준비시켜보겠다 하는 뜻을 가지고 신흥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 이름으로 지금 100년 이상을 계속 해오고 있는 학교입니다.

    ◇ 유연수>오래된 역사만큼 수많은 인재도 배출되고 기억될만한 사건도 많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3.13만세운동’에 대해 알아볼 텐데요. 교장선생님과 함께 그 날로 이제부터 가보겠습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 이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거사가 진행됐어요?

    ◆ 조재승>네 3월 1일 시작된 서울 3.1운동은 3월 10일 이후부터는 지방으로도 확산 됩니다. 우리지역에서 제일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지역은 3월 5일 군산입니다. 전주는 3월 13일인데 이 날이 전주 장날이었던 것 같아요. 장날을 기해서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그런 것을 기회삼아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전주 3.1운동(3.13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쪽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가 서울로부터 전달되는 루트도 사실은 둘이었어요. 천도교 쪽은 보성사 사무원이었던 인종익씨를 통해서 전해진 것 같고 우리 기독교 쪽은 서울의 남대문교회 한태영 장로를 통해서 기전학교를 졸업하고 천안에서 소학교 교사로 있었던 임영신씨를 거쳐 전주서문교회 김인전 목사에게 전달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3월 13일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을 보면 전주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함께 서로 연합해서 선도한 것으로 알고 있고요.

    ◇ 유연수>김인전 목사님이 독립선언문을 받아보게 됐고 우리 신흥·기전학교 학생들은 어떻게 이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게 된거에요?

    ◆ 조재승>김인전 목사님은 전주서문교회 목사님이었고 이전에 군산에 영명학교 선생님(임시 교원)으로 계셨다고 해요. 평상시에 민족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그런 목사님이고 당시에는 교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신흥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교인으로 출석을 많이 하고 있었죠.

    그리고 전주서문교회, 신흥·기전학교는 선교사가 세운 같은 기관들이기 때문에 꼭 ‘교회다, 학교다’ 이런 구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민족의식이 강했던 김인전 목사님을 통해서 학생들이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김인전 목사님을 중심으로 전주서문교회 교인, 신흥·기전학교 학생들이 함께 3.13만세운동을 준비해갈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전주 3.13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는 신흥·기전고등학교 학생들의 모습(사진=전주신흥고등학교 제공)

     

    ◇ 유연수>그렇게 거사 준비를 마치고, 남부시장에서 거사가 진행됐어요. 1919년 3월 13일 장터의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 조재승>신흥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나 이런 것들을 학교 지하실에서 몰래 만들었죠. 그리고 장날 채소를 실어 나르는 것처럼 수레로 위장해서 그 아래 태극기를 숨겨 가지고 나와 장날에 나온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선도했다고 해요.

    ◇ 유연수>이 날 만 명 가량의 시민이 참여 했다는 기록을 봤는데 당시 만 명이면 굉장히 많은 인원이잖아요. 요즘처럼 사전에 SNS로 거사에 동참할 인원을 모집했을 리도 없고, 철저히 은밀하게 계획된 사건이었을 텐데 순식간에 만 명가량의 시민이 참여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데요. 이럴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 조재승>전주지역의 3.13만세운동 관련해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기록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매일신보’의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소요사태’ 이런 식으로 보도를 했는데 3월 13일 만세시위와 관련해 총 다섯 차례 매일신보에 기사 내용이 있더라고요.

    제일 첫날은 만여 명, 같은 시위인데 둘째 날은 수백 명, 세 번째 날 기사를 보니까 예수교 학생(신흥·기전) 및 천도교인들이 주도가 돼서 백여 명, 17일은 ‘제 2공립 보통학교’ 지금의 ‘완산초등학교’입니다. 그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 때 또 한 천여 명...뭐 이렇게 같은 날 사건을 가지고도 숫자에 차이들을 보이더라고요. 그 다음 날 신문 보도에는 ‘다섯 학생이 선도하고 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때 일제는 ‘용산에 있는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전주에 파견을 했다.’ 그렇게 나오고 있거든요.

    ◇ 유연수>3월 13일 당일은 일본군과 경찰이 많이 배치되지는 않았었나요.

    ◆ 조재승>물론 3월 1일 이후에 조선총독부나 일본 경찰 쪽에서는 예의주시하고 긴장하고 있었겠지요. 실제로 학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휴교 조치’ 등을 감행합니다. 그러자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을 집에 가지 못하게 하고 동참을 권유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유연수>만여 명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정말 대단했을 것 같은데요 당황한 일본 군경의 진압에 수많은 사람이 다치기도 했을 텐데 거사를 주도한 학생들은 이후에 어떻게 됐나요.

    ◆ 조재승>평화적인 만세시위에 대해서 일제가 강경대응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소방대의 갈고리를 사람에게 내리쳐 그걸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 했다던가 총칼로 사람을 살상하는 일들이 벌어졌는데 이런 만세시위로 인해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이 재판을 받고 투옥을 하게 됩니다. 기전학교는 졸업생이었던 임영신씨를 중심으로 13명, 신흥학교는 선생님과 학생 포함해서 십여 명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전학교 학생들은 6개월 선고 받고 3년 집행유예로 사실 실형을 받은 학생들은 없는 것 같은데, 신흥학교 관련된 사람들은 6개월 내지 1년 옥살이 하는 과정에서 옥사를 하신 분도 계시고요. 옥살이를 다 하고 나와서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이 기록에 의하면 세 분 계십니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분들이 다 독립유공자로 대우를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거든요. 저희 학교 입장에서는 제일 큰 과제기도 합니다. 그런데 3년 전에 김점쇠라고 하는 분이 당시 1년 선고를 받고 복역한 이후에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이 계세요. 그분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어요. 이것도 직계는 아니지만 후손들이 계셔서 개인적인 노력으로 독립운동을 인정받고 훈장을 받은 경우거든요. 후손이 계시지 않다 하더라도 이 것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판기록물도 있으니까 (독립유공자로) 해줘야 맞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 유연수>이맘 때 즈음 개학을 앞두고 학사 일정 때문에 바쁘실 텐데 신흥·기전학교는 매년 3월에 다른 학교들보다 더 바쁘시죠? 올해는 3.1절 100주년을 맞아서 더 특별한 행사를 준비 중이신가요?

    ◆ 조재승>특별한 행사라기보다 100주년이 되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전주시가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3.13만세 재현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는 지역의 교회 목사님들, 광복회, 보훈지청,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6년 됐죠. 신흥학교 운동장에서 시작해서 관통로-팔달로 만세시위 재현을 했고요 만세시위와 관련된 주제로 학생들이 플래시몹과 재현극을 했습니다.

    올해는 100주년이다 보니 규모를 키워서 신흥중학교 학생들도 참여하게 됐고요 전주시에서도 각급 학교에 참여를 요청하는 공문들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다른 때보다는 성대하게 열릴 것 같은데 학생들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들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날짜는 3월 9일입니다. 항상 3월 13일 이전 토요일에 진행을 해왔어요. 오후 2시에 신흥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전주 시내 일대에서 전주 3.13 만세운동 기념 시가행진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사진=전주신흥고등학교 제공)

     

    ◇ 유연수>아무래도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쉬움도 있을 것 같은데요.

    ◆ 조재승>학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요. 가장 큰 제약은 봄방학이라는 점. 학교에 학생들이 나와 있으면 이런 준비가 수월할 텐데 개학하기에도 상당히 바쁜데 바로 이어서 이런 행사를 하려다보니 학교로서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 유연수>이게 매 년 열리는 행사잖아요.

    ◆ 조재승>그렇죠. 게다가 신입생들은 학교를 잘 모르는 상태인데 이런 학생들에게 잘 이야기 하고 공감을 얻은 가운데서 동참을 유도해야하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은 있지만 학교로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역사이기에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참여를 권하고 있습니다.

    ◇ 유연수>우리 학생들은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게 되고 자긍심, 자부심도 갖게 될 것 같아요.

    ◆ 조재승>그럼요. 제가 아쉬운 것은 신흥학교가 지역에 끼친 영향이 많다고 보거든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3.13만세운동이라든지 1930년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폐교를 당해 10년이나 학교에 공백기가 있었던 역사 등 해방되지 않았다면 학교 운영을 다시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가까이는 1980년 광주 5.18 사건 때 광주가 진압되던 5월 27일 우리 신흥학교 학생들이 전국의 고등학교 학생들로는 유일하게 “전두환 물러나라!계엄 철폐하라!” 이런 구호들을 외치면서 민주화 시위를 했어요. 그리고 시국토론회도 하고, 신앙이 있는 학교이기 때문에 나라를 위한 통성기도회도 갖고...이 때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참여한 학생들에게) 내릴 수밖에 없었던 징계를 3학년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지 30년 만에 무효로 선언하고 이제는 이 학생들을 학교가 ‘신흥 민주화운동의 유공자’로 인정을 해주고 있고요.

    5월 27일 사건과 관련해 학교가 민주주의를 주제로 하는 백일장 대회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 선교의 역사 등등 이런 것들은 특정학교의 역사가 아니라 좁게는 전주의 역사고 더 넓게 이야기 하면 대한민국 민족사의 한 부분이지 않겠는가 생각하기에 그런 부분들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 유연수>그렇군요. 나라를 구하는 일에는 남녀노소 구분은 없겠지만 이렇게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학생들이 앞장서야 했던 슬픈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어른들의 역할이 정말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조재승>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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