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이런 명세표는 없었다" 오르지 않는 임금

이효상 기자 2019. 2. 2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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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미옥씨는 경북 구미의 비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인 KEC에 1988년 입사했다. 올해로 31년차 정규직이다. 근속수당 11만1500원이 포함된 그의 새해 첫 월급은 174만5150원이다. 공교롭게 올해 최저임금에 딱 맞췄다.

김상민 화백

같은 회사에 다니는 1년차 신입사원 ㄴ씨는 근속수당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새해 첫 월급은 174만5150원이다. 1년을 다니건, 30년을 다니건 이 회사는 최저임금만큼만 월급을 준다. 최저임금이 곧 최고임금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이 가능한 이유는 사측이 ‘직능급3’이라는 이름의 수당으로 최저임금 미달자들의 월급을 보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노동자의 근속연수와 자격증 소지 여부, 위험작업 여부에 따라 수당을 달리 준다. 문제는 각종 수당을 더해도 최저임금에는 미달한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어드는 수당을 만들어냈다. 직능급3 수당은 이미옥씨에게 4만7940원 지급되고, ㄱ씨에게는 50만5910원 지급된다. 오래 일하거나, 자격증이 있거나, 위험작업을 하는 노동자는 직능급3 수당에서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미옥씨는 “사측의 임금체계에 문제가 있으니 고용노동부에 시정조치를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전혀 시정이 되지 않고 있다”며 “법적 문제는 안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저임금을 다양한 수당으로 보전하는 한국의 기형적인 임금체계와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가 만나 혼란이 폭발하고 있다. 최저임금이 10.9% 올랐다지만 각종 수당과 상여금이 월급에 녹아들면서 임금은 동결되고, 실수령액은 감소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현장투쟁 복원과 계급적 연대 실현을 위한 전국노동자모임(전국모임)은 20일 오전 제조업종을 중심으로 빈발하는 임금 동결 사례를 모아 발표하는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청우 전국모임 집행위원은 “지금까지 이런 명세표는 없었다. 이것은 임금인가 누더기인가?”라며 “당정은 연봉 2500만원 전후의 가난한 노동자 임금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연 600%인 상여금이 격월 지급에서 매달 분할지급으로 바뀌면서 기본급이 동결됐다. 지난해 산입범위 확대로 매달 지급되는 상여금의 경우 최저임금의 25%를 초과하는 부분은 산입범위에 포함된다. 이런 식으로 현대차 1차 하청업체에 근무하는 김모씨의 시급은 전년과 동일한 6856원으로 동결됐다.

노동자 ㄴ씨는 “15년차인데 지난해 2600~2700만원을 받았다. 하청업체에서 특근을 안하면 2500만원 밖에 쥘 수 없는데 그들도 임금이 동결됐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사측이 올해 임금 동결을 일방 통보했다는 점이다. 상여금 지급 방식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취업규칙을 변경해야 한다. 또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취업규칙 변경은 노동자 동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지난해 최저임금법이 개정되면서 상여금 월별 지급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은 불이익 변경으로 보지 않는다는 특례가 도입됐다.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김현제 대의원은 “사측이 의견은 들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도 반대 서명만 해달라고 했다”며 “2차 하청업체에서는 급여지급일이 15일이면 하루 전에 동의서를 가져와 이번달부터 상여금을 50%씩 쪼개 지급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한국지엠 부평공장 사내하청업체 태호코퍼레이션은 상여금을 일방적으로 반토막냈다. 이 업체는 삭감분만큼 각종 수당을 소폭 인상해 작년과 거의 비슷한 임금 수준을 맞췄다. 올해 최저임금 인상으로 월급은 17만원 올랐어야 하지만 이 업체 노동자의 월급은 1만원 남짓 오르는데 그쳤다.

이청우 집행위원은 이 업체의 명세표를 제시하며 “임금총액을 보면 연장수당·특근수당을 포함해 215만원 정도 된다”며 “1년에 2500만원 수준이지만 최저임금 인상효과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저임금의 7%를 초과하는 복지수당, 25%를 초과하는 상여금을 산입하도록 하는 등 제도를 복잡하게 설계한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일부 수당은 깎고 일부 수당은 명목을 바꾸는 방식으로 사측이 임금체계를 조합함으로써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무력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임금명세표인지 누더기인지 모르는 상황이 초래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는 기업의 최저임금 준수율 제고를 기대할 수 없는 조악한 방식의 제도”라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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