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의원 아들이라 소문났을 뿐..베일 속 국회 프리패스 카드"

김빛이라 2019. 2. 2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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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출입기자들에게 발급되는 상시 출입증

국회 출입기자로 등록된 저는 이른바 ‘녹색 카드’를 갖고 있습니다. 국회를 중심으로 취재하는 정당 출입기자에게 국회가 경찰에 신원조회를 거친 뒤 발급해주는 2년 한도의 상시 출입증입니다. 물론 언론사별 할당이 엄격하게 돼 있어서 출입처를 옮기게 되면 그 즉시 반납해야 합니다. 이 출입증을 상시 소지하고 있어야만 의원회관을 돌면서 의원이나 보좌진을 만나 취재를 할 수 있고, 국회 본관에 있는 각 정당 사무실, 회의장, 위원장실 등에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현관에서 출입증 한 번 인증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인증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한 번은 상임위 전체회의장에 갔다가 출입증을 제시간에 못 내미는 바람에 문 앞에서 쫓겨난 적도 있습니다. 이 카드를 분실하게 되면, 국회 미디어담당관실에 방문해 분실 사유서를 적고 공문에 언론사 사장 명의의 도장을 받은 뒤에도 몇 주가 지나서야 다시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매일 임시 출입증을 발급받고 또 반납하며 출입해야 합니다. 국회 출입기자라면 스마트폰은 안 챙길지라도 화장실을 갈 때도 들고 있는 카드라고 할 수 있죠.
이 까다로운 상시 출입증은 국회 사무처 직원, 의원실 보좌진, 출입기자에게만 제공됩니다. '24시간 프리패스' 혜택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국회 안에 있는 치과와 내과 같은 의료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국회둔치주차장도 출입증을 확인하면 무료입니다. 국회 본관과 의원회관 구내식당 밥값도 할인되고 국회도서관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재한 장소 외에 무단으로 방문하면 청사출입이 제한될 수 있다는 문구가 쓰여있다.


그렇다면 이 상시 출입증이 없는 경우는 어떨까요. 일단 국회 본관이나 의원회관 민원실에 가서 만나는 사람, 방문 목적을 적은 신청서를 안내대에 내고 신분증을 맡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OOO 의원실 OOO 보좌관을 만나러 왔다고 적어내면, 실제 해당 의원실 확인을 거친 뒤에야 방문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원회관 안에서 각종 토론회도 수차례 열리고, 국회 본관에서도 종일 시민단체 기자회견이 줄지어 있기 때문에 수십 명이 임시 출입증 발급을 위해 줄 서 있는 풍경은 어렵지 않게 목격됩니다. 물론 이 '일시 통행증'은 유효기간이 하루를 넘길 수 없는 데다 상시 출입증의 쏠쏠한 혜택도 누릴 수 없습니다.


국회 '입법보조원'이 된 박순자 의원 아들
최근 국토교통위원장인 자유한국당 3선의 박순자 의원 아들이 ‘상시 출입증’을 소지하고 자유롭게 국회를 드나든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면서 국회 출입증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죠. 어떻게 발급받았나 살펴보니, 국회 보좌진 개념으로 분류되는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해 받았다는 겁니다.
국회의원수당법에 따라 의원 1명은 유급 직원인 보좌관, 비서관, 비서, 그리고 인턴 2명까지 총 9명의 유급 보좌진을 둘 수 있게 돼 있는데 여기에 2명을 더 추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입법 활동을 보조하는 용도로 무급으로 활동하는 입법보조원입니다. 국회출입에 관한 내부 규정에도 ‘입법활동을 보조하는 자’에게 상시 출입증이 발급되도록 명시돼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한 기업에서 대관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박 의원의 아들 A 씨의 경우, 박 의원실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해 상시 출입증을 발급받았고, 논란이 불거진 뒤 출입증을 반납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대관 담당자, “당 대표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만능 카드"
박 의원 아들 A 씨의 ‘상시 출입증’ 소지 사실이 알려지자 안팎에서 특혜 비판이 쏟아졌고 바른미래당에서는 “아들과의 담소는 집에서 나누라”고 일갈하는 논평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A씨가 이해가 된다’는 이야기들을 쏟아낸 건 다름 아닌 대관,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A 씨 같은 대관 담당자들이었습니다. 각 기업이나 기관들에서 관련 입법 정보를 수집하고,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의원실을 기자들보다 더 많이 들락날락하는 이들에게 ‘상시 출입증’은 그 무엇보다 누리고 싶은 특혜라는 겁니다.
모 기업 대관 담당자인 B 씨는 “단순히, 국회를 드나들 때마다 출입증을 발급받는 절차가 번거롭고 불편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털어놨습니다. “상시 출입증이 있으면, 어느 의원실을 방문했는지 기록이 남는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채로 국회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어 의원이나 보좌진을 접촉하기 훨씬 수월해진다”는 겁니다. 가령, 기업 회장 지시로 당 원내대표를 접촉해도 입법보조원 신분이라면 약속을 잡는 데에도 훨씬 자유롭고, 국정감사를 앞두고 기업 소관 상임위 의원실에 여러 번 방문해도 기록 자체가 남지 않아 서로 부담되지 않겠죠. 그러고 보니 대관 담당자에게 ‘입법보조원 출입증’은 그야말로 가장 갖고 싶은 카드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박 의원 아들이라 소문났을 뿐,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순자 의원 아들의 경우 ‘소문이 나서’ 알려졌을 뿐, 대관 담당자들이 입법보조원 출입증을 받는 건 크게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라는 게 국회 보좌진들의 말입니다. 모 의원실 보좌진은 “몇 년 사이 논란 보도가 있을 때마다 슬쩍 출입증을 반납하는 대관 담당자들이 있는데 또다시 등록해달라고 오기도 한다”고 밝혔습니다. 현재도 KT에서 대관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정갑윤 의원의 아들도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정 의원실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해 출입증을 받아 한 차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의원이나 보좌진 측면에서 봐도, 비어있는 입법보조원 자리에 대관 담당자를 등록시켜주는 특혜를 베풀면서 특정 기업이나 기관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갈 수 있다면 ‘상부상조’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출입증' 가진 입법보조원 294명...국회 사무처 “우리도 이름만 알아요"
취재하면서 눈길을 끌었던 사실은, 입법보조원으로 그 누구를 등록한다 해도 ‘본인이 털어놓기 전엔’ 의원실과의 관계도 정확한 활동 내용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국회 사무처에 입법보조원에 관한 규정을 문의해보니 “입법보조원은 무급의 ‘활동 보조원’으로 각 의원실에서 상시로 등록할 수 있기 때문에 국회 차원에서도 가족관계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즉, 규정상 '내가 O 의원의 자녀, 친척’이라고 먼저 밝히지 않는 한 출입증 발급 과정에서는 이 같은 부분을 전혀 확인할 수도, 문제로 삼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입법보조원의 이름 같은 기본적인 신상 이외에 다른 정보들을 확인할 방법도, 의무도 없다는 결론입니다.
의원실에서 입법보조원의 신원확인서를 제출하면 경찰의 신원조회를 거쳐 어렵지 않게 발급되는 출입증 개념일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무급직이기 때문에 겸직이나 외부 활동 내용을 심사할 필요가 없어 국회 차원의 엄격한 심사를 거치지도 않습니다. 국회 차원에서는 '입법보조원 리스트'를 의회경호담당관실에서 관리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정보보호법’에 해당하는 사안이라며 기자는 입법보조원의 이름이 담긴 명단조차 받을 수 없었습니다. 보좌진들의 내부 업무망에조차 ‘입법보조원’은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취재하는 과정에서는 현재 298명의 국회의원실에 모두 294명의 입법보조원이 등록돼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294명 중에는 의원의 입법과 관련된 활동을 도우며 충실한 활동을 하는 입법보조원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베일 속에 싸여있는 존재’여도 상관없는 규정 때문에, 우습게도 누군가에게는 편법으로 받고 싶은 ‘출입증 발급 경로’가 되어버린 건 아닌가 싶습니다.


‘국회 출입증’ 누군가의 특혜여야만 할까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국회 출입 제도가 이렇게 엄격할 필요가 있느냐는 부분입니다. 대학 시절 미국 워싱턴DC에서 6개월간 미 의회를 매일같이 드나든 적이 있습니다. 미 의회에는 우리나라 국회와 달리 신상이 담긴 신청서를 적어내고 신분증을 맡겨야 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국회의원이든, 방문객이든 소지품을 검사하는 간단한 보안검색대만 지날 뿐입니다. 까다로운 절차 없이 자유롭게 국회에 들어가 의원실을 방문하고 보좌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방문 목적과 시간을 사전에 알려야 하고, 거동이 눈에 띄게 의심되는 이들을 즉각 제지할 보안 경찰은 상시 대기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규모 NGO 단체나 어린 학생들에게도 의견을 전달하러 국회를 찾아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활동으로 자리 잡은 분위기였습니다. 국회를 떠올리면 느껴지는 위압감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출입증 제도'는 언제까지나 누군가의 특혜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김빛이라 기자 (gl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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