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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멋따라] 제주도 작은 미술관 화재가 태운 것은…

송고시간2019-02-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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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여행자들이 자주 찾던 제주 서귀포시 가시리의 작은 미술관에서 불이 났다.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소재 서재철 갤러리 자연사랑미술관 숙소에 불이 난 것은 지난달 19일 오전 1시 26분께.

불은 46분 만에 진화됐지만, 숙소 47.27㎡ 내부가 소진돼 소방서 추산 약 1천여만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화재를 처음 발견한 것은 새벽 1시 30분께 밤낚시를 마치고 귀가하던 동네 주민이다. 한참을 타던 불은 숙소를 태우고 전시장으로 번지기 직전에 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불은 삽시간에 건물 내부를 몽땅 태웠다. 때마침 집을 비운 주인 대신 부인과 아들이 현장에 갔을 땐 이미 건물이 온통 까맣게 불탄 뒤였다.

집주인은 전직 언론인이자 갤러리 관장인 서재철(72) 씨.

불에 탄 니콘 카메라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불에 탄 니콘 카메라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폐교된 가시초등학교를 활용해 마련된 서재철 갤러리 자연사랑은 30여 년 동안 지역 언론계에서 사진기자로 일해온 서씨가 촬영한 한라산 등 신비스러운 제주의 자연과 도민들의 삶의 현장인 포구, 해녀 등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서씨는 1979년 8월 한라산 파괴 현장 추적 보도로 사진 부문 한국기자상을 받는 등 지역 언론계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서씨는 사진 작업차 미얀마, 라오스, 태국 등지를 19박 20일 동안 여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터였다.

부인도 그날따라 제주 시내에 있는 집에 가 있던 상황이었다. 평소엔 보안 때문에라도 누군가는 그 방을 지켰지만, 때마침 아무도 없었다. 사진 작업을 하기 위해 방 안에 필름과 백업 하드도 그대로 두고 나왔다고 한다.

가까스로 건진 것은 수첩 2권이 전부. 그러나 사진은 모두 불타 버렸다.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가까스로 건진 것은 수첩 2권이 전부. 그러나 사진은 모두 불타 버렸다.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말이 숙소지만 이곳은 사실상 서씨의 작업실이나 마찬가지다.

이번에 불탄 것들은 주로 1960년대 촬영한 흑백 제주 항공사진들이라 더욱 안타깝다.

카메라 장비는 물론 오랫동안 기록한 일기와 편지, 중요한 날 입겠다며 고이 모셔둔 양복, 딸이 사다 준 신발이라면서 흙 한번 안 묻힌 등산화 등도 그 방에 있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서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서재철 작가가 현역 시절인 1982년 2월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촬영해 특종 보도한 추락 군용기 사진.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해 이른바 '봉황새작전'을 펼치던 것으로 알려진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수송기가 한라산 1천60m 고지에서 추락해 전원 사망한 사고였다.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서재철 작가가 현역 시절인 1982년 2월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촬영해 특종 보도한 추락 군용기 사진.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해 이른바 '봉황새작전'을 펼치던 것으로 알려진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수송기가 한라산 1천60m 고지에서 추락해 전원 사망한 사고였다.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그나마 건진 것은 서씨가 틈틈이 기록해 온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메모들이다.

아버지를 따라 기자가 된 딸 서경리 씨는 이 안타까운 사연을 SNS에 올렸다.

"똑같은 질문만 서너번 했던 것 같다. 다 타버린 거 맞냐고. 재차 여쭈셨다."

서씨의 귀중한 것들이 모두 타버린 갤러리 화재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서씨의 귀중한 것들이 모두 타버린 갤러리 화재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서씨는 여행을 떠나기 전 숙소에서 미술관의 중요한 필름 자료를 모아 따로 정리했다고 한다. 1960년대 귀중한 흑백 자료도 방에서 작업했다고 한다.

그를 봐온 지인 가운데 한 명은 "개인의 손실뿐만 아니라 제주도 역사 기록이 모두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제주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자연사랑 미술관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제주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자연사랑 미술관 [자연사랑미술관 제공]

딸 경리 씨는 "사람들은 사진의 가치에 대해 간혹 가볍게 생각하지만 사진 한 컷, 그 전후의 노력은 상상도 못 한다"면서 "그날 불에 탄 건 단순히 필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노력이자 땀이자 일생"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SNS에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소방서 추산 재산피해 1천만원. 아버지 추산…측정 불가"

polpo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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