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농단' 촉발시킨 이탄희 판사가 사직하며 한 말 [전문 포함]

천금주 기자 2019. 1. 30. 0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SBS 뉴스 캡처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을 촉발시킨 이탄희 수원지법 안양지원 판사가 최근 법원에 사직서를 낸 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네티즌들이 이 판사의 행적을 검색하면서 인터넷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이탄희 판사’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 판사는 29일 법원 내부 통신망 코트넷을 통해 지난달 초 사직서를 제출한 사실을 밝혔다. “1월 초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말씀드릴 수 없어 마음을 앓았다”고 운을 뗀 이 판사는 “어쩌다 보니 제 처지가 이렇게 됐다”는 심경을 밝혔다.

“좋은 선택을 한 뒤 다시 지켜내는 길고 고단한 과정이 뒤따른다는 것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끝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한다는 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다”고 한 이 판사는 “지난 시절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시작만 혼자였을 뿐 많은 판사님 덕분에 그리고 나중엔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는 소회를 밝힌 이 판사는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다.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는다”고 경계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 판사는“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 가치”라며 “가치에 대한 배신은 거부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앞서 이 판사는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돼 상고법원 도입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열기로 한 학술대회를 견제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거부한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

당시 이 판사는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파일이 있다.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인데 좋은 취지로 한 것이니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는 취지의 말을 듣고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행정처는 이 판사를 원 소속인 수원지법으로 복귀시켰지만 그 배경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법행정권 남용의혹이 불거졌다. 이후 두 차례의 조사 끝에 법관 동향‧성향 파악문건의 존재가 밝혀졌고 재판거래 의혹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기까지 했다.

한편 2008년 수원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한 이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판사와 광주고법 판사 등을 역임하다 지난해 헌법재판소로 파견돼 근무했다.

◆다음은 이탄희 판사가 올린 사직 인사 전문

존경하는 모든 판사님들께

무엇보다, 오랜 기간 동안 전화와 메일 등으로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먼저 터놓고 상의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1월 초에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말씀을 드릴 수 없어 마음 앓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 처지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번 정기인사 때 내려놓자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저에게는 회복과 재충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년이 길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쯤 다시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다시 1년을 겪었습니다. 2년간 유예되었던 사직서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련도 두려움도 줄어서 좋습니다.

처음부터 정의로운 판사를 꿈꿨던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저만의 지기 싫은 마음으로 판사가 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된 이상은 가장 좋은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단 하나의 내 직업, 그에 걸맞은 소명의식을 가진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상이 있는 판사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의 좋은 모습만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럴수록 선배들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소속감을 주는 건전한 법관사회가 제 주위엔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인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가치입니다. 가치에 대한 충심이 공직자로서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가치에 대한 배신은 거부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물러서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좋은 선택을 한 뒤에는 다시 그 선택을 지켜내는 길고 고단한 과정이 뒤따른다는 것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끝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한다는 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법원 자체조사가 좀 제대로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시작만 혼자였을 뿐 많은 판사님들 덕분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모든 분들이 자기의 뜻을 세워 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또 제 입장에서는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드러난 결과는 씁쓸하지만, 과정을 만든 한분 한분은 모두 존경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성운처럼 흩어진 채로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모든 판사들이 독립기관으로서의 실질을 찾아가길 기원합니다. 제 경험으론, 외형과 실질이 다르면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더 큰 공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2년간 배운 것이 많습니다. 한번 금이 간 것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인생은 버린 사람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깨진 유리는 쥘수록 더 아픕니다. 하루라도 먼저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무엇을 하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저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너무나 많은 분들, 그 한분 한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최소한 밖에 하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어 미안합니다.

다시 뵐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 판사 이탄희 올림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