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도 '구독하는 시대' 왔다
[쉽게 읽는 서브컬처-64] "1999년 '매트릭스'와 '애니 기븐 선데이'를 시작으로 DVD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5.1채널 음향에 입문했는데, 총소리 듣고 놀라서 뒤돌아봤다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모은 DVD가 2000장은 될 거에요. 지금요? 블루레이 수집으로 갈아탔죠. 요즘 영화에 옛날에 DVD로 모았던 명작까지 블루레이로 다시 사느라 지출이 장난 아니에요." (블루레이를 수집하는 A씨·38세)
덕후(오타쿠)는 수집하는 존재다.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 대중문화 작품을 애호하는 이라면 컬렉션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레이저 디스크(LD)부터 비디오 테이프(VHS), DVD부터 블루레이, UHD 블루레이로 이어지는 영상 저장매체는 물론 게임 타이틀, 피규어나 만화책 같은 실물(實物)은 오롯이 수집의 대상이다. 덕후 중에는 감상용·소장용·포교용으로 세 개씩은 쟁여 놔야 안심이 된다는 중증 컬렉터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 덕질(어떤 대상에 애착을 갖고 관련 소비를 하는 행위)의 양식이 달라지고 있다. 소유 대신 감상을 택하고, 구입보다 구독을 택하는 마니아가 점차 늘고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는 구독경제(subscription economy) 덕분이다. 일정 요금을 내고 신문이나 잡지를 정기구독하듯 제품과 서비스를 정기적으로 공급받는 구독경제 시장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크레디트스위스 리포트는 2016년 구독경제 시장 규모가 약 4200억달러(약 469조원)에 이르렀으며, 2020년에는 5300억달러(약 594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진단했다.
◆넷플릭스, 라프텔… 무제한을 허(許)하노라
"넷플릭스로 '프렌즈'는 아마 백 번은 봤을 거예요. 집안일 할 땐 그냥 틀어놔요. 집에 프렌즈 DVD도 다 있지만, 이제는 볼 일 없죠 뭐. DVD 찾아서 플레이어 켜고 CD 넣고 기다렸다가 에피소드 고르고 재생하고…넷플릭스 보기 시작한 이후로는 DVD는 귀찮아서 못 보겠어요. 아, 프렌즈랑 비슷한 작품이라고 추천이 뜨기에 'How I Met Your Mother'도 한번 봤는데 요즘 푹 빠졌어요." (넷플릭스 1년 차 사용자 B씨·35세)
구독경제 모델은 크게 △이용 횟수 모델 △정기배송 모델 △반복 대여 모델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이 중 이용 횟수 모델은 비용을 지급하고 사전에 계약된 횟수만큼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월 1만2000원(스탠더드 요금 기준)에 영화·드라마 콘텐츠를 무제한 감상할 수 있는 넷플릭스가 대표적이다. 덕후 중에서도 미드(미국 드라마) 마니아들은 넷플릭스의 유혹을 피해 가기 힘들다. '하우스 오브 카드'나 '퍼니셔]' '기묘한 이야기' 등 화제의 작품들이 독점 제공되는 데다가 시즌 전체가 한 번에 공개되다 보니 주말 내내 미드에 빠져 살기 일쑤다.
미드 덕후들의 덕질 패턴은 계속 변해왔다. 'A특공대' '엑스파일' 'CSI 과학수사대'처럼 공중파에서 수입해 방영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던 중세를 지나, 어렵게 구한 해외 방영분 동영상 파일에 한글 자막 제작자들의 자막을 덧입혀 감상하던 근대를 거쳐, 언제 어디서나 간단하게 작품들을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는 현재에 이르렀다. 2차 판권 시장이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DVD나 블루레이 국내 출시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출시되더라도 선뜻 구매하기엔 부담스러운 가격대이다 보니 넷플릭스에 정착한 미드 덕후가 많다(왕좌의 게임 시즌1부터 시즌7까지 전편이 수록된 블루레이 박스 세트의 정가는 35만4900원이다).
라프텔은 애니메이션판 넷플릭스를 표방한 국산 스트리밍 서비스다. '정의롭고 당당한 덕후를 위한 스트리밍'을 기치로 내걸고 2014년 하반기에 공개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한 라프텔의 회원은 65만명에 달한다.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중 선두다.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처럼 개인의 감상 패턴과 평가 등을 통해 사용자 취향에 맞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추천한다. 소장용 파일 다운로드와 월 9900원 정액제 스트리밍 서비스를 모두 지원한다. 애니플러스와 애니맥스 플러스 등 기존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서비스와 달리 다양한 방송사의 판권작을 한데 모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라프텔 관계자는 "현재 매출 중 80%가 월정액 서비스에서 나온다"고 전했다. 그는 "서비스 초기엔 판권사들이 스트리밍보다 개별 다운로드를 선호했지만, 지금은 스트리밍 조건으로 계약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고 덧붙였다. 구독경제 서비스가 자리 잡으면서 수요에 맞춰 공급자들도 변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라프텔을 창업한 김범준 대표는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워낙 불법 복제·공유가 만연하다 보니 원래의 규모보다 축소돼 인식된 경향이 강하다"면서도 "하지만 한국 애니메이션 소비자의 규모는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불법복제 시장 규모만큼의 잠재력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애니메이션 인구에 대해 "보수적으로 잡아도 30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라프텔 웹사이트에는 애니메이션 외에도 라이트노벨과 만화 같은 다른 덕후 콘텐츠도 사용자들이 평가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DB)화가 진행되고 있다. 향후 서비스 영역을 더 넓히겠다는 포석이다.
◆MS의 실험, 게임도 구독이 가능할까?
"엑스박스 게임패스를 구독하고 나서는 게임 살 일이 확 줄었어요. 예전에는 엔딩 본 타이틀은 중고로 내다 파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죠. 일단 게임패스로 해보면 되니까요. 엑스박스 원 게임 콘솔을 작년 7월에 샀는데 지금까지 패키지 게임은 딱 2개 샀어요. 들인 돈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끝까지 하는 게임도 이제 없죠. 해보고 취향에 안 맞으면 바로 삭제하면 되니까요."(엑스박스 패스를 구독 중인 하드코어 게이머 C씨·45세)
엑스박스 게임패스(이하 게임패스)는 구독경제 서비스를 비디오 게임의 영역까지 확대시켰다. 2017년 6월에 출범한 이 서비스를 구독하면 월 1만1800원(홈쇼핑 간장게장 같은 요상한 가격이지만 미국 서비스 가격인 9.99달러에 환율을 적용한 것이다)에 200종이 넘는(1월 16일 기준 213종) 엑스박스 게임을 추가요금 없이 플레이할 수 있다. 또 구독자가 영구 소장을 위해 게임 타이틀을 구매하면 20%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2018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MS)는 소니 플레이스테이션4에 밀리는 콘솔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발표한다. 앞으로 MS 스튜디오가 출시하는 모든 독점 신작을 출시 당일 게임패스를 통해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6만원을 호가하는 게임 타이틀을 매번 사는 대신 게임패스만 구독하면 신작 타이틀을 즐길 수 있게 된 셈이다. '게임 패키지를 왜 사?'라고 도발적으로 묻는 듯한 게임패스의 등장에 게임 패키지 신품 및 중고품을 판매해 온 소매점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게이머들을 환호했다. 필 스펜서 엑스박스 대표이사는 게임패스 서비스에 대해 "팬 여러분께 게임을 발견하고 즐기는 방법에 대한 더 많은 선택권과 가치를 드릴 것"이라며 "(게임패스가) 촉매제가 돼 게임 개발사 및 퍼블리셔들에게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어주고, 게임이 개발되고 전달되는 방식을 혁신시킬 것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MS의 게임 구독 서비스에 대해 성패를 논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적어도 게임 타이틀 유통과 플레이에 있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MS는 지난해 말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다른 장치에서 엑스박스 게임을 스트리밍으로 즐길 수 있는 '프로젝트 X클라우드'를 공개하고 올해 테스트를 하겠다고 밝혔다. MS의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무제한 구독 서비스는 덕후 문화를 넘어 문화 콘텐츠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해 7월 전자책 서점 서비스 리디북스는 월정액 전자책 서비스 리디셀렉트를 시작했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2만5000여 권의 전자책을 보유한 밀리의 서재는 아예 월정액 무제한 대여 서비스를 내세워 공격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다. 예스24 역시 북클럽이란 이름으로 월정액 서비스 대열에 동참했다.
◆덕후는 무소유의 꿈을 꾸는가
"이것만큼은 소장하자고 마음먹어도 여유 공간이 없어요. 자리가 없어서 내다 팔고, 상자에 넣어서 창고에 쌓아놓고, 이사하다가 망가져서 버리고…. 만화책도 오랜만에 펼쳐보면 누렇게 변색돼 있거든요. 이러다 보니 공간도 차지 안하고, 관리도 쉬운 디지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더라고요." (20년째 만화책을 수집해오다 전자책으로 전향한 D씨·34세)
디지털 콘텐츠는 편리하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을 뿐더러 접근의 편의성, 관리의 용이성 측면에서 물리 매체를 앞선다. D씨는 "처음엔 손에 쥐는 게 없는 디지털 덕질에 대한 허무함도 있었다"면서도 "동영상 파일로 리핑된 영화나 클라우드 서비스에 익숙해지면서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도 차츰 없어졌다. 지금은 꼭 소유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한다"고 말했다. C씨도 "덕질에는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소비의 효율성이 필요한데 월정액 구독 서비스가 그런 니즈를 충족시켜 준다"고 강조했다.
덕후는 수집하는 존재였다. 실물을 대체할 수 있는 디지털 콘텐츠가 아무리 대세로 자리 잡아도 여전히 덕후는 모으고 분류하고 감상한다. 때론 수집의 목적이 콘텐츠에 대한 경험보다 수집욕의 충족이나 팬심(心)의 표출이 앞서기도 한다. 디지털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지만, 아이돌 팬덤은 여전히 CD 앨범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덕후의 소비 패턴은 변하고 있다.
어떤 매체든 가장 먼저 열광하는 것도, 가장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는 것도 결국은 덕후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의 등장과 퇴장을 논할 때 덕후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마니아들이 DVD와 만화책과 토렌트를 내려놓고, 구독경제 시장으로 이동하는 현상은 소비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B씨에게 '덕질의 본질은 소장 아닌가'라고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 돌아왔다. "평생 구독하면 그게 소장 아닌가요?"
[홍성윤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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