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한글 발전 주역은 여성이었다

강구열 2019. 1. 22. 21: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자료로 짚어본 한글과 여성
“국문(한글)이 생긴 후 제일가는 명필”이란 극찬을 받은 이는 서기 이씨라는 여성이었다. 조선말 최고의 실력자였던 신정왕후의 곁에서 일했던 서사상궁(왕실에서 한글로 된 공문서 작성, 왕족의 편지 등을 대립한 상궁)이다. 이씨의 글은 지금도 궁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다.

1906년 윤씨 부인은 시동생을 비난하는 한글 단자(單子)를 관아에 제출했다. 시부모, 남편의 묘지 근처 땅을 팔려 한 것을 문제삼았다.

“과부(윤씨 본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런 마음이 없사온데 하물며 남자가 되어… (땅을) 팔아야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관아는 윤씨의 주장의 받아들여 “엄히 다스리겠다”는 처분을 내렸다.

적어도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한글 발전의 주역은 여성이며, 여성들의 문자생활에서 중심은 한글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미국에서 환수돼 지난 16일 공개된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는 이런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환수를 이끈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선 왕실 여성들의 생활 속에서 한글이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한글 궁체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최고의 한글 명필로 꼽히는 서기 이씨의 한글 편지.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한글 창제 후 제일가는” 여성 명필들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 68점 중에는 서기 이씨가 쓴 편지가 포함돼 있다. 신정왕후가 광산 김씨에게 보낸 것인데, 1874년 2월 8일에 명성황후가 원자(후에 순종)를 출산한 기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서기 이씨는 본래 신정왕후의 지밀나인(至密內人)으로 결혼 후 출궁을 했으나 잘 살지 못하자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신정왕후가 그녀를 재기용한 것은 뛰어난 글씨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서기 이씨 외에도 한글 명필로 알려진 인물 중에는 서희순, 최혜영, 하상궁 등 상궁 신분이 많았다.

한글 명필 중 또 한명 주목해야 할 인물이 윤백영이다. 서기 이씨를 한글 최고의 명필로 꼽은 당사자다. 본인 역시 빼어난 한글 작품을 남긴 서예가로,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한글 궁체로 쓴 서예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입선했으며, 전통적인 한글 궁체를 현대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윤백영의 할머니가 덕온공주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환수된 한글자료 중 가장 주목되는 게 덕온공주가 ‘자경전기(慈慶殿記·창경궁의 자경전을 지은 이유를 밝힌 글)’다. 순원왕후가 딸인 덕온공주에게 명하여 한문 원문에 토를 달아 한글로 쓴 뒤 이어서 우리말 번역문을 적게 했다. 덕온공주가 공주의 신분임에도 궁체를 능숙하게 구사한 한글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부단한 연습으로 글씨를 다듬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자료 중에는 글씨 연습 자료가 전한다. 서사상궁이 되기 위해 궁체 쓰기 공부를 하던 자료를 보면 두 행에 같은 글자를 써가며 연습을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윤백영은 ‘ㅏ’, ‘ㅘ’, ‘ㅝ’ 등 모음 쓰기를 연습했는데 자음이 놓이는 위치에 자음의 순번을 한자 숫자로 써둔 것이 독특하다.

국립한글박물관 관계자는 “한글은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의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다”며 “남성들 중에는 한글을 잘쓴 사람이 있었겠으나 명필이라고 불릴 만한 이를 찾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궁중에서 상궁들이 한글 서체를 공부하던 연습 자료.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한글로 소통한 조선의 여성들

여성이 한글 발전의 주체가 되었다는 건 여성에게 한글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한자 위주의 문자생활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에게 한글은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유교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방편이었다.

최상위 계층인 왕실의 여성은 신하나 선비 등에 명령을 전하는 글을 한글로 작성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는 1680년 12월 송시열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서 “경같이 큰 유학자가 두터운 명망으로 여러 여러 임금의 은혜를 입고 어찌 떨치고 가시려 합니까”라며 출사를 권했다. 명성대비는 위엄 있고, 간절한 편지에 송시열은 출사를 거부하던 뜻을 꺾었다.

사대부 집안의 여성들은 공적인 목소리를 표출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1727년 10월 이이명의 처 광산 김씨는 영조에게 손자와 시동생의 구명을 호소하는 한글 상언(上言)을 올렸다. 교양을 익히는 데도 없어서는 안 되는 수단이었다. 덕온공주 집안 한글자료에 포함된 ‘규훈’은 부녀자가 지켜야 할 덕목이나 예절 등을 기록한 수신서의 성격의 글이다. 한글소설이 유행하면서 이를 필사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는데 정조의 아내인 효의왕후 등은 소설을 직접 번역하여 한글로 기록하고, 궁녀들이 이를 베껴쓰게 했다. 이런 책들 중에는 궁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필사의 교본이 되는 ‘옥원중회연’, ‘낙성비룡’ 같은 것들이 있다.

국어학자인 이종덕 박사는 “전하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일반 백성들도 한글을 유용하게 사용했을 것이란 짐작은 어렵지 않다”며 “여성에게 한글은 교양 습득, 취미 생활, 실생활 등을 위한 수단이었고 문자생활의 핵심이었다”고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