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 싫어 떠났다..KPGA의 검은 머리 이방인 이준석

성호준 2019. 1. 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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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우상조 기자
그 때 참았다면 아마 지금도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태극마크를 달고 쇼트트랙 금메달을 땄을지도 모를 일이다. 팀 내 집단따돌림 사건 같은 일에 휘말렸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지금 골프클럽을 잡고 있다. 국적은 호주가 됐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의 이방인 이준석(31) 얘기다.

이준석은 1988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잘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쇼트트랙으로 대전지역에서 휩쓸었고 대표 선수가 되기 위한 서울의 엘리트 코스에 들어갔다. 그러나 서울 목동 링크에 가서 훈련을 시작하자마자 그만뒀다. 무시무시한 체벌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동안 갈고 닦은 스케이트가 아까웠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체벌에 쇼트트랙 그만 둬

그 후 골프를 했다. 실력이 금방 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호주 퀸즈랜드로 유학을 갔다. 부모님이 "한국에서는 학교 안 가고 운동만 해야 하니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낯선 나라에 가서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웠지만 견딜 만 했다. 차별이 없지 안았으나 체벌보다는 나았다. 또 실력이 있다면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었다. 이준석은 가장 열심히 훈련하는 학생이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연습장에서 공을 쳤다. 8시 반부터 수업을 들었고 오후 3시부터 또 공을 치고, 어두워지면 라이트를 켜고 훈련했다. 깊은 밤에 숙제를 했다.

다른 호주 아이들이 이준석을 따라 새벽에 연습장에 나오기도 했으나 대개 하루 이틀 하다 그만뒀다. 2학년이 되던 해에 동양계 아이가 전학와 새벽 훈련에 동참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꾸준했다. 이준석 보다 일찍 나오는 날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이슨 데이, 세계랭킹 1위를 했던 그 제이슨 데이다.

주니어 선수 시절 이준석과 제이슨 데이.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준석이고 윗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제이슨 데이다. [이준석 제공]
당시 데이는 몸이 아주 말랐다. 골프 실력도 거칠었다. 이준석은 핸디캡이 0이었는데 데이는 11이었다. 이준석은 “제이슨은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치열하게 훈련했다. 우리 둘이 퀸즈랜드 주 주니어 1, 2위를 다퉜고 함께 호주 대표도 됐다”고 했다.

주니어 시절 제이슨 데이와 라이벌

데이는 열아홉 살에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이준석은 한국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 국내 Q스쿨에서 1위를 했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청소년기를 외국에서 보낸 그는 한국 문화를 잘 몰랐다. 일부 선배가 “외국에서 배운 선수라 인사를 제대로 안 한다”고 했다. 그는 “선배 연습에 방해가 될까봐 인사를 못 했는데 그런 일들이 생겼다. 그 다음부터는 인사 안 한다는 선배를 보면 화장실에까지 쫓아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고 기억했다.

그래도 문화차이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성적도 잘 안 나왔다. 용품도 안 맞았고 잔디 적응도 못했다. 이 코치 저 코치를 찾아다니다 스윙도 망가졌다. 이준석은 “어디서든 적응을 잘 하던 제이슨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방황했다. 한국과 호주, 아시안 투어, 중국 투어를 전전했다. 데이는 세계랭킹 1위에 올랐는데 그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준석의 처가는 대구에 있다. 호주에 어학연수를 온 한국인과 사귀다 스물 다섯이던 2013년 결혼했다. 암 투병하던 이준석의 아버지가 손자가 보고 싶다고 해 서둘러 결혼했다. 현재 다섯 살, 세 살인 아이 둘이 있다.

살아 숨쉬는 한, 꿈을 꾼다

2016년 가족이 있는 한국에 돌아오기로 했다. 그러면서 왼 팔에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라는 문신을 했다. 라틴어로 살아 숨 쉬는 한 꿈을 꾸라는 뜻이다.

이준석의 왼 팔에는 살아 있는 한 꿈을 꾸라는 뜻의 라틴어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우상조 기자
한국에 돌아온 후 좋아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몇 차례 우승경쟁을 했다. 이준석은 “작년 후반에 샷 감이 돌아왔다. 올해는 3승이 목표”라고 했다. 이준석은 “한국오픈에서 우승해서 메이저대회인 디 오픈 챔피언십에도 나가고 PGA 투어 CJ컵 출전권도 따 제이슨 데이를 필드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외모가 튄다. 수염도 길렀고 올 블랙, 올 화이트, 레드 등 튀는 색깔의 타이트한 옷을 입는다. 이준석은 “내면은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외면으로 멋지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연예인처럼 운동선수도 TV를 통해 보여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패션은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중계방송에 나온 후 내가 입었던 옷이 많이 팔렸다고 하고, 수염 때문에 알아보는 팬들도 계신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지게 된 짐도 있다. 일부 동료는 “태어난 곳도 한국이고, 활동하는 곳도 한국인데 왜 호주 국적인가, 병역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라고 지적한다.

이준석은 “한국에서 병역 문제는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말하기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주니어 시절 열심히 해서 호주 대표가 됐고, 그래서 호주 국적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호주 국적을 포기했다면 호주에 계신 부모님들도 기반을 잃게 될 상황이었다”고 했다.

내면은 팬들에게 보여줄수 없어 외면을 멋지게 한다

그 정도로 논란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PGA 투어에 있다가 군대에 다녀온 배상문 선배나, 지금 군에 가는 선수를 보면 미안한 생각이 든다. 국적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다.
이준석. 우상조 기자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은 크다. 호주인이 됐지만 이름을 호주식으로 바꾸지 않고 준석으로 쓴다. 서양에서는 매우 발음하기 어려운 이방인의 이름이다.

이준석은 생각한다. 어릴 적 계속 스케이트를 탔으면 어땠을까, 호주로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자신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었을까.

반면 친구인 제이슨 데이처럼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국인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했을까. 그럴 것 같다. 이준석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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