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정당 "의원은 로봇"..모든 결정, 시민이 '블록체인 투표'로 [블록체인-환상인가 혁신인가]

시드니(호주) | 임지선·바르셀로나(스페인) | 주영재 기자 입력 2019. 1. 18. 17:20 수정 2019. 1. 1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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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정치와 투표 시스템

‘블록체인과 정치가 만난다면?’

어느 나라나 선거가 끝나고 나면 ‘부정선거’ ‘개표 오류’ 등의 논란이 나온다. 종이 투표의 한계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항상 남는다. 종이 투표는 비용도 많이 드는 구조다.

▲2016년 7월 호주 상원의원 선거에 사용된 플럭스 정당 포스터. 호주의 블록체인 정당인 플럭스의 네이선 스페타로 대표가 지난달 5일(현지시간) 호주 시드니의 한 사무실에서 가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블록체인 정당과 투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드니(호주) | 임지선 기자

온라인 투표가 종이 투표의 대안으로 거론됐지만 기존 온라인 투표는 ‘개입’ 가능성을 완벽히 차단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이 같은 단점을 뛰어넘는 시스템으로 평가받는 게 블록체인 투표이다. 온라인 투표의 장점인 선거 비용 감소와 투표율 제고, 그리고 보안성까지 갖춘 것이다. 보다 많은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는 예측도 나온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투표 실험은 이미 전 세계 곳곳에서 시작됐다. 호주에서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 출현했는가 하면, 스페인 카탈루냐 자치정부에서는 재외국민 투표에 도입하기로 했다. 한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개별 기관의 설문조사에 시범적으로 블록체인을 도입했다.

■ 호주의 블록체인 정당 ‘플럭스’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하라(Upgrade Democracy).’

2016년 7월 호주의 상원 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등장한 한 정당의 선거 캠페인이다. 이 정당은 ‘플럭스(FLUX)’이다. 플럭스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온라인 투표 시스템을 구현했다. 모든 이슈마다 투표를 통해 의견을 모아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취지이다.

지난해 12월5일 오후(현지시간) 호주 시드니 시내 중심가의 한 빌딩에서 네이선 스페타로 플럭스 대표를 만났다.

호주 플럭스 ‘직접 민주주의’ 실험 해킹 등 투표 결과 개입 불가능 이슈 터질 때마다 시민 뜻 수렴 총선 이듬해 서호주 선거에서 득표율 0.45%…3배나 증가 홍보 없이 당원도 2배 늘어 3월 주선거 의석 확보 목표

카탈루냐 독립, 블록체인 투표로? 재작년 자치정부 지방선거 재외국민 투표율 겨우 12% 블록체인 투표 도입 계획 학교 방학 등 생활밀착 실험도 사안 별로 입장 결정 가능해 정당, 정치적 유연성도 높아져

“20대 초반부터 정치가 현실과 분리돼 있다고 생각했다. 호주의 양당제하에서는 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고 실제 피부로 느낄 만한 정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 화가 많이 났다.”

스페타로는 ‘현실과 유리된 정치’가 아니라 ‘시민의 생각을 그때그때 반영하는 정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만든 게 플럭스이다.

‘플럭스’는 직역하자면 끊임없는 변화라는 뜻이다. 스페타로는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정치도 그에 발맞춰 이슈에 따라 유동성 있게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라고 소개했다.

과거에도 온라인 투표는 있었다. 정당마다 사안별로 온라인 투표를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온라인 투표는 그러나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떨어졌다. 어떤 특정 세력이 해킹이나 조작을 통해 결과에 개입할 우려가 상존했다. 플럭스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개입 우려를 차단했다. 이더리움 초기 개발자 가운데 한 명인 맥스 카이에가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했다. 그는 지금 스페타로와 같이 플럭스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스페타로는 “기존 온라인 투표는 보안에 취약하고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았다”면서 “주최 측은 안전한 시스템이라고 주장하지만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블록체인은 모두가 장부를 공유하는 시스템이어서 ‘신뢰’ 장치를 따로 구축할 필요가 없고 투명하게 프로세스를 검증할 수 있다”며 블록체인 투표의 장점을 꼽았다.

실시간으로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사회적인 이슈가 새로 나올 때마다 블록체인 기반으로 빠르게 온라인 투표를 하고 결과를 모아 정치인에게 전달해 정책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생각을 즉각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플럭스는 2016년 첫 선거에서 후보자들을 언론에 발표하면서 이들을 ‘플럭스 로봇 후보들(Flux Robot Candidates)’이라고 표현했다. 후보자를 의원으로 뽑아주면 플럭스 블록체인 투표에서 결정된 사항을 ‘기계적’으로 ‘왜곡 없이’ 반영하겠다는 의미에서 ‘로봇’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플럭스는 별다른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2년 새 당원 수가 2배 넘게 증가했다. 1월 현재 7500여명에 이른다. 초기에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연령대가 주를 이뤘으나 지금은 10대에서부터 6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해지는 추세를 보인다. 최근에는 90대도 가입했다.

2016년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모든 주에 2명씩 후보를 냈다. 선거 캠페인은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하라’였다. 득표율은 0.15%에 그쳤다. 1년 뒤 치른 2017년 서호주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0.45%까지 올랐다. 스페타로는 “2016년 선거에서는 정당을 만든 지 몇 개월밖에 안됐는데 2만명이 표를 줬고 두번째 선거에서는 3배가량 득표율이 증가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당원들은 ‘플럭스’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현대적인 방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당원인 스티븐 멜론은 “만약 우리 유권자들이 나서서 (정치를) 진정으로 통제한다면, 이것은 정치에서 가장 큰 변화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선거는 올해 3월 호주 뉴사우스웨스트주 주선거다. 여기서 4.5% 이상만 득표하면 의원이 된다. 플럭스는 의석 한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플럭스를 두고 찬반양론이 나뉜다. 시민의 의견을 충실히 빠르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정당으로서 추구하는 일관된 가치가 없고,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 카탈루냐 독립도 블록체인 투표로 할까

‘리베르탓 프레소스 폴리티스!(Llibertat presos politics)’

지난달 14일 오후 8시(현지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에는 약 300명의 시민이 모여 수감된 카탈루냐 자치정부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주변 관공서 건물을 비롯해 거리 곳곳에는 카탈루냐 독립을 상징하는 노란리본을 볼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을 추진하고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전자투표에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체 대상은 아니고 재외국민 투표에서 우선 적용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이스마엘 페냐 로페즈 카탈루냐개방대학 법·정치학 교수는 지난 6월부터 카탈루냐 정부의 시민참여국 이사를 맡아 블록체인을 이용한 전자투표 실험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찾아간 로페즈 교수의 사무실에서도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문구가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그는 “시민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정치의 기본적인 목표 혹은 의무를 블록체인 기술로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페즈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카탈루냐 정부는 블록체인을 이용한 전자투표를 세 단계로 추진한다. 전자투표의 긍정적 효과는 최대화하고 부정적 측면은 최소화하는 것이 큰 방향이다. 재외국민 투표에 가장 먼저 적용하는 이유는 참여자 수가 많지 않아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적기 때문이다.

2017년 12월21일 치른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선거에서 등록된 재외국민 유권자 수는 22만6394명이었지만 투표 참여자는 2만7231명이었다. 재외국민 투표율은 12%를 넘지 않았다. 재외국민을 제외한 투표율이 81.94%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한 것과 대비된다. 카탈루냐 정부는 블록체인 전자투표를 재외국민 투표에 적용할 경우 참여율이 기존의 6~7배가량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투표 비용은 5분의 1로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이용자가 많을수록 비용 감소폭은 더 크다.

두 번째 단계는 사전선거에 이용하는 것이다. 기존의 우편방식을 전자투표로 대체해 우편이 중간에 소실되거나 수취인에게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상황을 막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본 선거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3단계 앞에는 ‘0단계’가 더 있다. 학부모 설문조사를 통해 학교 방학일자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의견수렴을 블록체인을 이용한 전자투표로 하는 것이다. 로페즈 교수는 “0~1단계 기술 실험이 검증되고 결과가 좋다면 바로 마지막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 중앙정부는 지난해 11월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2014년 11월 독립투표는 위헌이라며 그 비용을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블록체인을 독립투표에 활용하면 불법성 여부를 떠나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당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투표율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작이 불가능한 블록체인 기술로 전자투표의 활용도가 커지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기회도 보다 확대된다. 선거와 같은 정치적 목적의 투표만이 아니라 학부모나 노조의 의사결정에도 이를 활용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시민들이 자신과 관련된 공공행정, 정치 과정에 참여할 통로가 넓어지는 것이다.

로페즈 교수는 “시민이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인이 시민의 일상과 괴리된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라며 “블록체인 기술이 이런 위기에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어떤 정책에 대한 지지를 보내거나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일이 좀 더 용이해질 것”이라면서 “직접 민주주의와 의회 민주주의가 융합된 형태인 심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당 형태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좌파 정당은 상대적으로 가톨릭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고, 우파 정당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존 우파 정당의 경우 시장자유주의적 경제를 지지하면서도 낙태에 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블록체인을 이용한 투표로 정당의 입장을 개별 사안별로 결정할 수 있게 되면 정당의 정치적 유연성이 높아진다.

로페즈 교수는 “정당이 하나의 거대 프로그램이 아니라 개별 프로젝트 단위로 정책을 결정하고, 정당 혹은 의회 바깥에서 법안이 발의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면서 시민들의 의견이 더 넓게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시민의 입장을 외면하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문제라면, 블록체인 기술은 정치인이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시민의 의견을 대변하게 하는 의무를 강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드니(호주) | 임지선

■ 특별취재팀 임지선(산업부), 주영재(주간경향부), 이재덕(뉴콘텐츠팀) 기자』

시드니(호주) | 임지선·바르셀로나(스페인) | 주영재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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