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성과 내는 곳은 동료 간 대화와 협동 많은 직장" [다시 쓰는 인구론]
[경향신문] ㆍ평생 노동시대, 생산성이 답
『■ 모두 일할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고 있나
고령화 인한 위기론 쏟아지지만 우선 현재 인구로 생산성 높이기 일·교육·일터 총체적 변화가 답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2017년 생명표’는 그해 태어난 아이들이 평균 2099년(82.7세)까지 살 것으로 전망한다. 2007년생에 비해 2017년생은 3.5년 더 오래 살 정도로 평균수명이 늘고 있다. ‘100세시대’가 조만간 도래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으로 10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두렵다. 평균 49세에 퇴직하는 일반적인 시스템에서 ‘100년의 시간’은 공포다. 퇴직하고 저임금 단순 일자리를 전전해야 한다면 생명의 연장을 축복으로 느낄 수 없다.
고령화로 인해 사회가 무기력해질 것이라는 불안도 크다. 2017년 7월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급속한 고령화 추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연간 경제성장률은 2000~2015년 연평균 3.9%에서 2036년에 0% 안팎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언론들은 ‘10년 후 0% 성장’ 등 위기론만 쏟아냈다. 당시 보고서는 은퇴 시기 연장,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생산성 향상 등 고령화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해줄 대책을 제시했고 “적절하게 대응하면 생산성 향상 등으로 개개인의 후생은 오히려 향상될 수도 있다”고 밝혔지만 이 문장은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의 생산성은 매우 낮다. 피고용인 1인당 노동생산성은 2015년 기준 6만6800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8만5000달러)보다 낮고, 비교국 29개국 중 17위다. 다들 힘들게 오래 일하고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이지만 정작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재 인구로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해답은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다. 일의 의미도, 교육도, 일터도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세계적인 추세와 거꾸로다.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학창 시절 내내 스펙을 쌓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막상 직장에 들어가면 뭘 위해 일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한다. 교육은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 순간 멈추고, 일터는 이제까지의 방식만 고수할 뿐 새로운 문화와 흐름을 거부한다. 인생 3모작, 4모작 시대에 배워야 할 것은 ‘일(직업)’이 아니라 ‘나’ 그리고 ‘관계’다. 평생 자신의 관심사에 귀 기울이고 흥미 있는 주제를 탐구하며 그것을 직업과 연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일할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고 있는가.
회사에 들어가면 자기계발은 더 꿈꾸기 어렵다.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애쓰지만 할수록 자신을 갉아먹는 구조다. 연공서열 구조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일하기는 쉽지 않고 쓸데없는 야근, 회식 문화를 보면 과연 회사에서 이렇게 오래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일의 진행과정에서 필요 없는 절차를 줄이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발언권은 연차가 쌓이는 만큼 생긴다. 한국 회사는 생산성 향상은 꿈꾸기 어려운 구조다. 그 구조에서 개인은 발전이 전혀 없다고 느낀다.
■ 일터 진입 후 ‘사축’이 되는 사회
“회의는 팀장 의견 듣는 자리” ‘직장에서 학습 경험한 비율’ OECD 회원국 33개국 중 꼴찌 문제 해결 능력·협력도 최하위
‘사축’. 한국에서 회사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회사의 가축처럼 일한다는 뜻이다. 직장인들이 자신의 현실을 자조하는 표현으로 이 신조어는 확산됐다. 10년차 직장인 이용철씨(37·가명)는 지난해 이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자기 시간은 없었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무너진 것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아내가 제발 야근 좀 하지 않을 수 없냐고 호소하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다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기 때문에 먼저 나갈 수 없었던 그는 그때부터 “퇴근하겠습니다”라며 손 들고 집에 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가 면담을 하자고 했다. “일도 잘하는데 그렇게 육아 중심으로 살면 도태된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좌절했다. 72년생으로 ‘아직 40대’인 여자 상사가 한 말이라는 점에서 좌절감은 더 컸다. “자신의 아이를 돌보지 말고 회사에 희생하라는 얘기를 하는 곳은 더 다니고 싶지 않았습니다. 10여년 후면 퇴직을 걱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회사에서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한국에서 회사원이 된다는 것은 일과 가족, 일과 여가의 균형을 포기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가족과 보낼 시간을 빼앗겨 결국 인생에 회사만 남지만 2018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둘 당시 평균 연령은 49.1세다. 신입사원들의 절망감은 더욱 크다. 입사 2년차인 김지현씨(26·가명)는 사직서를 써놓고 고민 중이다. 김씨는 “회의 시간이 토론이나 논의의 시간이 아니라 팀장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듣는 자리”라며 “친구들은 다른 회사들도 다 그러니까 참으라고 하는데 회사에서 성장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결과 한국 성인(16~65세)들의 읽기, 쓰기, 수리, 정보통신기술(ICT) 스킬 활용은 OECD 평균을 상회하거나 큰 차이가 없지만 직장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스킬을 활용하는 정도는 33개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동료 간 협력은 33개국 중 가장 낮았다. ‘동료나 상급자로부터의 학습’이나 ‘업무를 통한 학습’을 경험한 노동자의 비율이 OECD 평균을 크게 밑돌았고, 직장에서 학습을 경험한 노동자의 비율은 33개국 중 꼴찌였다. 김용성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소통은 ‘넌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고 얘기하다가 ‘아, 그렇게 생각하면 다를 수 있겠구나’라고 깨닫게 하는 것”이라며 “근로자들이 좋은 퍼포먼스를 내는 곳은 동료 간 대화가 많고 협동이 많은 직장”이라고 말했다.
■ 한국의 일터혁신지수는 감소 중
‘워라밸’ 실현 전제는 생산성 아이디어 공유 ‘제안제도’ 등 일하는 방식과 문화 바꿔야
한국 일터의 숙제는 생산성 향상이다. 2017년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4.3달러로 2011년 30달러를 넘어선 뒤 계속 증가하고는 있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낮다. 비교 가능한 OECD 회원국 22개국 중 17위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일하는 방식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다. 혁신은 개인의 능력의 합이 아니라 신기술부터 일하는 방식, 조직 구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개인에게서 나오는 힘과는 다른 조직에서 나오는 힘, 무형의 자산이다.
이 무형 자산이 개인에게 부정적으로 발휘될 수도, 긍정적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학습된 무기력증’은 조직에 똑똑한 사람이 들어온다 해도 조직 문화가 사람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다는 뜻이다. 반면 조직의 다양한 힘에 의해 노동자가 ‘자기효능감’을 느낄 수도 있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똑같은 사람을 뽑아도 ‘학습된 무기력증’을 심어줄 수 있고, ‘자기효능감’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회사들은 단체로 ‘학습된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걸까. 한국의 일터혁신지수는 떨어지고 있다. 2005~2013년 한국노동연구원 사업체패널 자료의 일터혁신 변수들의 추이를 분석한 결과 직무 분석, 제안제도, 소집단 활동, 정기적인 업무 로테이션 등 대부분의 일터혁신 관련 지표들이 정체되거나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노동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해서 제품 생산과정을 개선할 수 있는 ‘제안제도’를 운영하는 사업체 비중은 2005년 62%에서 2013년 44.9%로 감소했고 일터혁신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논의하는 ‘소집단 활동’도 2005년 44.6%에서 2013년 33.6%로 줄었다.
1990년대 미국 기업의 생산성 성장률은 1.7%까지 감소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4%대 이상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1990년대 초 미국의 제조업체들이 작업 조직을 개편하고 일터혁신을 꾀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기업들의 경우 60% 이상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무 방식을 바꾸거나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참여 기회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50% 이상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선진국이 일과 가정, 일과 여가의 균형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일터혁신을 꾀했기 때문이다.
■ 고령인구를 생산가능인구로 만들려면
실질 은퇴연령 70대인 사회 배움·성장 없는 퇴직 대신 고령 노동자들의 노하우 살려 모든 연령 상생하는 일터 모색
청장년 인구의 생산성 혁신도 숙제지만 고령화 사회에서는 고령인구를 어떻게 활용할지 찾는 것이 더 급한 숙제다.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감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고령인구를 어떻게 활용할지 우리 사회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은 2017년 65세 이상 고령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이 31.5%로 OECD 평균(14.5%)의 2배에 달한다. 실질은퇴연령은 남성 72.9세, 여성 70.6세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청년층의 부양 부담, 연금 갈등 문제만 생각해봐도 노인들이 일하며 함께 부양할 방법을 찾는 것이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숙제다. 노인에게 저임금 일자리만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온 경력을 살리면서 새로운 것을 학습해 조직 속에서 다른 세대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모든 연령대가 상생하는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결정권을 50대 이상이 점유하는 시스템을 민주적으로 바꾸고 ‘40대 팀장 밑에서 60대 팀원이 일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경력이 긴 고령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 쌓은 ‘암묵지(暗默知)’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암묵지는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말이나 글로 남에게 전달되기 어려운 지식이고 ‘명시지(明示知)’는 말이나 글의 형태로 표현, 전달 가능한 지식이다. 일본 도요타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도요타는 암묵지를 명시지로 바꿔 다음 업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손실을 줄였고 작업 시간 중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을 체계적으로 없애면서 생산성을 높였다. 오계택 소장은 “핵심은 같은 8시간을 일하더라도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고령 일자리 논의는 정년 연장, 임금피크제 등 물리적인 부분만 강조되고 있다. 모두가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전형적 연공서열 구조에서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논의는 미진하다. 결국 고령자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숙제다. 위기를 부추기는 사람들은 당장 노동력이 줄어든다고 아우성이지만 OECD 평균(66%)보다 현저히 낮은 여성 고용률(56.8%)을 어떻게 끌어올릴지를 고민하지 않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규용 연구위원은 “물리적인 구조 혁신이 아니라 기업 문화를 바꾸고 작업 방식의 혁신을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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