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고속도로 시대 반세기와 아시안 하이웨이

입력 2018. 12. 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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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공한 지 두 달여 만인 1967년 5월 27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경인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50년 전인 1968년 12월 21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당중국민학교(초등학교) 교정에서는 경인고속도로 전체와 경부고속도로 제1공구(서울∼수원) 구간 개통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고속도로 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다. 개통식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은 경인고속도로 기점인 양평IC와 종점인 가좌IC, 경부고속도로 제1공구 구간 기점인 한남IC와 종점인 수원IC에서 테이프를 끊고 축하 샴페인을 뿌렸다.

국내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는 노폭 24m 4차로에 길이는 23.4㎞였다. 33억8천만 원의 공사비를 들여 1967년 3월 24일 착공, 1년 9개월 만에 완공했다. 주변에 산이 없고 구간이 짧아 터널과 휴게소는 없다. 이듬해 4월 12일에는 고속버스(한진고속) 20대가 처음으로 운행됐다. 이후 고속도로 노폭은 순차적으로 확장되고 길이도 연장됐으나 일부 구간은 일반도로로 편입됐다. 지금은 기점이 인천시 남구 용현동, 종점이 서울시 양천구 신월동이며 길이는 23.89㎞다.

같은 날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은 24.8㎞로, 총 길이 428㎞ 가운데 5.8%였다. 68년 2월 1일 기공식을 올린 지 10개월여 만에 21억1천만 원을 투입해 제1공구 구간을 완성했다. 이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에 걸친 공사가 완료됐다.

1968년 12월 21일 경인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노면에 샴페인을 뿌리며 기뻐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차관 제공을 부탁하러 서독을 방문했다가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전 세계 고속도로의 모델로 꼽히는 아우토반이 전후 경제 부흥의 토대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본∼쾰른 간 아우토반 20여㎞를 시속 160㎞로 달렸고, 오가는 도중에 두 차례나 차에서 내려 노면, 중앙분리대, 인터체인지 등을 유심히 살폈다.

귀국한 이듬해 한국은 일본과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며 한일 청구권 협정을 맺었다. 이때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대금으로 받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가운데 유상 대금 724만 달러(당시 약 27억 원)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쓰였다.

그래도 경부고속도로 총예산 330억 원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휘발유세를 갑절로 올리는가 하면 95억 원의 도로공사채권을 발행하고 통행료 수입 15억 원도 쏟아부었다. 여기에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서울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벌였고 보상비를 지불한 지역에서도 회유와 협박으로 헐값에 매입해 도처에서 원성이 터져 나왔다.

1970년 7월 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치러진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국가기록원 제공]

기술과 경험이 없는 것도 난제였다. 1965년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유일하게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지닌 현대건설이 첫 공구인 서울∼수원을 비롯해 전체의 30%에 이르는 128㎞를 시공했다. 나머지는 대림산업·동아건설·삼부토건·극동건설·삼환기업 등 16개 업체와 육군 건설공병단 3개 대대가 나눠 맡았다.

잦은 시행착오에 희생도 적지 않았다. 최대 난공사 구간인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에서 10여 차례나 낙반 사고가 일어나 9명이 숨지는 등 모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리하게 준공일에 맞추려고 기초공사를 소홀히 하다 보니 나중에 툭하면 땜질 공사를 해 한동안 '영원히 완공되지 못하는 고속도로'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개통 10년이 지나자 보수공사비가 건설비(430억 원)를 넘어섰다.

공사 계획이 발표되자 "국가 재정이 파탄 날 것",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라며 반대 목소리를 냈던 신민당은 준공식 날에도 성명을 통해 "국민의 부담을 무시하고 투자 우선순위를 잘못 결정한 전시행정의 표본"이라고 비판했다. 지금 와서 보면 미래를 내다본 박정희의 결정을 두고 야당이 근시안적으로 발목 잡기에 나선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비싼 비용을 치르고 피해자가 속출하는 등 개발독재의 그늘이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강남 집값 폭등과 영호남 격차 확대도 경부고속도로의 부산물이었다.

고속도로 시대 개막과 함께 등장한 고속버스 안내양의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그래도 고속도로 건설이 경제를 비롯한 각 분야에 걸쳐 가져온 효과는 엄청났다. 자동차로 15시간이나 걸리던 서울∼부산이 5시간으로 단축돼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됐고 자동차 시대의 막이 올랐다. 국내 건설사들의 고속도로 시공 경험은 1973년 삼환기업이 스타트를 끊은 중동 건설 붐의 밑거름이 됐다.

장거리 화물 육상 수송에는 철도가 도로보다 효율적이라지만 철도를 이용할 경우 목적지까지 가려면 역에서 내려 다시 이동해야 한다. 도로로 연결되면 이른바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가 가능하다. 항공이 점과 점의 연결이고, 철도가 선의 연결이라면 도로는 면과 면의 연결이어서 지역을 확장하는 의미를 지닌다.

한국을 지나는 아시안하이웨이 1번(아래)과 6번(위). [한국도로공사 제공]

2006년 말부터 경부고속도로 표지판에서는 '아시안하이웨이'(AH1)라고 적힌 글귀를 볼 수 있다. AH1은 일본∼한국∼북한∼중국∼베트남∼태국∼인도∼이란∼터키를 연결하는 도로망이다. 동해안을 지나는 7번 국도는 한국∼북한∼러시아∼중국∼카자흐스탄∼러시아∼벨라루스를 잇는 AH6의 일부다. 아시안하이웨이는 32개국 55개 노선으로 구성돼 있으며, 대부분 기존 도로를 연결할 계획이다. 아시아(ASIA)의 머리글자를 따서 국제간선에는 A1∼9, 동남아에는 A10∼39, 남아시아 A40∼69, 중동 A70∼99의 번호를 배정했다. 일본은 해저터널로 부산까지 연결하거나 배로 자동차를 실어나를 계획이다.

아시안하이웨이는 21세기 실크로드(비단길)라고 불린다. 고대 실크로드가 동서양 문물의 교역로였듯이 아시아 지역의 국제 육상교통 개발을 지원해 각국과 동서양 교류를 촉진하자는 취지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산하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지금의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가 1959년 발의했다. 한국은 2015년 11월 제25회 서울세계도로대회를 개최하며 제6차 아시안하이웨이 실무회의와 관련 학술행사를 여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남북한 철도·도로 연결구간 현장 시찰에 나선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10월 25일 경기도 파주 경의선 남방한계선 통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오는 26일 개성 판문역에서는 남북한 관계자 100명씩 참여한 가운데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이 열린다. 유엔의 대북제재 때문에 실제 도로 개보수 작업이 진행되려면 추가 협의가 필요하다지만 고속도로 시대 개막 반세기를 맞는 시점에 도로 연결 착공식이 이뤄지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북한 도로가 연결돼 아시안하이웨이가 압록강·두만강 건너까지 이어진다면 남북한의 협력과 화해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70여 년 만에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로 복귀함을 뜻한다. 자동차로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과 평양을 거치고 중국과 러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달릴 수 있는 날을 고대해본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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