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민주화운동 구심..독재정권엔 눈엣가시

2018. 12. 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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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통련은 어떤 단체?

한국 지지하는 민단 간부가 주축
5·16쿠데타 반대 등으로 쫓겨나
김대중 구출 등 민주화운동 일관
영화로 전태일, 광주항쟁 알리기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4년 10월14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한 한통련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왼쪽 둘째)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한통련 관계자들은 이때 공식 여권을 통해 처음 입국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국에서 버림받았지만, 우리는 조국을 버린 적이 없다. 항상 한국 민주정부를 사랑하고 있다.”(송세일 한통련 부의장·사무총장)

“한국에서는 정권교체도 이뤄졌지만, 일본 동포사회에서는 독재정권에 빌붙었던 ‘유신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체제 그대로다. 반면 박정희 시대에 추방된 우리는 여전히 조국이 버린 사람들로 남아 있다.”(김융사 한통련 오사카 본부 대표)

도쿄와 오사카에서 만난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을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한통련의 전신인 한민통(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뿌리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동포들이 만든 단체인 민단이다. 민단과 갈라선 출발점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였다. 쿠데타가 발생한 당일 민단 집행부는 새 단장 권일의 주도로 “군사혁명” 지지 성명을 냈다. 김재화(민단 고문) 등 이에 반대하는 민단 지도자들은 그해 10월 ‘민단정상화 유지간담회’를 만들었다. 민단 개혁을 추진한 이들은 스스로를 ‘민족 양심파’라고 자부했으며, 동포사회에서는 ‘자주파’로 불렸다. 김재화를 비롯해 민단의 도쿄 본부 단장을 지낸 정재준, 중앙본부 부단장 출신의 배동호, 민단의 산하단체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 회장 곽동의 등이 핵심 인물이었다. 이 중 김재화는 단장 8차례와 한국 국회의원(8대)을 지냈으며 곽동의는 한국전쟁 때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인물이다.

민단 개혁을 추구했던 자주파는 1971년 ‘녹음테이프 사건’과 7·4 남북공동성명 뒤 기득권 세력인 중앙파(중앙총본부)에 의해 쫓겨났다. 1971년 3월 민단 단장 선거를 앞두고 주일 대사관의 김기완 공사(중앙정보부 요원, 당시 이름 김재권)가 ‘자주파의 한 핵심 인물(배동호)이 총련(조총련)의 간부와 만나 한국 정부를 전복하는 계획을 짠 녹음테이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자주파 후보의 단장 선출을 막으려 벌인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7·4성명이 나오자 자주파의 민단 도쿄 본부가 총련 도쿄 본부와 함께 지지대회를 열었다. 이에 민단 중앙파는 배동호를 제명한 데 이어 7·4성명을 지지한 청년단체인 한청과 한학동(재일한국학생동맹)을 내쫓았다. 이들 민단 집행부는 박정희의 유신 이후 스스로를 ‘유신 민단’이라고 불렀다.

1973년 8월15일 도쿄에서 열린 한민통 발기선언대회 모습. “김대중 선생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라” “박 독재 타도하고 민주회복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쓴 휘장이 단상에 걸려 있다. <한통련 20년 운동사>
1983년 5월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이자, 한민통 회원들이 일본에서 이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통련 20년 운동사>

자주파가 독자 단체를 만든 것은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만나면서였다. 김대중은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기 직전 마침 일본으로 출국해 있었다. 그는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 유신 독재에 저항하기로 결심했으며, 재일동포 자주파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김대중은 한민통 결성에 앞서 일본의 민주화 동지들에게 ‘대한민국 절대지지, 선 민주회복 후 통일, 총련과는 연계하지 말 것’ 등 세가지 조직 원칙을 밝히면서 “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과 함께 손을 잡고 그러지 않으면 손을 끊겠다고 통고”했고, 받아들여지자 한민통 의장직을 수락했다.(<신동아> 1987년 6월호 참조) 박정희 정권은 한민통 결성 일주일 전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했지만, 자주파는 1973년 8월15일 예정대로 한민통 발기선언대회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어 김대중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한민통은 발기선언대회 첫날 ‘김대중 납치 규탄 재일한국인 민중대회’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박정희와 전두환 등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해왔다. 1980년 김대중이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구출운동에 앞장섰으며, 1983년 김영삼의 민주화요구 단식투쟁 때도 지지 시위를 벌였다. 또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의 투쟁을 그린 영화 <어머니>(1978년), 1980년 광주항쟁의 영상을 모아 만든 영화 <한국 1980년―피의 항쟁>(1980년)을 제작해 일본 전역에서 상영했다. 이와 함께 한민통은 유럽과 미국 동포사회의 지도자들이 참여한 ‘해외 한국인 민주운동 대표자회의’(1977년 8월 도쿄)를 주도하는 등 오랫동안 국외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눈엣가시 같았던 한민통을 1977년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 간첩조작 사건 때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만들었으며, 전두환 세력은 1980년 김대중을 제거하려 ‘한민통=반국가단체’로 대못을 박았다. 한국의 민주화가 이뤄진 뒤인 1989년 한민통은 이름을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바꿨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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