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세련된 거리서 밀려난 포차, 세련된 젊은이들 모여든다

박근희 기자 2018. 12.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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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석구석 감성 포차로드
겨울밤 도심 곳곳에서 희미한 불빛으로 서민들의 차가워진 마음을 달래주던 포장마차가 점차 어디론가 숨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리저리 옮겨 다녔던 창동역 포장마차들은 ‘플랫폼 창동 61’ 부근에 옹기종기 정착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조르고 싶은 겨울 밤. 뿌옇게 김 서린 투명 비닐 천막 사이로 희미한 불빛을 뿜어내는 '포차(포장마차)'가 보인다. 누군가에겐 그저 길 한쪽을 무단 점거한 불법 시설물일 수도 있지만, 서민에게는 팍팍한 하루를 위로하는 낭만적인 아지트였다.

도심에서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며 멸종 위기에 놓였던 포차들이 최근 들어 젊은 층 사이에서 감성 공간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도심 한 귀퉁이에서 불을 밝힌 포차들을 찾아가봤다. 깔끔한 분위기를 앞세운 이자카야, 성업 중인 실내 포차 틈에서 독특한 분위기와 메뉴, 손맛으로 소문난 서울 포차 로드!

연식만큼 향수 간직한 '종로 포차 거리'

"이모, 여기 곱창에 소주 하나요." "이모, 오뎅 국물 좀 더 주세요."….

어스름 해가 지고 난 뒤 포장마차에 불이 켜지면 여기저기서 '이모' 찾는 소리가 들린다. 덩달아 '이모들' 손길이 바빠진다.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서울극장 건너편 종로3가 포장마차 거리는 평균 나이 60대 이상, 포차 경력 20년 이상 이모들이 운영하는 포차들이 모여 있다. 세운상가와 고락을 함께한 이 포차들은 2006년 세운상가 철거와 공원화 사업이 발표되면서 종로3가 대로변으로 쫓겨 나왔다가 결국 서울극장 앞에 자리 잡았다. 종로3가역 기준 '쌍둥이네'를 시작으로 '두꺼비네' '진숙이네' '선이네' '현이네' '고창집' '부안집' '영암집' 등 포장마차 열댓 개는 서로를 부여잡듯이 끈을 연결한 채 나란히 서 있다.

종로3가 포장마차 ‘두꺼비네’를 찾은 단골손님들이 주인과 이야기하고 있다.

"아들이 여덟 살 때 시작했어요. 그 아들이 올해 마흔이 됐고요. 포장마차 하며 아들과 딸 쌍둥이 장가보내고 시집보냈죠." 쌍둥이네 주인 부부가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30년 전 카바이드등(포장마차에서 전기를 쓰기 전 사용하던 일종의 가스등)을 쓰던 시절 종로3가역 15번 출구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이곳 포차들은 오후 6시쯤 인근 보관소에서 기지개를 켜고 나와 영업을 시작한다. 정통 포장마차 안주가 대부분이라 메뉴판이 모두 대동소이하다. "양념은 주인 손맛에 따라 달라지고, 서비스는 손님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인들은 말한다. 오래된 곳인 만큼 만들어내는 음식이나 농담에서 짙은 향수가 느껴진다. '두꺼비네'는 주인이 상냥하고 친근해 오래된 단골손님이 많다. 현재 손맛 좋기로 소문난 '명자네'는 명자씨 건강상 이유로 휴업 중이다. '현이네'·'선이네'·'진숙이네'는 포장마차 안쪽을 서로 연결해 확장형 포차로 꾸몄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오는 20~30대 젊은 층이 많다.

'생오징어튀김' '말고기' '소허파전' 있는 포차 맛집

종로3가 포장마차 거리에서 3·5호선 종로3가역 7번 출구 방향으로 직진하면 익선동 포장마차 거리가 나온다. 오후 5시쯤이면 '레몬 트리'호텔 앞 왕복 2차선 도로 주변에 '제주도' '전라도 익산집' '맨투맨' '짱' 등 포장마차 10여 개가 둥지를 튼다. 익선동은 빈티지한 매력으로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은 지역. 이곳 포차는 주점과 맛집 사이에 있다 보니 대체로 '2차' '3차' 손님이 많다. 크고 작은 활어 수조를 갖춰 싱싱한 해물 안주를 선보이는 것이 이 포차 거리의 특징이다. 그중 '짱'에서는 간재미회·무침과 함께 생새우(1만8000원)·생오징어(1만5000원) 튀김을 맛볼 수 있다. 둘 다 먹고 싶다면 '오튀새튀반반'(1만5000원)도 있다. 주문하자마자 활어 수조에서 오징어와 새우를 잡아 바로 튀겨 준다.

익선동 포장마차 거리.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익선동 포장마차들은 석화 등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도봉구 1호선 창동역 1번 출구. 복합문화 시설 '플랫폼 창동 61' 부근에 있는 창동 포장마차 거리 내 '참새방앗간'은 말고기가 유명하다. 경기도 화성시의 '흙마축산'에서 받은 말고기는 얼려 파는 육회를 제외하고 들어온 날로부터 나흘간 신선한 상태로만 판매한다. 달달하게 양념해 채를 썬 마늘을 얹어 내는 말고기 육회(2만원)는 지방이 거의 없어 소고기보다 담백한 맛이 난다. 육회 외에 구이(2만원)와 사시미(2만3000원), 특수 부위(2만3000원) 등 말고기(모두 300g 기준)를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다. "호기심에 먹었다가 다시 찾는다"는 게 주인의 설명. 다만 말고기 수급에 따라 판매가 어려운 날도 있다. 주인은 "말고기는 어느 정도 수요가 있어야 도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갑오징어숙회(시가), 통영에서 받는다는 생선구이(1만2000~1만8000원)도 맛있다. 전라도 광주 출신 안주인이 만들어내는 솜씨 좋은 안주를 하나씩 맛보다 겨울밤 깊어가는 줄 모른다.

광진구 구의동 강변역 1번 출구 구의공원 앞에 줄지어 있는 강변 포장마차 거리는 다양한 분식류와 포장마차 안주류를 함께 맛볼 수 있다. 번호를 붙인 포차 가운데 '7'번 집은 석쇠에 바로 구워내는 제육구이(1만1000원)와 소허파전(1만1000원)이 별미다. 제육구이는 주변에서도 팔지만 메뉴판에 특별히 '원조'라고 명시해 놓았다. 불 향이 은은하게 나는 제육구이는 주문하자마자 양념해 굽는다. 곁들여 나오는 고추와 깻잎, 마늘을 올려 초장 살짝 찍어 먹는다.

강변 포장마차 거리 ‘7’번집의 제육구이는 주문과 동시에 양념해 석쇠에 구워 준다.

천변 풍경 보이는 신대방역 포차, 기차 소리 들리는 중랑역 포차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2·3번 출구 양옆에 있는 신대방역 포장마차 거리에선 창 밖으로 천변 풍경을 내다보며 닭꼬치(2개 8000원)에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 일본 후쿠오카의 나카스 강변에 늘어선 포장마차 '야타이'만큼은 아니지만 운치가 있다. 닭꼬치 전문 포차가 네댓 개 이어져 있는데 정통 포차보다 가건물 형태의 실내 포차에 가깝다. 지상(地上) 역인 신대방역 하부, 다리 위에 있어 머리 위로는 전철이 지나고, 발아래로는 도림천이 흐른다. 닭꼬치집 중 '해와 달'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도림천 뷰가 좋다. 창쪽 일자형 자리는 방바닥처럼 보일러가 설치돼 있어 겨울에 인기다.

경의중앙선 중랑역 아래에 있는 중랑역 포장마차 거리도 기차 지나가는 소리를 안주 삼기 좋다. 지상 철로 아래 '굴다리' 양옆으로 '경포집' '고향집' '별밤' '으악' '다운이네' '영진포차' 등 포장마차 10개가 나란히 있다. '김치삼겹살' '돈삼합' '철판삼겹살'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김치, 삼겹살구이, 두부가 한 접시에 담겨 나오는 안주가 중랑역 포차 거리의 시그니처 메뉴처럼 알려졌다. 요즘엔 꼬막과 과메기도 맛볼 수 있다.

경의중앙선 중랑역 아래 있는 중랑역 포장마차 거리에선 대표 메뉴인 김치삼겹살과 함께 요즘 꼬막, 과메기가 제철이다.

용산구 서빙고동 온누리교회 주차장 뒤편 이촌한강공원 부근 한가람포장마차는 다소 외진 곳, 도시 소음과 조금 떨어져 조용하게 술잔을 기울이기 안성맞춤이다. 곰장어, 닭똥집, 제육볶음, 두부김치 등이 모두 8000원. 6000원부터 시작해 1만원 안팎의 '가성비' 안주 때문에 강 건너오는 손님들도 있다. 포차는 대체로 새벽까지 영업하는데 이곳은 오후 5시쯤 문 열어 새벽 1시쯤 마감한다. 느지막하게 3차 하러 갔다간 허탕칠 수 있다.

포장마차와 함께 사라지는 옛 풍경

주머니 가벼운 서민을 위해 '잔술'을 팔던 포장마차는 사라진 지 오래다. 여전히 카드 사용은 불가, 현금이 환영받는다. 현금이 없을 땐 '실시간 계좌 이체'라도 해야 한다. 뜨끈한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잔 할 수 있는 '싼 술집'을 기대하고 왔다간 실망하고 돌아설 수 있다. '메인 안주' 주문을 요구하는 곳도 있다. 포장마차 주인들은 "요즘 물가가 옛날 같지 않고 포장마차 보관료 등 운영비도 만만치 않아 인심 쓰기 힘들어진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그동안 노점 포장마차 위생, 안전, 불법 영업 등으로 수시로 수술대에 올랐다. 마포구 아현 포장마차 골목이 개발로 사라진 데 이어 종로3가 포장마차 거리 길바닥엔 얼마 전 노란 선이 그어졌다. 자전거도로를 만든다고 한다. 서울시는 내년부터 노점상 규격화와 도로 사용료 징수 등을 포함하는 '노점상 허가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연말에 본 포장마차 지도와 풍경이 대폭 바뀌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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