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좀 참고 살아요"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경찰은 왜..

박민지 기자 2018. 12. 2. 0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찰,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며 두둔"
게티이미지뱅크

A씨는 남편으로부터 수시로 가정폭력을 당했다. 남편은 욕설과 무시·비하 발언을 일삼았다. 살해 협박도 빈번했다. 흉기를 들고 위협하고 목을 조르는 일도 있었다. 그는 경찰에 4번이나 남편을 신고했다. 그때마다 경찰은 “가정을 유지하라”는 조언을 남기고 돌아갔다.

B씨는 경찰에 남편을 무려 8번이나 신고했다. 칼을 들고 협박하거나 성폭행을 하기도 했다. 경찰에게 남편과 분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현장에 출동해 남편과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경찰은 “아저씨 불쌍하고 착한 분이더라. 무슨 이런 일로 경찰까지 부르느냐”고 훈계했다. 또 “아줌마가 좀 (참고) 잘 사시면 되겠구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B씨는 경찰에게 남편에게 당한 폭행 자국을 보여줬다. 경찰은 “아내가 자해한 자국”이라는 남편의 거짓말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돌아갔다.

가해자에게 감정 이입하는 경찰관, 피해자 보호는 어디에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찰의 가정폭력 재범 위험성 조사표’ 토론회가 진행됐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재범 위험성 연구팀’을 꾸려 10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A씨와 B씨를 포함한 가정폭력 피해자들과 경찰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손문숙 한국여성의전화 쉼터 활동가는 “경찰들은 여전히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두둔하고 사건 해결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경찰 신고는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경찰 초동 조치가 미흡해 피해를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피해자들은 ‘경찰이 가해자에게 공감하고 있었다’고 일관되게 이야기했다”며 “폭력 관계를 끝내고자 하는 피해자의 노력은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다”고 말했다. 경찰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공권력을 개입해 사건을 키워 가정을 해체하려 한다’고 질타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아울러 토론자로 참석한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경찰이 가정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위험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여성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아이를 데리고 보호시설로 도피했던 사례를 예로 들었다. 도피가 무색하게도 피해자의 위치가 노출돼 남편이 들이닥쳤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남편이 위해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리 조치하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가해자인 아이 아빠가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직접 나서서 가해자 요구를 수용해주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공포심이 완전히 배제된 조처였다.

허 조사관은 “폭력은 폭력 자체가 목적이 아닌 피해자로부터 공포와 두려움을 유발하려는 기제이기 때문에 폭력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며 “국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말 근절시키고자 한다면 남성들이 여성에게 가하는 통제·강압·위협에 대해 더 잘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범 위험성 조사표’ 제도 개선돼야…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가정폭력 발생 시 작성하는 ‘재범 위험성 조사표’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2011년부터 경찰은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해 직접 긴급임시조치를 내릴 수 있게 됐다. 이때 ‘재범 위험성 조사표’를 활용하는데, 전문가들은 이 조사표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홍 활동가는 “현행 조사표는 물리적 폭력 심각성만을 기준으로 위험도를 측정하려 한다”며 “‘우리(경찰)가 돌아갔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를)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등 피해자 입장에서 행해지는 질문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위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충분한 조치를 위한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신체적 폭력에 집중하는 탓에 가정폭력의 대표적인 특징인 통제나 협박 등을 간과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개선할 지점이 많은 조사표조차 현장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조사표 현장 활용도가 매우 낮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8월 열흘 동안 출동한 가정폭력 현장에서 조사표를 작성조차 하지 않은 경우가 30~40%에 달했다. 올 7월부터 경찰이 가정폭력으로 신고된 모든 사건에 대해 조사표 작성을 의무화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아도 처벌되지 않는다. 손문숙 활동가는 “조사표를 작성하지 않으면 벌칙을 받게 하는 등 의무 사항으로 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사표 작성을 했다면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표가 제 기능을 했으나 미흡한 사후관리 탓에 잔혹한 범죄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얼마 전 발생한 강서구 아파트 주차장 전처 살인사건을 꼽을 수 있다. 경찰은 아내를 주차장에서 기다렸다가 흉기로 찔러 계획적으로 살해한 김모(49)씨에 대한 조사표를 3년 전에 이미 작성했다. 2015년 막내딸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김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조사표를 작성했다. 이때 김씨는 ‘고위험 가해자’로 분류됐다. 재범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다. 하지만 경찰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았고 끝내 올해 10월 살해됐다.

왜 자꾸 평화로운 ‘가정 유지’를 고집하나

가정폭력처벌법의 최종 목표는 ‘가정 유지’다. 현행 가정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 1조에는 “가정폭력 범죄를 범한 사람에 대하여 환경의 조성과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을 함으로써 가정폭력 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 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있다.

현행법은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보다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에 집중하고 있다. 손문숙 활동가는 “가정폭력을 사적이고 경미한 문제로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 그리고 가정 유지에 대한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홍 활동가는 “폭력가정이라 하더라도 지켜야만 하는 가정이라는 인식을 가해자, 경찰, 국가가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항곤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과장은 “의견을 적극 반영해 앞으로 가정폭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응하겠다”며 “12월 한 달간 개선된 조사표를 임시 적용하고, 내년 1월 전문연구 용역을 추진해 개선하겠다”고 다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