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 1, 2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문학동네·1권 1만5800원, 2권 1만3800원데지마(出島)는 일본 나가사키 앞의 인공섬이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주재하며 쇄국 일본의 대외 창구 구실을 했다. 영국 작가 데이비드 미첼(49)의 소설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은 바로 이곳 데지마를 무대로 삼았다.
“해안선을 따라 자리한 땅이 앞으로 일 년간 그가 살 곳이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부채 모양의 인공섬 데지마는 바깥쪽 외곽 길이가 이백 걸음, 폭은 팔십 걸음 정도 되고, 암스테르담처럼 물속에 잠긴 토대 위에 세워졌으리라고 야코프는 추정한다.”

소설 주인공 야코프 더주트는 동인도회사 사무원으로 1799년부터 데지마에서 일하게 된다. 함께 부임한 상관장 포르스텐보스는 전임자의 비리를 들춰내고 조직 기강을 세우고자 야코프로 하여금 지난 시절 서류 조작을 확인하는 일을 시킨다. 그 결과 전 상관장 대리를 범죄 혐의로 체포했지만, 기존 구성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데지마는 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거든. 이런 소소한 부수입이 나올 구멍을 다 막아버린다면 데지마 자체가 멈춰버릴 거요”라 경고하는 기존 직원 흐로터의 말이 그런 기류를 대변한다.

소설은 젊은 여성 산파인 아이바가와 오리토가 나가사키 부교인 시로야마의 첩실의 위험한 출산을 돕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는 아이바가와는 단순한 산파가 아니라 네덜란드 의사 마리뉘스한테서 의학과 과학기술을 배우는 학생이기도 하다. “전 무지로부터 다리를 놓고 싶어요. (…) 지식으로요”라 말하는 이 영리하고 사명감 넘치는 여성에게 야코프는 매료된다. 야코프는 고국에 두고 온 약혼녀가 있지만, 아이바가와를 향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아이, 입이 열린다. 바, 입술이 만난다. 가, 혀뿌리가 올라간다. 와,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롤리타>의 도입부를 떠오르게 하는 야코프의 순정은 크고 작은 장애 앞에 무력할 뿐이고, 아이바가와를 납치해 간 사교 집단의 비밀을 파헤치는 후반부의 모험과 위험은 이 소설에 또 다른 색깔을 입힌다.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를 즐기고 특히 몰래 간직하고 있는 성경 시편을 삶의 지침이자 위안으로 삼는 야코프는 비교적 바람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통역관 오가와 우에자몬이 소개하는 일본 전통 신앙 얘기를 들으며 “하지만 내 것은 진실한 믿음이야. (…) 당신 것은 우상숭배고”라 생각할 정도로 편견을 지니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근본적 선량함과 정의감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처음에 신임 상관장의 신뢰와 지원을 등에 업고 순조롭게 진행되던 야코프의 업무는 머지않아 커다란 벽에 부닥친다. 다름 아니라, ‘개혁가’를 자처하던 상관장 포르스텐보스 자신이 사익을 위해 서류를 조작하고 승진을 미끼로 야코프를 회유하고자 한 것. 야코프는 “회사에서는 제가 모든 일을 철저히 하기를 바랍니다”라는 원칙론으로 그에 맞서지만, 거대한 구조악을 혼자 힘으로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다.

일과 사랑에서 모두 쓰라린 실패를 맛본 야코프가 20년 가까이 데지마에 머무르며 결국 상관장 자리에까지 오르고 일본 여성과 사이에서 아이까지 두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일본어를 공부한 그는 네덜란드어-일본어 사전을 집필해 난학(蘭學)에도 일조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야코프를 비롯한 주요 인물은 물론 허구의 존재들이지만, 소설에는 일본 난학의 선구자인 스키파 겐파쿠 같은 실존인물도 등장해 흥미를 돋운다.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차례 이루어지는 데지마 안의 점호, 공개 참수형 현장에 자신의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대동맥과 경정맥, 척수와 각 혈관의 피를 확인하도록 하는 의사 마리뉘스의 열정, 상관 직원들과 노예들, 일본인 통역관 등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다문화 충돌 및 교류의 현장 묘사가 생생하다. 데이비드 미첼은 <유령이 쓴 책> <블랙스완그린> <클라우드 아틀라스> 같은 소설이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작가. 이 소설은 2010년 <타임>과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에 뽑혔고, 2011년 커먼웰스상을 받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