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만주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日 정규군에 첫 승리'봉오동 전적지 水沒..기념비만 남아

엄주엽 기자 입력 2018. 11. 15. 10:50 수정 2018. 11. 1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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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옌지의 룽징에 있는 명동학교기념관과 김약연의 동상.
투먼의 봉오저수지 입구 부근에 방치된 옛 봉오동 전적비 뒤로 중국 당국이 새로 세운 전적비가 보인다.

③ 항일투사 길러냈던 간도

한학자 김약연 세운 명동학교

윤동주·송몽규·나운규 다녀

졸업생 99% 독립운동에 투신

지금은 옛터에 기념관 들어서

복원된 윤동주생가 앞 안내석

‘조선족’ 명기…中시인 오해케

지난달 24일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간도로 건너가는 국경도시 훈춘(琿春)을 통과하는데 제법 입국절차가 까다롭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선혈들은 국경의 구분 없이 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훈춘 역시 우리 민족의 피맺힌 슬픔이 서린 곳이다.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에 일격을 당한 일본군은 그 분풀이로 이 지역 조선인 1만여 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저질렀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견줘지는 대참사였지만, 훈춘에 그 혼백을 달랠 추모비조차 없다.

◇‘간도 대통령’ 김약연과 명동학교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에서 약 30분 거리인 룽징(龍井)시에는 ‘동쪽(조선)을 밝힌다’는 뜻의 명동촌(明東村)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여전히 낯선 독립운동가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1868∼1942)이 세운 명동학교가 있던 곳이다.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난 규암은 1899년 뜻을 같이하는 김하규, 문병규, 남종구, 윤하현 등의 가족과 함께 이곳에 토지를 사들여 집단 이주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조부, 윤하현은 윤동주의 조부로, 대개 한학자였다.

규암은 1908년 명동서숙을,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해 명동교회를 세웠다. 1909년 서숙을 학교로 바꾸고 교장에 취임했는데, 이 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 나운규가 공부했다.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명동촌에서 서기를 지낸 송길연(63) 씨는 “1929년까지 명동학교 졸업생 1200명 중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3·13운동에 앞장선 것도 명동학교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고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옌볜(延邊) 룽징의 한인들이 3월 13일 벌인 대규모 반일시위가 3·13운동이다. 이 만세운동은 만주 전역으로 번졌고, 1920년 15만 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명동촌에는 ‘3·13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규암은 교육운동뿐 아니라 무기를 사들여 홍범도(洪範圖·1868∼1943)의 독립군을 지원하는 등 북간도 한인 사회의 지도자였다. 명동촌 입구의 선바위는 안중근이 사격 연습을 했던 장소로, 그 또한 규암의 지원을 받았다. 규암은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명동학교가 일제에 의해 불태워지는 만행도 경험했다. 문익환 목사의 부모인 문재린·김신묵 선생의 회고록에는 “언제나 머리가 숙어지고 마음으로 흠모하는 분 가운데 첫째는 김약연”이라는 대목이 있다.

명동학교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명동촌 초입에 윤동주 생가가 있다. 중국은 지난 2012년 8월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며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힌 초대형 안내석을 세워놓았다. 중국 당국은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규정해 마치 중국의 ‘애국시인’처럼 바꿔놓은 것이다.

◇물에 잠긴 봉오동 전적지

한국 독립운동 사상 일본 정규군과 맞서 처음 승리한 봉오동(鳳梧洞)전투 전적지는 두만강변 투먼(圖門)에서 왕칭(汪淸)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대대를 홍범도 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박살 낸다. 독립군의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을 봉오골은 봉오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됐다.

봉오저수지 관리소 정문을 통과해야 전적지에 갈 수 있는데, 그 초입에 두 개의 전적기념비가 있다. 1993년 투먼시가 세운 작은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는 거의 방치돼 있고, 2013년 세운 더 큰 ‘봉오골(동)전투기념비’가 사람들을 맞는다. 문구도 다르고 추가된 부분 등을 보면 한민족의 만주 항일투쟁사를 중국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범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묻혀 있었다. 그가 독립군의 좌우익 충돌이었던 ‘자유시 참변’(1921) 이후 소비에트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또 봉오동전투는 학계에서도 그 규모에 대해 논란이 적지 않다.

현지에서 만난 역사학자 김성호 옌볜대 명예교수는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고 말한다.

룽징시엔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비암산 일송정이 있다. 원래 있던 소나무는 일제에 의해 1938년 말라 죽었고, 2003년 심은 소나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옛 선구자들의 숨결을 전하고 있다.

옌볜 = 글·사진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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