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여행기 ④] 아일랜드 민요 '오 데니 보이'의 땅 런던데리와 그 슬픈 역사

임호준 헬스조선 대표 입력 2018. 11. 15. 10:12 수정 2018. 11. 1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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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조선 비타투어의 아일랜드-스코틀랜드 트레킹 답사 여행기 ④​

예이츠가 노래한 이니스프리 섬과 ‘열정에 찬 가슴의 땅’ 벤벌빈 산을 만나고, 아일랜드 민요 ‘오 데니보이’의 도시 런던데리로 향했다. 17세기 쌓여진 성곽으로 둘러싸인 런던데리에서 복잡한 역사는 잠시 잊어도 좋다. 견고한 성곽은 멋진 관광 포인트였고, 구시가지는 엄마 품 속 잠든 아이마냥 편안했다. 오직 프리데리 구역의 아일랜드 깃발만이 가슴 아픈 독립의 역사를 기억하는 듯 바람에 휘날렸다.

예이츠의 시에 등장하는 섬, 이니스프리. /셔터스톡

나는 일어나 갈 거야, 이니스프리로 갈 거야

전날까지 답사여행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애초에 세운 일정은 완벽 그 자체였다. 초반부터 100% 감격과 감동으로 여행이 채워지는 것이 비타투어 ‘최고의 상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넷째 날 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검색을 통해 마련한 일정이 실제로 진행하기가 쉽지 않거나 조금씩 함량 미달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다면 답사할 필요도 없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답사여행의 묘미다.

초록 제주를 콘셉트로 탄생한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에 등장하는 섬이다. 예이츠는 사춘기에 슬라이고에 있는 외가댁을 방문했으며, 슬라이고의 자연에 깊은 위로와 안식을 받게 되었다. 이후 성인이 되어 바쁜 도시인으로 지내다 어느 순간 어린 시절, 마음에 있는 작은 섬을 떠올려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나는 일어나 지금 갈 거야, 이니스프리로 갈 거야’ 라고 노래했다. 그것이 우리에겐 화장품 브랜드가 되었다.

현실의 이니스프리는 손바닥만한 작은 섬이었다. /헬스조선 DB

애초의 일정은 예이츠 시의 영감을 따라 이니스프리를 찾고, 그가 ‘열정에 찬 가슴의 땅’으로 묘사한 벤벌빈 산 주변을 트레킹 한 뒤, 대학의 도시 슬라이고에서 숙박을 하는 것이었다. 슬라이고에 도착해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한 좁은 시골길로 30~40분 들어가니 넓은 호수가 나타나고, 20~30미터 앞에 손바닥만한 작은 섬 하나가 보였다.

한 100평이나 될까? 그것이 그 유명한 이니스프리다. 평론가들이 “이니스프리가 상상의 섬인가?”라고 묻자 예이츠는 “실재하는 섬”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저 작은 섬에 원래부터 ‘이니스프리’란 이름이 붙어 있었을까? 혹시 그의 영적 위로와 안식이 된 이름 없는 섬에 예이츠가 예쁜 이름을 헌사한 것은 아닐까? 어찌됐든 관광버스로는 이곳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설사 가능하더라도 예이츠에 대한 박사논문을 쓸 요량이 아니면 굳이 이곳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니스프리 섬을 본, 몇 안 되는 한국인으로 남기로 했다.

예이츠가 ‘열정에 찬 가슴의 땅’이라 부른 벤벌빈 산. 그의 표현대로 벤벌빈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벌떡 서있었다. /셔터스톡

비현실의 암봉, 벤벌빈 산

슬라이고 시 외곽에는 거대한 석회암 암봉이 거의 수직에 가깝게 벌떡 일어서 있는데 바로 벤벌빈 산(562m)이다. 평탄한 대지에 거대한 성벽처럼 자리 잡은 산의 정상은 짙은 구름에 쌓여있고, 부슬부슬 비까지 내려 마치 신선계와 같은 비현실감을 자아낸다. 예이츠도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그는 사후 벤벌빈이 보이는 드럼클리프 성당 묘지에 잠들어 있다. 벤벌빈 주변으로 예이츠가 걸었을지도 모르는 6km의 트레일이 조성돼 있다. 시작은 벤벌빈의 거대한 암봉을 조망하며 걷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암릉 자락이 끝날 즈음 호젓한 숲길이 이어지고, 조금 더 가면 오른쪽에 광활한 토탄의 대지가 펼쳐진다. 트레일은 높낮이 없이 평탄해서 천천히 걸어도 1시간30분이면 끝난다. 1시간만 더 걸을 수 있게 이 길이 이어져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슬라이고에서 차로 2시간 거리 북쪽에 있는 런던데리로 숙소를 변경했다. 트레킹 시간이 짧아 굳이 슬라이고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는데다, 런던데리에 숙박하면 다음 날 거인의 뚝길(자이언트 코즈웨이) 가기가 편하고, 런던데리 관광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런던데리는 아일랜드가 아닌 영국 땅이다. 1169년 잉글랜드에 점령된 아일랜드는 1919~1921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치른 뒤 1921년 12월, 아일랜드자유국으로 독립했다. 이때 얼스터주 등 북부 6개주는 영국에 잔류하기를 희망해 지금의 북아일랜드가 됐다. 차를 타고 가다보니 갑자기 주유소 기름값이 파운드로 표시돼 있으며, 길가에 유니언잭도 심심치 않게 보여 물어보니 어느새 국경을 통과해 영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검문소도 없이 국경을 통과해 버린 것이다.

런던데리는 아일랜드가 아닌 영국 땅이다. 성곽에 둘러싸인 구시가지에 이 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헬스조선 DB

아일랜드 독립을 꿈꾼 영국 땅, 런던데리

성곽도시 런던데리는 ‘오 데니보이’란 노래로 유명하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에 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심정을 노래한 ‘오 데니보이’는 원래 아일랜드 민요다. 1851년 독신의 제인 로스란 여성이 자기 집 앞에서 연주하는 집시의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을 채보한 뒤 이를 친분이 있는 조지 페트리 박사에게 보냈고, 페트리 박사는 이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해 ‘런던데리 에어’란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한편 아일랜드 시인이자 작곡가이자 라디오 진행자인 F.E. 웨덜리는 ‘오 데니보이’ 가사만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런던데리 에어’를 듣고 감동을 받아 이 곡에 자신의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여지껏 감미롭고 서정적인 곡으로만 생각했는데 가사가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대니야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골짜기마다에서 저 산 언저리까지

여름도 가고 모든 꽃들도 시들어 죽고

넌 떠나야 하고 난 기다려야만 하네.

저 초원에 여름이 올 때면 네가 돌아와 줄까

계곡이 숨을 죽이고 눈으로 뒤덮일 때면 네가 돌아와 줄까

햇빛이 비추어도, 그늘이 드리워도 난 여기서 기다리네.

오 대니 보이, 오 대니 보이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돌아 올 때 모든 꽃들도 시들어 죽고

그리고 나 또한 죽어 아마도 이 세상에 없겠지

네가 돌아와 내가 누워 있는 그곳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아베 마리아를 부르면

나 또한 무덤 위로 부드럽게 떠도는 그 소리 들으리라

그러면 나의 모든 꿈들이 더욱 밝고 따스해 질 것이며,

내가 묻힌 그곳은 더욱 밝고 따스해 질 것이며,

네가 올 때까지 나 편안하게 잠들어 있으리라.

저 초원에 여름이 올 때면 네가 돌아와 줄까

계곡이 숨을 죽이고 눈으로 뒤덮일 때면 네가 돌아와 줄까

햇빛이 비추어도, 그늘이 드리워도 난 여기서 기다리네.

런던데리에서는 영국 국기와 아일랜드 국기가 함께 나부끼고 있다(좌). 성벽 위에서 바라본 런던데리의 랜드마크인 ‘길드홀’과 성벽 축조시 사용됐던 대포(우). /셔터스톡

런던데리의 관광 포인트는 구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데리성벽’과 ‘프리데리’ 구역이다. 데리 성벽은 17세기 영국 제임스 1세 통치 시절에 쌓았다. 아일랜드를 점령한 영국은 데리에 런던 시민들을 이주시킨 뒤, 토착 아일랜드인으로부터 이주한 런던시민들을 보호하기위해 높이 3.7~10.7m, 길이 1.6km의 성곽을 쌓았다고 한다. 현재는 성 안과 밖을 자유롭게 왕래하지만 과거엔 그것이 넘을 수 없는 벽이었을 것이다. 복잡한 역사는 그들의 것이고, 여행자에게는 훌륭한 관광 포인트가 된다. 성벽의 폭은 4~5m는 족히 되는데, 성벽 위로 마차가 교행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길이 닦여 있다. 성벽 주변으로 교회, 학교, 콘서트홀, 레스토랑 등 구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어 도시를 한 번에 둘러보기 적당하다. 성곽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지만, 엄마 품속에 잠든 아이처럼 성곽 안에 반짝이는 불빛이 편안하고 따뜻해 보인다. 노란 불빛의 펍에 들어가 맥주 한잔 하며 마음을 풀어놓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성벽 위를 걷다 ‘프리데리’ 표시를 따라 내려오면 두 명의 남자가 팔을 벌려 손가락 끝을 마주대고 있는 ‘hand Across the Divide Statue’ 조형물이 보인다.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일어난 지 20주년인 1992년 화합의 의미로 세워졌다고 한다. 1960년 즈음부터 북아일랜드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시위가 잦았는데 프리데리 구역도 이 무렵 생겨났다. 운명의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천주교 신도 차별을 반대하는 평화시위단에게 영국군이 총을 쏘아 주로 10대와 20대 14명이 숨지고,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것이 ‘피의 일요일’ 사건. 화합의 조형물까지 세웠지만 아직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프리데리 구역 안에는 영국 국기가 아닌 아일랜드 국기가 지금도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피의 일요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hand Across the Divide Statue'./셔터스톡

※ 헬스조선 비타투어의 아일랜드-스코틀랜드 트레킹 답사기는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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