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살 아기는 총탄 세 발을 맞고도 꼼지락거리며 살아났다

2018. 11. 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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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2부 ⑤
성산포 터진목 학살 생존자 오인권씨 생애사
어머니 품에 안긴 3살 아기 세 발의 총탄에도 생존
젊은날 방황하며 자살 기도, 그 뒤 "삶은 내 운명"
행방불명 아버지 유해 2014년 제주공항에서 발굴

[한겨레]

제주4·3 당시 성산포 터진목 학살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 오인권(72)씨가 지난 5일 터진목을 찾아 상념에 잡혔다.

‘타타타탕.’ 성산 일출봉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제주 성산포 터진목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외마디 비명들은 파도 소리에 묻혔다. 아기를 안고 있던 엄마가 모래밭에 쓰러졌다. 25살 엄마(현정생) 품을 빠져나온 아기는 피범벅이 된 채 시신들 사이를 울며 기었다. 경찰이 ‘빨갱이 새끼를 살려둘 수 없다’며 방아쇠를 당겼으나, 아기는 세 발의 총탄을 맞고도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기적이었다.

오인권(72·제주시 화북)씨는 당시 생후 17개월이었다. 1949년 2월1일, 그는 터진목 학살 현장의 하나뿐인 생존자가 됐다. 지난 5일 터진목 ‘제주4·3 양민 집단학살터 표지석’을 오씨와 함께 찾았다. 터진목은 4·3 당시 수많은 민간인이 군인과 경찰에게 희생된 곳이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터진목은 제주올레 1코스 광치기해안에 있어 도보여행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표지석에 손을 얹은 오씨가 말없이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았다.

세 차례의 총탄을 맞고도 기적처럼 살아나

오씨는 성산포에서 멀지 않은 난산리 출신이다. “성산포에서는 학살 현장에서 살아난 아이라며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키워준 보모와 할머니, 그리고 주변 어르신들한테 터진목에서 기적처럼 살아나게 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었다”고 했다. 보모는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오인권씨의 어머니 고 현정생

같은 마을에 살던 외할아버지는 학살 다음 날 딸의 시신을 찾으러 터진목에 갔다. 그는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시신을 찾아 밭에 묻고 비석도 세웠다. 딸을 자기 손으로 묻어야 했던 외할아버지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오씨는 왼쪽 팔과 오른쪽 팔, 가슴 세 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총상이 심했던 왼쪽 팔에는 지금도 깊은 흉터가 남았고, 손등은 제대로 펴지 못한다. 겨울철에는 증세가 악화해 관절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죽지 않을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사격 실력이 나빠 총알이 스쳐 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몇 번 총을 쏴도 죽지 않으니 ‘이놈은 죽여서 안 되겠다’며 경찰관이 성산포경찰서 앞에 사는 아주머니(보모)한테 ‘이놈 맡아서 키우다 나중에 임자 나타나면 돌려주라”며 맡겼다고 하더군요.” 경찰은 약품과 먹을 것을 갖다줬다고 한다. 보모는 오씨를 치료하고 키워준 생명의 은인이다. 오씨는 중학교 졸업 때까지도 보모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드나들었다. 오씨를 친자식처럼 아꼈던 보모는 20여년 전 세상을 떴다.

생후 17개월 때 총탄에 맞은 오인권씨의 왼쪽 팔에는 지금도 깊은 흉터가 남아 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오명언)는 18살 때인 1941년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가 음식점을 운영하는 숙부 집에서 일하다 해방 무렵 고향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로부터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다는 말을 들은 오씨는 경찰에 아버지의 재직 여부를 문의했다. 오씨가 받은 경력증명서에는 아버지가 1946년 11월20일 제주감찰청(제주경찰청의 전신) 제1구경찰서(제주경찰서의 전신)에 순경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12일까지 100일 남짓 근무한 것으로 돼 있고, 3월13일 이후는 ‘미상’으로 나와 있다. 오씨는 “할머니한테서 아버지가 당시 성산포지서에서 근무했다는 말을 들었다. 기록상으로는 근무지가 1구경찰서로 돼 있지만 성산포지서에서 근무한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이후 행방은 알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시신이 없는 아들의 ‘헛묘(가묘)’를 만들어 비석을 세우고, 생일에 제사를 지냈다.

제주공항 유해발굴 때 행방불명됐던 아버지 유해 확인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아버지를 기적처럼 만난 것은 2014년 여름이 막 지날 무렵이었다. 오씨는 4·3 당시 집단학살 매장지였던 제주공항에서 유해발굴이 이뤄지던 2009년 행방불명자 유족들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검사에 참여했다. 2014년 어느 날 제주4·3평화재단으로부터 발굴된 유해 가운데 아버지 유해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는데, 전문가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이해하게 됐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찾았지만, 마음은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달 할까…”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인권씨가 터진목 집단학살터 표지석 앞에서 총탄이 스친 흔적이 남아 있는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처음에는 제주4·3평화공원 유해 봉안관에 안치하면 재단 쪽에서 관리를 잘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자손들도 할아버지를 알아야 할 것 같아 가족묘지에 모셨죠. 유해가 발굴된 뒤 헛묘는 없애고, 비석은 묻었습니다.”

오씨의 할머니는 오씨가 다섯 살 때인 1951년 12월 수소문 끝에 손자를 찾아 데려갔다. 조부모 아래서 농사를 지으며 자란 오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마친 뒤 배움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방황했다.

“사춘기 때 학교는 가고 싶은데 갈 형편은 안 돼 많이 헤맸어요. 18살 때는 더 살고 싶은 의욕도 없고, 세상을 탈출하고 싶어 죽을 작정을 하고 부산으로 갔어요. 세상에 대한 원망도 많았을 때였어요.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 18알을 모아 용두산공원에서 먹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부산시립병원 수용소더군요.”

사춘기 때의 자살시도, 폐결핵 넘기고 ‘용감하게’ 살아”

오씨는 신발도 없이 맨발로 배에 몰래 타 제주항까지 온 뒤 집으로 연락했다. 오씨는 “부모님 계신 아이들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 그런 아픔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시도까지 했던 오씨는 “운명이란 것이 질긴 것이라고 느꼈고, 그 이후부터는 아주 용감하게 살았다”고 회고했다.

30살 때 지금의 아내 김영숙(65)씨를 만나 제주시로 삶터를 옮겼다.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오씨는 옆에 앉은 아내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모처럼 웃어 보였다. 간호사였던 김씨는 “남편이 폐결핵에 걸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겼다. 큰아들을 낳았을 때는 중매한 사람이 찾아와 더 늦기 전에 이혼하라고 했지만, 친정어머니가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한다고 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주사를 놓으며 치료했다”고 돌이켰다.

오씨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다. 주변에서는 “어릴 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오씨는 “성장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잘 먹지도 못해 큰 병에 걸린 것 같은데 집사람이 나를 살렸다”고 말했다.

오인권씨가 제주4·3 때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터진목에서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던 오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기만 오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안 그런데 지금도 혼자서 소주 한 잔 마시고 하면 실컷 웁니다.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야지’ 하지만, 그때 일이 생각나면 눈물이 터져버립니다.”

터진목 길가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동백꽃잎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그 옆에 성산읍 유족회가 2012년 세운 안내판이 있다. “이곳 성산포 터진목 해안가 모래밭 일대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이 지역 무고한 양민들이 군인과 경찰에 끌려와 무참히 학살된 곳입니다. 어미의 등에 업힌 젖먹이에서부터 80 넘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총과 칼과 죽창에 찔려 비명에 가신 곳입니다. 아비가 아들을, 아들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젖먹이가 엄마를 찾던 울부짖음이 아직도 귓전을 때립니다. 이제 이곳을 지나가시는 모든 이들께서 추모의 뜻으로 바치는 꽃잎을 이 돌에 새겨서 400여 영령들이 영면하심을 빕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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