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구체제'·최규하 '유약'·김대중 '용공분자'..입맛대로 평가한 신군부, 자기모순 함정에 빠지다 [5공 전사-9화]

유정인·조형국 기자 2018. 11. 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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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승만

■ 이승만 전 대통령(재임 1948·7~1960·4)

사사오입 개헌, 종신제 시도 사건 경향신문 필화도 권력확장 의도로 “독재에만 신경 쓴 대통령” 비난

“반공과 반일을 앞세워 정적을 타도하고 권력기반을 확장하는 일에 더 신경을 쓴 반면, 진정한 의미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작업에는 소홀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제5공화국 전사>에 적힌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신군부는 12년간 이어진 이승만 체제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1인 독재를 ‘구체제’로 비판하면서 신군부의 5공화국을 ‘새 정치 질서’로 차별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쿠데타로 집권해 군부독재를 이어간 5공화국을 돌아보면 ‘자기모순’이다.

<5공 전사>는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1945년 8월15일부터 한국 현대사를 기록하고 있다. 본문 1편 첫 부분에 이 전 대통령의 자유당 시대를 평가했다.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 전 대통령의 ‘지도이념’은 ‘반공과 반일’, 국정지표는 ‘건설’이었다고 적었다. 1954년의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선 “종신제를 시도”한 것으로 비판했다. 1959년 경향신문 ‘여적 필화사건’을 두고는 “야당과 언론의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야당성이 짙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고 장기 1인 독재체제로의 기반을 닦아갔다”고 했다.

<5공 전사>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터져나온 4·19 혁명을 ‘4·19 학생의거’라고 기술한다. 특히 주목한 것은 당시 군부의 역할이었다. 계엄군이 시민을 공격하지 않았던 것을 ‘주목할 사항’으로 적으면서 군부의 “빛나는 기록”이라고 썼다. 이 전 대통령은 결국 4·19 혁명 8일째인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며 하야했다. 신군부는 “이승만은 북한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 아래서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 땅에 도입한 공이 있었으나, 자신의 권력 강화 즉 1인체제를 구축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침해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 박정희 전 대통령 (1962·3~1979·10, 권한대행 기간 포함)

인간 박정희 리더십 ‘영웅적’ 묘사 죽음 놓고도 “거목 잃었다” 표현 유신체제만큼은 ‘독재’로 선 긋기

박정희 전 대통령은 <5공 전사>에서 가장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된 인물이다. 신군부는 5·16 쿠데타는 정당화했지만, 유신체제는 ‘독재’라며 깨알같이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초인간적 의지와 근면성을 지닌 지도자”라며 영웅시했다. ‘군부 리더십’은 긍정해야 하고, ‘유신’과 선을 그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지연시키는 논리였던 ‘한국적 민주주의’는 차용해야 했던 신군부의 복잡한 셈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5공 전사>의 신군부 편찬자들은 5공화국 출범 전 ‘유신체제’를 집중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전 전 대통령이 처음 등장하는 10·26 수습 과정을 공들여 쓸 때도 박 전 대통령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5·16은 ‘군사혁명’으로 지칭하면서 “통치능력의 마비상태는 자연히 조직화된 세력으로서의 군에 의해 메워질 수밖에 없었(다)”라고 정당화했다. 반면 유신체제를 두고는 “결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수만은 없었다”고 비판했다. 박 전 대통령의 통치방식은 ‘지휘관식’으로 표현하면서 “그의 오랜 군생활을 통하여 상하위계질서와 조직의 일체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였으며, 이러한 개인 성품이 정치적 영도방식에 반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썼다.

전 전 대통령과 같은 군인 출신 권위주의 독재자였던 박 전 대통령 개인에 대한 평가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후했다. <5공 전사>는 10·26 이후 박 전 대통령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박 대통령은 소박하고 겸허한, 그러나 초인간적인 의지와 근면성을 지닌 지도자였다”며 ‘신념에 찬 행동인’으로 규정했다. 책은 “우리의 현대사에 또 하나의 거목을 잃은 기록을 더하게 되었다”고 적기도 했다.

최규하

■ 최규하 전 대통령 (1979·10~1980·8, 권한대행 기간 포함)

‘우유부단·결정장애’ 지도력 악평 5공화국 출범 정당화 수단 삼아 조기 하야에 대해서만 “용퇴” 칭찬

최규하 전 대통령은 <5공 전사>에서 시종일관 ‘유약한 과도정부 지도자’로 그려진다. 박 전 대통령 사망 뒤 권한대행을 거쳐 10대 대통령에 오르지만, 12·12 쿠데타 후 실권은 이미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넘어가 10개월간 정국을 주도하거나 신군부를 제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신군부는 최 전 대통령을 ‘우유부단’ ‘결정 장애’로 표현함으로써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 국민 여망에 따라 5공화국이 출범한 것처럼 그렸다. 신군부 스스로 최 전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든 뒤,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셈이다.

<5공 전사>는 1979년 10·26 수습, 12·12 쿠데타, 5·18 민주화운동 등 최 전 대통령 임기 내에 일어난 일들을 주요하게 다뤘다. 최 전 대통령은 이 국면마다 신군부의 5공 출범을 정당화시키는 ‘유약한 인물’로 기술됐다.

10·26 때는 국무총리로서 “극히 미온적” 조치를 했다고 비판한다. <5공 전사>는 “적극적 조치를 기피함으로써 맡은 바 직무를 유기한 셈”이라고 적었다. 최 전 대통령이 12·12 쿠데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수사를 10시간을 버티다 사후 승인한 것을 두고는 “경험부족으로 전의 관례를 이해치 못한 것”이라고 했다. 또 5·18 민주화운동 당시 최 전 대통령의 태도는 “광주시가 무장폭도들의 완전 장악 속에 들어간 지 4~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심이나 조치 지시를 내리지 못하고 고심만 했다”고 비판했다.

유일하게 추켜세운 것은 ‘조기하야’로 신군부에 권력을 이양한 때다. 신군부의 압박에 1980년 8월16일 하야한 것을 두고 “과도기 소임은 마무리지어졌다는 관점에서 최 대통령의 하야가 충분히 이해되며, 사심 없는 용퇴를 높이 평가”한다고 기록했다.

김영삼

■ 김영삼 전 대통령(1993·2~1998·2)

유신과 맞선 김영삼 “강성 지도자” 12·12 뒤엔 “구체제 인사”로 격하 정권 잡은 전후 기술 태도 바뀌어

“3김씨가 서로 경쟁적으로 국민의 환심을 사려 여러 방법으로 국민을 선동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한심스러운 정국.” 전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를 모의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등 ‘3김’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같은 반감에 비해 <5공 전사>의 김 전 대통령 서술은 비교적 건조한 편이다. 제1야당의 총재로 신군부와 반대파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 ‘악평’보다는 정치활동을 묘사한 부분이 많다. 신군부가 체제 정당성 확보를 위해 유신을 강하게 비판한 만큼 유신에 저항한 김 전 대통령의 활동을 상당 부분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5공 전사>는 10·26으로 인한 유신 붕괴를 서술하면서 야당의 ‘강성 정치지도자’로서 김 전 대통령의 면모를 여과 없이 실었다. 1979년 유신정권이 내리꽂은 국회의장을 야당인 신민당이 반대하며 벌어진 ‘백두진 파동’ 때의 일화도 그렇다. 당시 신민당이 굴복할 때도 끝까지 저항하던 김 전 대통령에 대해 “ ‘하룻밤 사이 당론을 바꾸는 건 자유의사로 볼 수 없다’며 단호한 태도였다”고 적었다. 김 전 대통령이 YH노조 사건에서 당사를 포위한 경찰의 따귀를 때린 일화, 국회의원 제명 후 “공화당 정권이 야당 총재를 의회에서 추방해 민주주의 자체를 추방시켰다”는 말을 남긴 것까지 기록하면서 유신의 반민주성을 강조했다.

신군부가 권력을 쥔 12·12 이후엔 기술 태도가 바뀐다. ‘유신 비판’에 활용한 뒤엔 5공 출범을 위해 청산해야 할 ‘구체제 인사’로 격하시킨다. <5공 전사>는 “(전두환 대통령은) 구시대 퇴폐 정치인에 대한 철퇴를 가했다”며 “이 과정에서 자택에 연금 중이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정계은퇴를 선언함으로써 5·16 군사혁명 이후 근 20년 동안 정계를 주도해온 정치인들은 모두 사라지게 됐다”고 적었다.

김대중

■ 김대중 전 대통령(1998·2~2003·2)

좌익·용공·북괴 동조 딱지 붙이고 “국민 대환심 유도 선동 정치가” 5공 전사 전반에 걸쳐 노골적 폄하

골칫거리, 눈엣가시, 미운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신군부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공분자, 선동정치인, 사회 혼란의 배후세력이자 안보의 적이었다. 내란음모를 뒤집어씌워 정권 차원의 ‘사법 살인’을 시도할 정도로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을 미워했다. <5공 전사>는 전반에 걸쳐 집요하게 김 전 대통령을 깎아내렸다. 아예 ‘선동정치가 김대중과 그 추종자들’이라는 제목의 절을 따로 마련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 전 대통령을 학생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한 뒤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로 몰고 그를 내란 혐의로 기소했다. 신군부가 조작한 재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김 전 대통령에게 좌익, 용공, 북괴 동조 딱지를 붙이는 데 공을 들였다. <5공 전사>는 김 전 대통령이 “공산주의 사상교도 및 조직 확장에 주력”했고 “북괴가 목포에 진입하자 목포 인민위원회 창설을 기도”했고 “간첩 정태목과 만나 선거전략 지령”을 받았다고 했다. 대선후보로 나온 김 전 대통령의 공약을 두고도 “북괴의 동조를 받았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의 달변은 ‘배후조종’ 도구와 ‘선동정치’로 폄하됐다. <5공 전사>는 김 전 대통령이 집권을 위해 “대국민 환심”을 유도하고 “학생들의 반정부적 분위기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정치연설을 감행한다고 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이 “학생소요를 배후조종했으며 민중궐기를 획책해 최규하 정부가 퇴진하면 집권하려는 의도하에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방법도 불사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데 참고한 자료는 ‘김대중 동향’ ‘중요정보보고’ 등 모두 보안사에서 작성된 자료였다.

■ 특별취재팀 (기자)

배명재·강현석·유정인·조형국

■ 자문위원단 (교수·가나다순)

강원택(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유정인·조형국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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