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독립운동가' 광주 어등산 의병대장 조경환 선생

김성진 2018. 10. 31. 09:4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경환(曺京煥)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선생은 1876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시대의 전환기에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선생은 김준 의진에서 좌익장을 맡아 함평읍,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월암산, 광주 어등산 등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의병장이 된 선생은 어등산에서 김준 의병장의 장례를 치르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뉴시스】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경환(曺京煥)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2018.10.31.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경환(曺京煥)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선생은 1876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시대의 전환기에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20세기 초반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며 조국의 현실을 목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차려 후학을 육성했다.

선생은 1906년 태인에서 을사늑약에 반발해 최익현과 임병찬 등 순창 12의사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서울로 압송되고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07년 후반 재차 호남지방에서 기삼연과 김준 등이 고창읍성을 점령하는 등 맹활약을 떨치자 선생은 그 해 12월 중순 김준 의진(義陣)에 합류해 좌익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김준 의진에서 좌익장을 맡아 함평읍,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월암산, 광주 어등산 등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8년 음력 3월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의병장 김준이 순국하고,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함평 당산촌 나평집으로 후퇴해 후일을 도모했다.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모아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이때 전북 이석용(李錫庸) 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과 연합해 용진산(聳珍山)에서 200여 명 규모로 의진을 재편하고 의병장이 됐다.

의병장이 된 선생은 어등산에서 김준 의병장의 장례를 치르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곧 용진산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광주 흑석에 있는 일본군 순사대를 공격하며 의병장으로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조경환 의진은 100~200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해 전남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의진은 일본제 30년식 보병총과 기병총 4정, 한병총 12정, 천보포(千步砲) 8문, 개조 화승총 약 60정 등의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경과 맞서 싸웠다.

1909년 1월 혹한기를 맞아 대부분의 부하를 일시 귀향시키고, 귀가하지 않은 50여 명과 함께 어등산에 주둔했다. 그러나 의진은 일본군 광주수비군에 의해 주둔 사실을 탐지 당했다.

1909년 1월 10일(음력 1908년 12월 19일) 조경환 의진은 야마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20명, 체포 10명의 피해를 입었다. 선생은 총탄을 맞고서도 부하들의 명단을 불사르고 어등산 전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3년 조경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ksj87@newsis.com

Copyright ©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