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세] 중국이 소고기 맛에 눈 뜨자 '와규 전쟁' 시작됐다

이영희 2018. 10. 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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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기 사진 몇 점 보고 가실까요. (배고픔 주의)
절묘한 마블링과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인 와규. [사진 야후 재팬 캡처]
와규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꼽히는 고베규. [사진 고베육유통추진협의회]
절묘한 마블링과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인 와규. [사진 고베육유통추진협의회]
‘와규(和牛)’ 좋아하시나요? 지방과 근육의 아름다운 조화 ‘마블링(marbling)’을 뽐내며 ‘입에 넣는 순간 녹아내리는’ 부드러움을 자랑하는(하지만 너무나 비싼) 소고기 말입니다. 와규는 한자어 뜻 그대로 ‘일본소’인데요. 와규의 맛이 일본 국경을 넘어 알려지면서 전세계 와규 소비량이 급증하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일본을 다시 찾는 관광객들도 생겨나고 있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와규는 일본산 ‘和牛’(와규)가 아니라 호주산 ‘WAGYU’(와규)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아시안리뷰’는 최근호 커버스토리로 ‘소고기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소고기계의 롤스로이스’로 불린다는 와규를 두고, 원조 생산국인 일본과 신흥 강자인 호주·미국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호주산 일본소’, ‘미국산 일본소’라니 뭔가 이상하죠. 이번 [알고 보면 쓸모 있는 신기한 세계뉴스-알쓸신세]에서는 세계 소고기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흥미로운 ‘왕좌의 게임’을 관전해 보겠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야 와규?

일본 정부가 정의하는 와규란, 재래종으로 인정된 흑모화우(黑毛和牛·검은소), 적모화우(赤毛和牛·누렁소), 무각화우(無角和牛·뿔 없는 소), 일본단각화우(日本短角和牛·뿔이 짧은 소) 네 가지 품종의 소와 이들끼리의 교배를 통해 태어난 소들을 말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사육된 소들이어야 하고요. 이 중 와규 전체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는 흑모화우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 외래종(제주 흑우가 건너갔다고 하죠)과 일본 재래종을 교배시켜 탄생한 소인데, 유전적으로 근육 내 지방의 비율이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좁은 공간에서 소의 움직임을 최소화해 최고의 육질을 얻어내는 것이 일본식 와규 사육법이다. [사진 고베육유통추진회]
섬나라에 사는 일본인들은 원래 생선을 즐겨 먹고, 소는 농사나 물건을 운반하는 데 사용했죠. 그러나 농업의 기계화에 따라 소의 쓸모가 적어지면서, 소의 용도가 ‘먹거리’로 바뀌게 됩니다. 일본은 1920년대부터 지자체별로 와규를 등록하고, 1948년에는 전국와규등록협회를 만들어 순수혈통 와규를 지정하기 시작합니다.

와규의 ‘고급화’가 시작된 건 1991년 소고기 수입 자유화 이후였습니다. 농민들은 미국과 호주의 값싼 고기와 경쟁하기 위해 특유의 장인 정신을 발휘, 재래종 소에 엄선된 사료를 먹여 남달리 부드러운 식감의 소고기를 만들어내죠. 와규는 마블링의 수준에 따라 1~5등급으로 엄격하게 분류되는데, 효고(兵庫)현의 고베규(神戶牛), 미에(三重)현의 마츠자카규(松坂牛), 시가(滋賀)현 동쪽에서 생산되는 오미규(近江牛)가 높은 등급을 자랑하는 ‘3대 와규’로 칭송 받습니다.


호주의 와규 수출량, 일본의 10배

이런 고급화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와규는 다른 품종 소고기의 2~3배 가격이지만, 특별한 맛에 반한 ‘열성팬’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갑니다. 2001년 광우병 발병으로 주춤했던 일본의 와규 수출액은 2009년 이후 증가세로 돌아서 지난 3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구요, 올해는 200억 엔(약 2000억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2020년까지 와규 수출 250억 엔(약 2500억 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발표했죠.
와규 경매 현장. [사진 일본 농림수산성 홈페이지]
하지만, 세계 시장 전체로 보면 그리 큰 수치가 아닙니다. 광우병 파동으로 일본 와규가 국내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호주와 미국에서 무럭무럭 자란 와규들이 세계 시장을 장악한 겁니다. 특히 호주의 성장세는 놀라운데요. 닛케이에 따르면 1990년대부터 꾸준히 와규 생산량을 늘려온 호주는 2016년 기준으로 연간 2만 4000t의 와규를 생산하는 ‘와규 대국’이 되었습니다(같은 해 일본 와규 생산량은 14만 2653t입니다). 일본 와규가 대부분 일본 내에서 소비되는 데 반해, 호주 와규는 85~90%가 해외로 수출됩니다. 그러다 보니 호주의 한 해 와규 수출량은 원조 일본의 10배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연구 목적으로 미국 간 와규의 유전자가 호주로

당연히 ‘和牛’와 ‘WAGYU’는 똑같지 않습니다. 일본에선 와규의 혈통을 엄격하게 규정하는 반면, 호주와 미국 등에서는 일본 와규와 다른 품종(앵거스 또는 홀스타인) 사이에 태어난 소도 와규로 폭넓게 인정합니다.
들판에서 풀을 먹으며 자라는 호주 와규. [사진 호주와규협의회]
그런데 일본소는 어쩌다 호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요. 일본 정부는 1940년대 와규 품종을 규정한 뒤, 정통성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와규는 물론 와규의 정자, 배아 수출도 엄격하게 금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1976년 미국 콜로라도대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와규 몇 마리를 데려 갔죠. 이 소들을 통해 90년대까지 상당량의 와규 정자와 배아가 다른 나라들로 유출된 겁니다.

호주에서 가장 큰 와규 농장인 ‘블랙모어’의 대표 데이비드 블랙모어는 1988년 텍사스의 한 농장에서 와규를 처음 접하고 그 맛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993년 와규 배아를 미국으로부터 들여와 다른 종과 교배시켜 사업을 시작했죠. 현재는 총 8000에이커(약 3200만 제곱미터) 규모의 5개 농장에서 3800마리의 와규를 키우고 있습니다.

일본농축산업진흥기구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호주에는 약 25만 마리의 와규가, 미국에는 약 5만 마리의 와규가 있다고 하죠. 물론 다른 종과의 ‘혼혈 와규’도 포함한 수치입니다. 일본의 와규 수출이 주로 홍콩이나 대만, 캄보디아 등 아시아에 집중돼 있는 것과 달리, 호주와 미국산 와규는 유럽과 남미까지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소고기의 맛’에 눈 뜬 중국인들

그런데 왜 지금 새삼 ‘와규 전쟁’이 주목 받는 걸까요.

중국 때문입니다.

소고기보다 돼지고기와 닭고기 요리를 즐기던 13억 중국인들이 소고기를 찾기 시작한 거죠. 중산층을 중심으로 소고기 스테이크와 갈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2006년 6000t에 불과했던 중국의 소고기 수입량은 지난해엔 13배가 넘는 80만t, 금액으로 26억 달러(약 2조 9600억 원)까지 치솟았습니다. 올해는 최초로 100만t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지난해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소고기 수입국이 됐지만, 아직 중국인들의 1인당 소고기 소비량은 4.1kg에 불과해 미국인 소비량의 6분의 1도 안됩니다. 중국 시장은 앞으로도 커질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각국이 중국을 겨냥한 와규 생산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죠.

중국은 소고기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광우병 파동 이후 내려졌던 미국산 소고기 수입 금지 조치를 지난 6월 해제했습니다. 현재 중국 수출길이 막힌 일본도 정부 차원에서 소고기 수입 금지 해제를 논의하고 있고요. 중국 수입 소고기 시장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호주는 이를 30% 이상으로 높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순혈주의 VS 실용주의, 승자는?

일본과 호주의 와규 경쟁은 장인 정신으로 무장한 소규모 공방들과 대형 프랜차이즈의 경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본 와규 농가들은 대부분 수십 마리의 작은 규모로, 와규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데 집중하죠. 한편 호주의 와규들은 수천 마리 단위로 사육되며, 너른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자랍니다.
들판에 방목해서 키우는 호주의 와규 사육방식. [사진 호주와규협의회]
사료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 와규는 감칠맛을 높이기 위해 옥수수를 기반으로 대두 등을 배합한 특수사료를 먹고 있습니다. 반면 호주 와규들은 보리를 기반으로 한 사료와 함께 풀을 먹으며 자라 일본산 보다 질긴 육질과 강한 풍미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장에서 꼭 ‘맛’이 승리할 거라 점치기는 어렵습니다. 호주산 와규는 맛과 혈통에서 밀리는 대신, 가격은 일본산 와규의 절반 정도로 저렴합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오가닉 푸드’ 열풍과 ‘윤리적 소비’ 경향도 일본에 불리합니다. 일본 와규들은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좁은 우리에서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 받으며 자랍니다. 농부들은 와규의 살을 찌우려 소의 비타민 섭취를 인위적으로 조정하죠. 세계 동물윤리단체들은 이런 와규 사육법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축산업자의 고령화’도 일본 와규 업계의 위험 요인입니다. 유명 와규 생산지 중 하나인 가고시마(鹿兒島)의 경우 축산 농가 절반 이상이 70대 이상의 고령자들이고, 이들의 80%가 후계자를 찾지 못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축산 농가 수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요.
일본 정부가 제작한 와규 마크.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네 개 품종의 소만을 와규로 인정한다. [사진 일본 농림수산성]
혈통과 마블링에 집착해 ‘소수가 즐기는 명품’을 만들려는 일본과,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낮춰 ‘대중적 고급 소고기’를 추구하는 호주의 방식, 어느 쪽이 세계 육식인들의 지지를 받게 될까요.

농축산컨설팅회사 ‘굿테이블’의 야마모토 겐지(山本謙治) 대표는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와규업계의 ‘마블링 제일주의’를 비판하며 일본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습니다. “호주와 미국의 생산자들은 와규에 관해 훨씬 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외국 농부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품질의 와규를 생산할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도래할 겁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 와규 먹는 법은 따로 있다!

스키야키를 먹고 있는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상. [사진 도라마코리아]
와규가 일본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서구인들은 와규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와규는 애초 서양인들이 즐겨 먹는 스테이크에 적합한 소고기가 아니기 때문이죠.

마블링은 와규의 품질과 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인데, 가장 높은 등급을 받은 와규의 일부 부위에서는 지방의 함량이 80%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지방 위에 붉은 살코기가 떠 있는 형상’이랄까요. 두꺼운 스테이크로 요리할 경우 지방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기 어렵고 느끼해지기 쉽습니다.

전문가들은 마블링을 최대한 즐기는 방법은 고기를 얇게 잘라 먹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에서 와규가 주로 일본식 불고기인 야키니쿠나 샤브샤브, 일식 냄비 요리인 스키야키의 재료로 쓰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와규 먹는 법’을 알리기 위해 세계 각국 셰프들을 초청해 와규를 컷팅하는 기술과 요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업을 최근 시작했습니다. 고기 수출에 그치지 않고 ‘와규 식문화’ 자체를 수출하겠다는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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