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자전적 고백, 그가 젊음을 위로하는 방식
[오마이뉴스 손화신 기자]
따끈따끈한 신곡을 알려드립니다. 바쁜 일상 속, 이어폰을 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백이 생깁니다. 이 글들이 당신에게 짧은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책꽂이에 잘 꽂아놓은, 버릴 생각 없는 책. 고 신해철의 곡들이 꼭 이런 책 같다. 못 버리는 건 1달 후, 1년 후, 그리고 10년 후에 다시 읽기 위해서다. 살아가며 경험치가 쌓이면 비로소 이해되는 그런 종류의 책들. 어린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어도 커서 사랑을 경험해보고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삶을 경험한 만큼 새롭고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민물장어의 꿈', '일상으로의 초대' 등 신해철의 많은 히트곡들이 모두 '버릴 수 없는 책'이지만, 오늘 리뷰로 덜 알려진 곡을 포함해 다른 두 곡을 꼽아봤다. '백수의 아침'과 '나에게 쓰는 편지'가 그것인데, 가사를 천천히 살펴보면 '인생의 그 단계를 살아내야지만 와 닿는 것들'이 개인적으로 이 두 곡에 있었다.
'백수의 아침'은 신해철이 2000년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의 새로운 밴드를 꾸리고 12월에 발표한 1집 <비트겐슈타인>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오버액션 맨' 등 다른 수록곡들에 비해 비교적 가사가 얌전(?)하다. 젊은 청년 백수들에게 영원히 공감될 이 노랫말은 백수 경험 없는 인생이라면 100%는 다 이해하지 못할 내용일 것이다.
"세상은 내가 없이도 잘만 돌아가고 있지만/ 난 한방 터뜨릴 거야 좀만 기다려봐/ 조만간 기대해봐 아하아아하"
"세상이 나를 몰라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영문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을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까"
눈치 보이고 힘들긴 해도 '한방 터뜨릴 것'이란 포부가 있던 그때. 당시엔 고통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백수였을 때만큼 꿈으로 마음 부풀었을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신해철의 이 곡은 그때의 내 마음을 스캔당한 것처럼 정확하다. 이런 허세가 내게도 있었다. 난 한방 터뜨릴 만한 잠재력이 충분한 사람인데 이런 원석을 세상은 왜 몰라볼까? 이거 대체 무슨 영문이지? 싶은 마음 말이다. 이렇게 어리둥절하다가도 그 다음날은 또 '아무래도 내가 문제인 것 같다'는 확신이 선명하게 올라오곤 하던, 매일 두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쨌든 뭐가 되든 언제 되든 되긴 될 테니까 보라니까/ 믿거나 말거나 나의 때는 곧 와/ 언제일지 모르지만 난 자신이 있어/ 내가 허풍 좀 쎈 건 나도 인정해/ 내게서 그걸 빼면 뭐가 남겠어/ 신날 때 재 뿌리지마/ 사실은 나도 좀 초조해"
신해철의 솔직함이 좋다. '나도 좀 초조해'라는 짧은 무너짐이 피식 웃게 한다. 실컷 허풍을 떨다가도 그걸 한 순간 주눅 들게 만드는 재가 뿌려질 때면 짜증이 난다. 백수는 신날 때 제대로 신나하지도 못하는 신세인 건가 싶어서 말이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언젠가는 나의 때가 와!' 하고 당당하게 말하다가 불안한 속내를 아주 살짝 내비치는 인간미란!
여기서 잠깐 딴 길로 새자면, 신해철은 왜 그때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의 밴드로 활동했을까? 비트겐슈타인이란 철학자는 신해철의 음악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신해철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실마리일까? 20세기의 니체에 비유될 정도로 천재적이고 강력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밴드명으로 내세운 건 그의 지적 허영이었을까? 하지만 그 앨범에는 예상과 달리 거칠고 야성적인 곡들이 채워져 있어, 지적 허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신해철이 그 철학자를 사랑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추측을 해본다. 왜냐하면 생전 신해철의 '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날카롭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뚫어보는 정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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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철 1991년 발매된 신해철 2집 < Myself > 자켓사진 |
ⓒ (주)다날엔터테인먼트 |
자, 샜던 길에서 다시 돌아와 인생의 단계마다 다시 들리는 곡 두 번째 순서로 '나에게 쓰는 편지'를 살펴보려 한다. 1991년 3월 발매된 신해철 2집 < Myself >의 수록곡인 이 곡은, 백수를 지나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내 고민들을 그대로 담아놓은 듯하다. 어릴 땐 안 보였던 것이고, 백수였을 때 들었다면 감흥이 없었을 가사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물론 누구나 다 고민하는 주제다. 진정한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진리다. 문제는 와 닿는 정도인 것 같다. 살면서 내가 느낀 아이러니 중 하나는 돈을 벌기 시작하면 더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백수를 벗어나 돈을 벌면 경제적 자유를 느껴야하는 게 맞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오히려 돈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이 돈으로 살기 힘드니 부동산을 좀 배워야 하나? 주식이라도 좀 해야 하나? 하고 말이다. 살다보니 돈과 행복이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 밀접한 관계가 돼 있다. 가사 속 '은행잔고, 돈, 큰 집, 빠른 차'란 단어들과 '행복'이란 단어 사이의 거리감이 한때는 안 보였지만 다시금 보인다.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신해철은 가사에서 이렇게 정답을 제시했다. 행복이 부와 명예, 안정 안에 있지 않다는 것 말이다. 소중한 것들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신해철의 노랫말에 진짜 행복의 정체를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된다.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 내 울고 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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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철 2018년 10월 27일은 고 신해철의 4주기다. |
ⓒ 신해철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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