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육군 역사상 첫 여성 포대장 이고은 1포병여단 대위

정희영 2018. 10. 2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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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무거워 안 될 거라 했지만
내게 무거운 건 오직 책임감뿐
육군 70년 '禁女의 문' 열었다
"내 뒤를 따르면 살 수 있다..믿음 주는 포대장이 목표"
여성에게 굳게 닫혀 있던 포병의 문을 처음 열어젖힌 이고은 대위가 K-9 자주포가 있는 진지의 문을 열며 나오고 있다. [한주형 기자]
"즉각대기 중이라 인터뷰 중 자리를 뜰 수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는 북한과 인접한 대표적인 군사 도시다. 인터뷰 장소인 부대를 향해 가는 도중 벙커 속에 대기하고 있는 자주포가 종종 눈에 띄었다.

얼마를 더 갔을까. 넓었던 길이 점점 좁아지고, 깔끔했던 도로 표면이 울퉁불퉁해질 무렵 위병소가 눈에 들어왔다. 여군 최초로 포대장에 임명된 이고은 대위가 복무하는 곳이다.

70년 육군 역사에서 포병은 금녀의 구역이었다. 화기가 무거워서, 야외훈련이 많아서…그래왔기 때문에 포를 주특기로 하는 여군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2014년 포병과 방공, 기갑 병과의 여군 진입 장벽이 없어졌지만 포대를 지휘하는 포대장을 여군이 맡은 적은 없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이 대위가 밝힌 삶의 원칙이다. 35년간 군에서 복무했다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 원칙의 힘이었을까. 이 대위 이름 앞에는 최초의 여성 포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인터뷰 목적을 밝히자 위병소 문이 열렸다. 문을 들어서자 한 군인은 이 대위가 즉각대기 임무를 맡고 있어 인터뷰가 중단될 수 있다고 알렸다. 그들의 결연함과 군인이라는 직업의 사명이 떠올랐다. 약속된 장소에서 이 대위를 만났다. 방탄헬멧에 탄띠를 갖춘 단독군장을 한 상태로 이 대위는 인터뷰에 나섰다.

―즉각대기가 무엇인가.

▷유사시에 즉각 포탄을 사격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인터뷰를 하다가도 상황이 떨어지면 나갈 수 있다.

―군인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아버지가 군인이시다. 공군에서 35년을 복무했다. 서울 기지 비행장과 수원, 서산 등에서 근무한 뒤 준위로 전역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군대와 밀접한 삶을 보냈다. 군인의 삶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을 해왔다.

―군인을 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응은 어땠나. 반대가 있지는 않았나.

K-9 자주포
▷부사관으로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딸이 장교가 된다는 것을 좋아해주셨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자랑을 한다. 어머니는 이제 전투화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썩 좋아하시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자극이 됐다. 어머니가 "언제든지 돌아와라. 난 네가 군생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하셔서 더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군인 가족이었으면 이사도 잦았을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다른 곳에서 나왔다. 초등학교 친구가 좀 애매하다. 5년 동안 다닌 학교에서는 졸업을 안 했고 졸업한 학교는 9개월밖에 안 다녔다. 그래도 다른 군자녀와 비교했을 때 이사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군인을 진로로 생각했나.

▷오랜 기간 생각해왔다. 고등학교 땐 공군사관학교 시험도 봤다. 이후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며 취업전선에도 뛰어들었다. 인턴으로 여러 군데서 일을 했다. 런던에서 두 달간 일하기도 했고. 여러 군데 취직 준비를 하다 보니 마침 장교 시험이 있다는 걸 알았고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다. 같은 기간 다른 기업에도 합격했지만 진로를 장교로 선택했다.

―기업과 군을 놓고 갈등도 많이 했을 텐데.

▷당시에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외받는 학생이 그러더라. "왜 군인을 하느냐. 나라면 일반 기업에 가겠다"고 했다. 사람들의 여군에 대한 인식이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어머니도 군인의 길을 걷는 걸 반대하셨으니까. 그래도 장교로 임관해보고 싶어 결국 이쪽을 택했다.

―처음부터 포병을 택했나.

▷아니다. 처음에는 공병으로 시작했다. 지금 9년 차로, 2010년에 공병으로 임관했다가 2014년에 전과했다. 공병부대에서 복무한 기간과 포병으로 복무한 기간이 비슷하다. 소위 때는 강원도 인제에서 소대장을 했다. 이후 본부중대장을 거쳐 군수과장을 하던 중 포병으로 전과했다.

―공병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했다. 처음에 소위 임관했을 때는 공병으로 군사기지 건설 사업에 참여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복무해보니 공병이라고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병에서 포병으로 전과한 이유가 무엇인가.

▷2013년에 공병 고등군사반을 갔는데 포병학교장이 오셔서 포병학교 홍보를 했다. 당시 여군 중에 전과 인원을 뽑겠다고 하더라. 그때 본 홍보 영상이 정말 멋졌다. 포 쏘면 해당 지역이 다 초토화되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반했다. 훈련에서 군대가 기동하려면 화력 지원이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포병이 잘하면 이기고, 포병이 잘못하면 진다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전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병과다. 그 매력에 전과를 결정했다.

―오지인 인제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지원 동기 중에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계속 복무했으면 오히려 서울로 올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었다. 근무 지역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여군 최초로 포대장으로 임명됐을 때 느낌은.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새로운 임무를 한다는 점에서 설레고, 최초라는 이름이 걸리다 보니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새로운 걸 해야 하는데 모르는 게 많아서 걱정이 많이 됐다.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을 것 같다.

▷처음 포병이 됐을 때 국방일보에 기사가 나왔다. 어느 정도 유명해지다 보니 내가 뭐라도 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져 임무에 충실하고 싶다.

―한국 군에서 첫 여군 포대장이 이제야 나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포병에서 여군을 받기 시작한 게 얼마 안된다. 2014년부터 처음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전에는 금녀의 영역이었다. 많은 분들이 의구심을 가졌다. 야외 훈련도 많고 화기도 무겁고 하다 보니 여성이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관행을 깬 셈이다.

▷여군은 포대장을 맡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포대장을 하고 싶다고 얘기를 강하게 했다. 당시 대대장님도 육군본부에 웬만한 남군보다 잘할 것 같다며 적극적으로 얘기를 해주셨다.

―왜 이제까지 없었다고 생각하나.

▷군조직은 특성상 안 해봤던 것에 대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시작을 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보완을 하면 될 텐데 시작을 안 했던 것이다. 포대장을 지원하면서도 큰 걱정은 없었다. 정해진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자는 생각만 했다. 기본에 충실하다 보면 인정해줄 거라고 믿었다. 지금은 저 말고도 여군 포대장이 세 명이나 더 있다. 앞으로는 더 늘어날 거다. 저보다 뛰어난 자원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어 사람들의 인식도 차츰 나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의 포병 진출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가.

▷소위부터 포병으로 임관하는 친구들이 많다.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 같다. 여군에 대한 인식도 많이 나아지고 있다. 여군 1만명 시대라고 한다. 학군 후보생 가운데서도 여성 비율이 많이 늘어났다. 계속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군인이다. 성별에 관계없이 군인이다. 여군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선배도 있다. 여군과 남군 구분하는 것 자체가 한계를 특정 지어서 영역을 한정 짓는 게 아닌가.

`이 사람만 따라가면 전쟁이 나도 살 수 있겠다`. 이고은 포대장이 성취하고 싶은 지휘관의 모습이다. 이 대위가 자신의 포대원들과 함께 K-9 자주포 위에 올라타 있다. [한주형 기자]
―최근 여성도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는 청와대 청원이 있었다.

▷먼저 수용할 준비와 여건이 돼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확실히 어려운 부분은 있다. 예를 들어 보통 여성 장교의 경우 출산이 대위 시기에 이뤄진다. 그런데 아이를 둘 이상 낳으면 출산휴가로 인해 반드시 해야 하는 보직을 거치기가 어려워진다. 장교도 이런데 여성 모두가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면 예상치 못한 더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부분이 먼저 해결돼야 하지 않을까.

―여군 GOP(최전방 경계초소) 투입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논란도 있었다.

▷여군과 남군을 나눠서 갈 수 있는 곳을 판단하기보다는 개인의 의지와 임무 수행 능력으로 판단해서 보냈으면 한다. 공병부대에서 근무하던 2011년에 지뢰제거작전을 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작전에 투입된 여군이 한 명도 없더라. 그래서인지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 여군도 환경만 갖춰진다면 충분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여군이 특정 병과에 편중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공병부대 같은 경우 사실 남군 사이에서도 선호하는 부대는 아니다.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해 오게 됐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곳에 인력을 배치하는 게 중요하다. 시행착오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을 나누기보다 사람에 따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군인은 아무래도 다른 직업에 비해 체력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많은데.

▷육체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 출산을 겪은 뒤엔 체력이 떨어진 게 느껴졌다. 출산 다음 해에 체력검사에서 특급을 하고 싶었다. 뜀걸음을 했는데 처음 10초가 모자라 특급을 하지 못해 화가 났다. 한 번 더 뛰고 나서야 특급을 받았다.

―생활 환경이 남성 위주로 맞춰져 있는데, 이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나.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이곳은 특히 내부 시설물이 잘돼 있다. 포병이 통합주둔지가 많다 보니 시설 개선이 빠르다. 여군에 대한 시설도 설계 단계부터 고려된 것으로 안다. 훈련장에 화장실이 없었는데 군단장님이 신경 써주셔서 화장실도 따로 설치했다.

―군 문화가 딱딱하고 거칠다는 지적이 많은데.

▷문화로 고생했던 적은 없다. 오히려 내 성격이 더 공격적이다. 배려심 많고 좋은 지휘관을 많이 만난 덕분이다. 사람들이 군에서 안 좋은 추억이 많은 것 같다. 나에게는 다들 잘해주셔서 어려움이 없었다.

―포의 매력은 무엇인가.

▷포는 직사화기가 아니다. 간접적으로 사격한다. 보이지 않는 적을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 있다는 게 포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포대장이 된 뒤 첫 훈련은 무엇이었나.

▷포대장 하고 얼마 안됐을 때 포탄 사격 임무를 맡게 됐다. 포탄을 쏘면 명중했는지 자리에서 확인할 수가 없다. 관측반에서 탄착 지점을 본 뒤 무전으로 알려준다. 첫 발 쏘고 무전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소름이 돋았다. 명중! 명중! 소리를 듣는 순간이었다.

아직까지도 처음 했던 사격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K―9이 정확하다 보니 항상 명중한다. 이후로는 계속 명중하다 보니 이제는 맞지 않으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K―9을 다루는 기분도 궁금하다.

▷포에 탑승하는 것은 포반장과 포반원들이다. 포대 전술훈련을 나가면 K―9 6문이 나간다. 한 문에 40억원 정도 한다. 비싼 자원이다.

―포탄을 다루다 보면 위험한 때도 있을 것 같다.

▷포병에서는 사고가 나면 인명 피해가 클 수 있다. 안전대책을 네 차례로 나눠 강구하기 때문에 사고가 날 환경은 아니다. 그래도 위험성이 분명 있는 만큼 매우 조심한다.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전이 첫 번째다. 인명 피해가 없어야 다음이 있다.

―기억에 남는 훈련은.

▷대량전상자처리 훈련이 있었다. 반절 이상 용사가 사망하고 나머지는 부상당한 상황을 가정한 훈련이다. 화생방 상황에서 방독면을 쓰고 임무를 수행했다. 그때 '실전에서 부하들이 많이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병법에 그런 말이 나온다. '싸울 때 아군의 피해가 없이 이기는 전쟁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그 훈련에서 정말 절실히 느꼈다.

―병들에게 어떤 포대장으로 비치고 싶나.

▷소대장 때 기억이 있다. 당시 중대장이 화도 잘 내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강성이었고…. 그런데 소대원 한 명이 전쟁 나면 중대장을 꼭 따라갈 거라고 하더라. 저 사람 따라가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전쟁 나면 따라가고 싶은 포대장이었으면 좋겠다. 이 사람 뒤에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병들이 전역하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드나.

▷ 이병 때부터 봐 온 용사들이 전역하면 가족이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순간에는 마음이 짠하다.

―군생활 중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한 용사가 전역을 했는데 부모님이 군생활 잘하고 전역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카톡을 보냈을 때다.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일에 회의가 들었던 적도 있을 것 같다.

▷의사소통이 잘 안됐을 때 그렇다.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의사가 전달됐을 때 회의가 느껴진다. 임관 초기에는 의지가 왕성하다 보니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병들이 나를 싫어했던 것 같다. 두발 정리와 관련해서도 규정을 칼같이 지키다 보니 불만이 많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자 들고 다니며 재고 있다.

―군인 가족이라고 들었다.

▷신랑도 포병 장교다. 직업상 둘이 함께 이사를 많이 다녔다. 고등군사반에서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다. 고등군사반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신랑은 2등을 했고 저는 표창을 받았다. 함께 단상에서 상을 받을 수 있어 기뻤다.

―군인 부부가 갖는 애로사항도 있지 않나.

▷아이를 믿고 맡길 분이 필요하다. 훈련이나 대기 당직 등 집에 오지 못하는 일정이 많은데 그때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 지금은 친정부모님이 아이를 돌봐주고 계신다. 부모님의 고된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평소 퇴근 후나 주말에 즐기는 취미가 궁금하다.

▷운동이나 음악을 좋아한다. 주로 볼링이나 수영을 하고 근력도 부족하다고 느껴 개인적으로 아령 운동을 하고 있다. 포탄이 무겁다고 하길래 얼마나 무겁길래 그러나 싶어 실제로 들어보니 정말 무거웠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본인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나.

▷나는 끈기 있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님이 해 주신 얘기이기도 하다. 물리라는 과목을 좋아했지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무조건 매달렸다. 그때 선생님이 '넌 참 끈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더라. 성격상 마무리가 안되면 될 때까지 끝을 본다. 조금 성격이 급하기도 하다.

―삶에서 지키고자 하는 원칙이 있나.

▷성실하고 정직하게. 소위 때 대대장님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라고 노래를 불렀다. 규정도 지키려고 항상 노력한다. 어떨 때는 나도 너무 규정, 규정 강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규정이 지켜지지 않아서는 안된다. 계속 규정을 얘기하는 사람도 한 명은 있어야 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규정을 지키자.' 임관하고 나서 갖게 된 원칙이다.

―계획이 있다면.

▷군생활을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다.

▶▶ 이고은 대위는…

1988년 경기도 성남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홍성여고를 거쳐 중앙대 도시공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여군사관 55기로 임관하며 공병특기를 받았다. 2014년 여군 대상 병과 개방 때 포병이 됐다. 포병으로 전과한 이후 30사단 전투서열장교, 고등군사반과 군수과장을 거쳐 지난해 포대장으로 임명됐다. 운동을 좋아하며 특히 달리기를 좋아한다. 포병 고등군사반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포대장 부부가 됐다. 아들 한 명을 두고 있다.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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