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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기초과학 키우려면 `빨리 빨리`부터 버려라"

김윤진 기자
입력 : 
2018-10-22 17:16:25
수정 : 
2018-10-22 17: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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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韓 정착 2명의 해외 석학
하인리히·루오프교수 苦言

빨리빨리 韓 역동적이지만
기초과학은 인내심 요구돼
과학진보 최소 1년 걸리는데
1달 단위 성과 확인 조급증
`기초과학=돈 먹는 하마` 시각
버리고 장기적 펀딩 해줘야
사진설명
"한국 기초과학이 크려면 '빨리빨리' 문화부터 버려야 한다." 한국에 뿌리를 내린 해외 석학 2명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과학계에 주문한 말이다. 과학에서 진보는 최소 1년 단위로 이뤄지는데, 빨리빨리 문화가 최고의 경쟁력인 양 조급증에 사로잡힌 한국에서는 한 달 단위로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출범 7년 차를 맞은 한국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양자나노과학단을 이끄는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다차원탄소재료 연구단 수장인 로드니 루오프 울산과학기술원(UNIST) 특훈교수가 바로 이 같은 쓴소리를 한 주인공이다. 루오프 교수와 하인리히 교수는 각각 텍사스 오스틴대와 미국 IBM 알마덴연구소에서 20여 년간 탁월한 연구실적을 쌓아온 글로벌 과학 석학인데 돌연 2013년, 2016년 한국행을 결정했다. 이 두 교수는 지난 19일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지에 IBS 지원을 받은 연구 성과를 각자 발표할 정도로 국제 학계에서 수없이 피인용되는 논문의 저자들이다. 최근에는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처럼 명망 높은 외국 과학자들이 어쩌다 연고도 없는 한국에 새로 둥지를 틀고 한국 기초과학 연구의 기반을 넓히는 일에 뛰어든 것일까.

하인리히 교수와 루오프 교수는 22일 매일경제신문과 인터뷰하면서 한국에 온 가족을 이끌고 정착한 이유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기초과학 지원에 대한 약속"을 꼽았다. 국적을 불문하고 단장으로 선정된 석학에게 연간 연구비 100억원을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보장하는 IBS의 파격적인 조건이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가 됐다는 설명이다.

루오프 교수는 "과학자를 모여들게 하는 것은 '오로지 과학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며 "기초과학 연구를 꽃피우려면 반드시 장기적이고 일관성 있는 자금 지원(펀딩)이 있어야 하고 여타 제도, 시설, 시스템은 부수적"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들은 '과학이 최우선(Science First)'이라는 모토로 낯선 한국 땅에서 기초과학 토양을 일구는 한편 국제 협업 인프라스트럭처 구축 작업에 올인한 상태다.

2013년 UNIST에 합류한 루오프 교수는 "이전에 없던 센터를 지어 올리고, 젊은 신생 대학(UNIST)의 성장 토대를 함께 닦을 수 있다는 데 굉장히 끌렸다"며 "국내외 과학계를 잇는 교류 기회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6년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로 임용된 하인리히 교수는 내년 5월께 캠퍼스 안에 완공될 예정인 양자나노과학연구소(QNS) 설립을 진두지휘하며 한국·미국·중국·이탈리아에서 온 다국적 팀을 꾸리고 있다. 하인리히 교수는 "첨단 빌딩을 올리고, 최신 시설과 도구를 구매하고, 인력을 고용하는 것은 엄청난 투자이자 실험"이라며 "모든 기초과학이 그렇듯 어떤 결실을 맺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일본·중국만 알고 한국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세계 석학들이 한국을 들락날락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과학 생태계 변화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현재 28명의 IBS 단장 중 여성은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 1명이 유일한데, 가장 여성이 적고 하드코어한 분야로 알려진 '양자나노과학'에서 여성 후학을 키워내겠다는 것도 하인리히 교수의 포부다.

기초과학을 여전히 '돈 먹는 하마'로 취급하고, 전폭적인 연구비 지원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한국 과학계에 일침도 가했다. 하인리히 교수는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 사회를 역동적이고, 재미있고, 트렌디하게 만들어주지만 기초과학은 반대로 굉장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분야"라며 "과학에서의 진보는 최소 1년 단위로 이뤄지는데 한국은 한 달 단위로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출범한 지 채 7년도 안된 IBS에 100년 역사의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수준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다. 하인리히 교수는 "지난 6년간 한국 연구진이 사이언스·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의 30%가 IBS 연구단에서 나왔다"며 "이런 성과를 응원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루오프 교수도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지만 한국 국민도 응용과학과 달리 당장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과학 성과를 믿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로는 조급증과 함께 홍보 부족을 꼽았다. 연구 역량이나 성과가 절대적으로 떨어진다기보다는 전 세계 인재를 유치하고 공동 연구를 장려하는 환경이 안되다 보니 두뇌가 유출되는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이다. 한국이 계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소외 지역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루오프 교수는 "권위 있는 기초과학상을 신설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최고 석학들이 한국에서 연구하고 싶도록 만드는 한편 인재가 결집되는 환경을 조성하면 자연히 한국에서도 혁신이 자라날 것"이라며 "미국과 스위스가 좋은 예"라고 밝혔다.

하인리히 교수는 "노벨상을 받으려고 해도 처음 연구한 뒤 관련 과학계에서 그걸 뛰어난 성과로 인정하고 수용하기까지 20년 정도는 걸린다"며 "한국에 올 때 10년을 바라보고 왔는데 그 안에 세계적인 수준의 양자나노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보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윤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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