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수살인'의 김윤석
범인의 광기 차분하게 받는 심리전 연기
선정적·폭력적인 장면 없이 긴장 유발
"마지막 장면서 여운 남는 영화였으면..."
김윤석에게 형사는 낯설지 않다. 수사물의 단골손님이다. 시작은 '추격자(2008년)'의 엄중호. 출장안마소를 운영하는 전직 형사다.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을 직감으로 알아보고 맹렬히 뒤쫓는다. '거북이 달린다(2009년)'에서 그린 조필성의 집념도 못지않다. 시골에서 껄렁거리다 마주한 탈주범 송기태(정경호)를 잡는데 안달이 나 있다. 두 형사 배역은 김윤석의 강직한 인상과 굵은 음색을 만나 야성이 폭발한다. 한껏 차오르는 감정에 정의로움이 덧칠돼 관객의 공감을 산다. 한국영화에서 그려지는 전형적인 형사의 외형이다. '극비수사(2015년)'에서 연기한 공길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원칙대로 유괴 아동을 구하려고 분투한다. 초점이 온정에 맞춰져 한결 부드럽지만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심장만큼은 그대로다. 사건이 절정에 다다르자 여느 때처럼 강한 에너지를 분출한다. "느그 아가 유괴돼도 이따위로 할래?"
김윤석에게는 큰 도전이자 기회였다. 장기인 에너지 분출조차 없이 밀도 높은 심리전을 조성해야 했다. 영화에는 잔인한 살해 장면이나 자극적인 폭력도 등장하지 않는다. 강직한 신념 하나로 전진하는 배역을 연기할 때보다 섬세한 계산이 요구됐다. 극적인 연기에 익숙해진 김윤석이 애타게 찾은 담담한 연기다. "필요 없이 감정을 끌어올리고 극적으로 보여야 하는 연기를 할 때마다 괴로웠어요. 다짜고짜 책상을 칠 필요는 없잖아요. 이성적으로 그려도 무방한데 광기를 드러내는 연기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연기자가 괴로워해요."
"이제부터 너는 생곡 암매장 사건의 피의자 신분이 된 거다." "예?" "나머지 어디 있노?" "무슨 나머지요?" "나머지 사체는 어디다 버렸냐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네가 죽여서 묻었다고 말했잖아." "내가 언제요?" (중략) "나는 이 여자를 죽인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른다고요." "이게 네가 살인범이라는 날인이고 인장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김윤석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고 했다. "김형민은 강태오가 아무리 광기를 떨고 막말로 염병을 떨어도 무서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와의 대화가 끊길까봐 두려워하죠. 강태오가 입을 닫는 순간, 게임이 끝나버리니까요. 그래서 여섯 차례의 만남 신이 모두 재미있었어요. 당근과 채찍을 주면서 실수하는 순간을 찾았던 거죠." 이런 대립에서 포커페이스는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얼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극에 긴장을 부여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김태균 감독은 김윤석의 눈빛을 가리켰다. "고조되는 감정이나 물리적 에너지의 파장을 단번에 보여준다"고 했다. "카메라로 잡으면 웃고 있어도 그 안에서 에너지가 새어나온다. 물리적으로 치고받는 액션이 없어도 관객의 마음을 조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새로운 가능성의 체득은 변화를 예고한다. 김윤석은 그동안 대립하는 투 샷(둘이서 찍는 사진)에서 감정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극에 긴장을 효과적으로 부여했으나 사실성은 떨어지는 양날의 검이었다. 예컨대 김상헌을 연기한 '남한산성(2017년)'에서 그는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임시 궁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저벅저벅 들어오며 인조(박해일)에게 호통하듯 말한다. "전하, 그런 망극한 말을 입에 담는 자들의 목을 베시옵소서. 세자 저하를 오랑캐에게 바치라는 자들이 과연 누구의 신하입니까. 세자 저하가 아니라 이들의 목을 잘라 적들에게 보내셔야 하옵니다."
김상헌의 정치적 신념을 단번에 보여주지만, 비현실적 설정을 더욱 지나치게 만드는 표현이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 물론 그의 해석만으로 설정된 연기는 아닐 것이다. '타짜(2006)'의 아귀와 추격자의 엄중호를 연기한 뒤로 충무로에서 홀로 파괴되는 배역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강렬한 연기가 재생산되는 흐름에서 탈피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암수살인은 그 전환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본질에 가까워져야 하죠. 과욕을 부려 굳이 필요 없는 걸 집어넣으면 불순물이 되잖아요. 본질을 놓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기 어려워요. 마지막 장면에서 부디 여운이 오래가는 커피 향이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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