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돌 한글날에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볼 수 없다”

백경열 기자

올해 한글날에도 국보급 문화재로 여겨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하 상주본)은 볼 수 없을 전망이다. 실소유자라고 주장하는 50대 남성은 문화재청과 법적 다툼을 이어가며 상주본의 실물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로 알려진 배익기씨가 지난해 4월 공개한 상주본의 일부 사진. 일부가 불에 그을려 있다.|배익기씨 제공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로 알려진 배익기씨가 지난해 4월 공개한 상주본의 일부 사진. 일부가 불에 그을려 있다.|배익기씨 제공

8일 상주본 소장자로 알려진 배익기씨(55·고서적 수집가)는 경향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여전히 (나를 둘러싼 오해가 풀리고 누명을 벗은 뒤에야 상주본을 공개할 수 있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배씨는 올 4월 법적 소유자인 국가(문화재청)가 강제집행 등의 형태로 상주본을 회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2014년 상주본을 훔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에 대해 진행된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대구지법 상주지원 민사부)는 지난 2월 배씨가 문화재청을 상대로 낸 ‘청구이의의 소’ 선고공판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관련 증거 등 공소사실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뿐, 상주본의 소유권을 인정한 판결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당시 재판부는 “형사 판결에서 무죄는 증거가 없다는 의미일 뿐 공소사실이 없다는 게 증명됐다는 의미가 아니다”며 “원고는 국가 소유를 인정한 민사재판 결과 이전부터 상주본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소송은 민사 판결 이후에 생긴 이의 사항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판시했다. 배씨는 지난 3월 곧바로 항소했으며, 2심 판결을 앞두고 지난달 20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변론절차를 밟았다.

상주본의 소유권 등을 둘러싸고 민·형사 재판부의 판단이 달라지면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

학계에서 “1조원대의 가치가 있다”고 할 정도로 귀중한 문화재인 상주본은 2008년 7월 배씨가 “집을 수리하기 위해 짐을 정리하던 중 발견했다”며 실물을 공개하면서 처음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상주의 한 골동품 업자 조모씨(2012년 사망)는 “배씨가 상주본을 훔쳐갔다”면서 민사 소송을 제기했고, 2011년 6월 대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은 민사 판결 등을 근거로 그 해 8월 상주본을 훔친 혐의(문화재법 위반)로 배씨를 구속했다. 1심 재판(2012년 2월)에서 배씨의 죄가 인정돼 징역 10년이 선고됐지만, 항소심(2012년 9월) 및 대법원(2014년 5월)은 “배씨의 소유권 주장이 사실이라고 확정하는 건 아니다”면서도 공소사실 입증 부족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배익기씨는 형사 판결로 절도 혐의를 벗었지만, 대법원 판결 전까지 1년여 간 옥살이를 하는 등 고초를 겪은 점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문화재청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부당하게 징역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배씨는 “진상을 가려서 당시 문화재청 관계자들을 처벌하고 명예가 회복된 후에야 공개 논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가는 배씨에게 상주본 인도를 요구할 수 있다. 민사재판에서 이긴 조씨가 2012년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상주본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그해 12월 숨져, 법적 소유권자는 국가로 넘어간 상태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상주본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데다 훼손될 우려까지 있어 당장 강제 집행을 하지는 못한다는 입장이다.

문화재청은 상주본을 되찾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경북도·상주시·검찰 등과 함께 별도의 협의체를 꾸려 대응하고 있다. 배씨와도 수차례 만나 설득 작업을 벌였지만 접점은 찾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온 뒤에야 강제회수 등의 절차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다만 법원의 판단과는 별도로 배씨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사태 해결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4월 상주본 일부가 불에 탄 상태로 촬영한 사진을 배씨가 공개하면서 훼손 우려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다. 소장자뿐만 아니라 문화재청의 소극적인 대처에 대해 비판이 제기됐다. 배익기씨는 “현재 (상주본을) 보관하고 있는 건 맞지만 보관 상태가 좋지는 않다”고 말했다.

오는 18일에는 배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청구이의의 소’와 관련해 3차변론기일이 예정돼 있다. 배씨와 문화재청과의 입장 차가 여전해 항소심 판결 이후에도 긴 시간동안 법적 공방은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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