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맛’ 톡톡]“스트레스 한국인, 입안 혁명을 원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 요즘 우리 사회에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이 갈수록 빨간 맛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얼큰한 찌개부터 입에 불이 난 듯 얼얼하게 매운 라면까지. 한국인이 점점 더 사랑에 빠지고 있는 매운맛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 매운맛 열광, 밤낮이 없다 ▼

“급식이 맛없는 날에는 친구들과 모여서 눈물이 날 정도로 매운 떡볶이를 시켜먹어요. 예전에는 매운 음식이 가끔씩 생각났다면 요즘에는 매일 먹고 싶어요. 입맛이 변해버려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야 제대로 먹은 느낌이 들거든요.” ―오인선 씨(16·잠실여고 1학년)

“서울에서 매운 음식 탐방을 해보기 위해 천안에서 올라왔습니다. 맵기로 유명한 음식들은 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엄청 매우면서도 맛있어요. ‘빨간 맛’이라는 묘한 매력에 중독돼 계속 젓가락을 들게 되죠. 아픈 속은 나중에 달래면 되고 먹을 때 느끼는 재미가 더 커요. 전국 곳곳의 매운 음식을 찾아나가는 게 일종의 모험 같아요. 앞으로도 한국인의 매운 음식에 대한 열망은 계속될 거라고 봅니다.” ―안재호 씨(30·자영업)

“원래는 배달만 하는 떡볶이 가게였어요. 매출이 늘면서 본점에 홀 매장이 생겼고 이제는 매장이 400개가 넘어요. 저희 떡볶이는 기분 좋게 매운맛이기 때문에 꾸준히 인기가 있어요. 특히 0시∼오전 2시는 야식을 시키는 손님이 많은 시간대입니다.” ―정해엽 씨(36·엽기떡볶이 동대문 본점 운영)

“유튜브에서 ‘7일 동안 매운 음식만 먹기’ 영상을 찍은 적이 있어요. 맵기로 소문난 음식이라면 다 먹어본 것 같습니다.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먹방’은 인기가 정말 많아요. 시청자들은 화면 속 시뻘건 음식이 얼마나 매울지 궁금한데 그걸 대신 먹어주니까 대리만족하는 겁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반응을 재미있어 하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매운 음식에 도전하고 싶지만, 며칠을 연속해서 먹고 싶지는 않아요.” ―김동곤 씨(25·유튜브 채널 ‘보이즈빌리지’ 크루)

▼ 한국인의 솔 푸드 ▼

“요즘처럼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면 얼큰한 동태탕이 생각납니다. 옛날에 김장이 끝나면 어머니가 일손을 도와준 동네 어르신들께 대접한 음식이 동태찌개였어요. 이날 먹는 동태찌개는 배를 든든히 채워주는 반가운 손님이었죠. 그때부터 찬바람 부는 날 빨간 국물을 찾는 지금 입맛이 만들어졌습니다.” ―고혁 씨(62·유통업)

“‘매운맛이 사무칠 때.’ 제가 쓴 고추장 광고 문구였어요. 본능적으로 매운맛을 원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뼛속까지 사무친다’고 표현했죠. 배우 차승원이 유럽 여행을 하던 중 느끼한 크림 파스타를 매콤한 비빔국수로 착각하는 장면이 있어요. 외국에 나가면 고추장에 밥만 비벼 먹어도 맛있다고 하잖아요.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감을 받고 있죠.” ―조규미 씨(49·작가·전 카피라이터)

“친한 사람끼리 모이면 김치찌개 집을 갑니다. 펄펄 끓는 매운 찌개국물을 한 숟갈씩 뜨다보면 어느새 소주병이 하나둘 늘어납니다. 얼큰한 국물이 있으니 속이 편해요. 큰 냄비에 돼지고기와 김치가 듬뿍 들어가서 양도 푸짐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도 부담이 없죠. 이만한 서민음식이 없습니다.” ―김지수 씨(67·전기기술업)

▼ 왜 ‘빨간 맛’을 찾는가? ▼

“우리나라의 매운맛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서민들은 갈수록 더 매운맛을 찾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노동자나 샐러리맨이 가는 선술집, 1980년대에는 대중이 먹는 음식에 매운맛이 보편화되었어요. 최근에는 세계적인 핫소스 열풍과 외식업의 성장에 영향을 받아 매운 음식이 훨씬 많아졌죠. 그러면서 집에서 먹는 음식도 점차 매워지고, 식품공장에서도 전에 없던 매운맛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고 싶어서 특별히 맵다고 소문난 주꾸미집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술을 마시는 것과 똑같습니다. ‘오늘의 일은 오늘 생각하고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한다’, 이런 마음가짐입니다.” ―강모 씨(28·대학원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매운 음식 콘텐츠를 보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좋아요’ 수만 개를 받은 영상이 계속 유행을 만드는 것 같아요. 치즈 토핑과 사이드 메뉴인 주먹밥을 ‘세트 메뉴’로 파는 전략도 소비자의 심리를 잘 이용한 거라고 생각해요.” ―이지은 씨(19·대학생)

“매운맛에 승부를 거는 것은 효과적인 외식 마케팅입니다. 소비자도 매운 음식이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는 매운 음식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계속 찾는 거죠. 불경기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몫합니다. 1990년대 외환위기가 해결되고 난 뒤에 매운 음식 매출이 실제로 줄어들기도 했어요.” ―도현욱 전주대 한식조리학과 교수

▼ 너무 자극적이면 곤란해 ▼

“카드 사용 명세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한 달 식비의 90%를 맵고 자극적인 음식에 썼더라고요. 수험 생활을 하면서 하루 세 끼를 배달음식으로 먹은 적도 있습니다. 2인분 이상 주문해야 해 식비도 많이 나가고 과식할 때가 많았죠. 만성 소화불량이 생기면서 잘못된 식생활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습니다.” ―지모 씨(20대·대학교 4학년)

“결혼 초에는 집밥을 많이 먹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외식 횟수가 늘고 있어요. 매콤한 배달 음식이나 간편식을 자주 찾게 되죠. 3년째 맞벌이를 하다 보니 사먹는 게 싸고 편하거든요. 잠들기 한두 시간 전까지 자극적인 야식을 먹어서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한 적도 많아요.” ―박선영 씨(30·교사)

▼ 건강한 매운맛을 찾아서 ▼

“한국의 매운맛은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달라요. 멕시코의 매운 음식은 매운맛만 나는데 한국의 매운 음식은 여러 가지 맛이 나거든요. 어느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었는데 단맛이 너무 강해서 이상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김치예요. 한국 고유의 매운맛이 담긴 음식이 더 좋아요.” ―지젤 크리스털 게바라(20대·미국 텍사스 거주)

“매운맛은 혀가 느끼는 통증입니다. 캡사이신은 뇌를 자극해 진통제 역할을 하는 엔도르핀을 분비하도록 합니다. 기분을 좋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어요. 하지만 매운 음식은 위 점막을 손상시켜 위궤양이나 위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위장장애가 특히 많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해요.” ―허양임 인제대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원래 우리의 매운맛은 단맛이 가미된 순한 매운맛입니다. 국산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사용해 얼큰한 감칠맛을 내는 것이죠. 남미나 베트남산 고추가 들어오면서 강렬한 매운맛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매운맛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자극이 강할수록 더 큰 만족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매운맛을 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바깥음식은 조미료나 나트륨이 적정량보다 많이 들어갑니다. 건강한 입맛을 되찾은 사람들이 예전에 먹던 대로 식사를 하면 ‘내가 이 맛을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하고 반성을 하게 되죠. 일주일만 건강한 맛을 찾아보세요. 몸의 부기가 빠지고 쌓여 있던 피로가 풀리면서 가볍고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홍성란 요리연구가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서재의 인턴기자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4학년
#빨간 맛#스트레스#매운맛#캡사이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