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들의 방탄소년단, 서태지와 아이들

입력 2018. 9. 29. 05:06 수정 2018. 9. 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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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서태지 ①

[한겨레]

한겨레 자료사진

‘살다가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얼마 전 유엔 총회에서 방탄소년단(BTS)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 이 정도로 성공한 가수가 또 있었나? 가수로서의 성공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상업적 측면으로는 비교 가능한 대상이 없다. 팬덤 차원에서도 그렇다. 전 세계적으로 이 정도의 팬을 거느렸던 가수는 가요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스포츠 스타들 이야기할 때 기록을 꺼내 들듯,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수치화시키기 가장 좋은 기준은 빌보드 차트 순위다. 팝을 안 좋아하는 사람도 다들 이름은 들어봤을 빌보드 차트가 뭔지 잠깐 설명하자면, 무려 1896년 우리나라에서 갑오개혁을 실시했을 때 창간된 미국의 음악잡지 빌보드에서 만드는 대중음악 차트다. 서브 차트들이 매우 많은데 메인 차트는 딱 두 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노래를 1위부터 100위까지 줄 세우는 ‘핫100’ 차트, 가장 인기 있는 음반을 1위부터 200위까지 줄 세우는 ‘빌보드200’ 차트.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7주 동안 2위를 차지했던 차트가 바로 핫100 차트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200차트에서 두 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 음반이 아닌 노래로도 ‘페이크 러브’, ‘아이돌’ 등등이 ‘핫’ 차트 상위권을 차지했다. 유튜브 조회 수를 봐도 방탄소년단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압도적이다.

그렇지만 방탄소년단은 국내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팀이다. 우리가 접하는 방탄소년단의 소식 중 90%는 외국에서 이러이러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뉴스다. 무대를 우리나라로 한정했을 때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넘어서는 가수는 여럿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을 시작한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 등등의 성취는 논외로 하자. 44살인 내가 본 수많은 가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꼽을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아재들의 방탄소년단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는 셋. 노래와 작사 작곡을 담당하는 서태지, 춤과 코러스를 도와주는 양현석과 이주노. 1992년에 첫 음반 <요! 태지!>를 들고 <특종 티브이 연예>(문화방송·MBC)를 통해 데뷔했다. 당시 무대를 본 심사위원들이 7.8점이라는 역대 가장 낮은 점수를 주는 흑역사 동영상이 아직도 돌아다닌다. 찾아볼 만큼 재미있다. 가요-연예계의 기성세력을 대표하는 이들 심사위원을 엿 먹이기라도 하듯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죽지세로 가요계를 평정했다. 앨범은 한국 가요 역사상 데뷔 음반으로는 최대 판매고를 올렸다. 무려 180만장. 순위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상이란 상은 죄다 휩쓸었다.

소포모어 징크스는 개나 주라지. 2집 음반 <하여가>는 더했다. 220만장이 팔렸고 모든 방송사의 순위 프로그램 1위를 단박에 차지했다. 이번에는 평론가들의 찬사까지 쏟아졌다. 우리 국악과 헤비메탈, 랩 등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한데 섞은 타이틀 곡 ‘하여가’는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점령해버렸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라 서태지의 광풍을 생생하게 목격한 바 있다. 다만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이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팝 음악, 특히 헤비메탈에 미쳐 있었고 가요 중에서도 듀스를 서태지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그래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의식한 듯 3집 <발해를 꿈꾸며>, 4집 <컴 백 홈>에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냈다. 4집 음반은 갱스터 랩이라는 생소하면서도 과격한 장르를 도입했는데도 불구하고 240만장이 팔려나갔고, 순위 프로그램을 싹쓸이하는 괴력도 여전했다. 음악뿐 아니라 패션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당시 또래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걷다 보면 여기도 서태지, 저기도 서태지였다. 그 틈에서 나 혼자 말 구두에 가죽점퍼를 입고 돌아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어느 날, 그들은 돌연 은퇴선언을 했다.

국상이라도 난 줄 알았다. 뭐 문화 대통령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겠다. 모든 방송사 저녁 뉴스가 메인 기사로 다루었고,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많았던 팬들은 며칠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부담과 피로감 누적 외에 특별한 이유조차 밝히지 않고, 그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빌보드 차트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우리 가요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끼친 영향은 방탄소년단 못지않다. 서태지의 등장을 계기로 가요의 흐름이 아예 바뀌어 버렸다. 금기의 영역이었던 가요심의에 정면으로 도전했고 결국 사전 심의 제도를 없애버렸다. 멤버들의 멤버 셋의 학력이 모두 고졸(심지어 서태지는 고1 중퇴), 팀의 리더인 서태지가 한참 막내, 멤버들 모두 띠동갑 넘게 차이 나는 배우자와 결혼했다는 등의 가십도 여기서 털고 간다. 다음 화에는 욕먹을 수도 있는 예민한 이야기들을 다룰 테니까. 키워드가 무려 표절과 재평가! 기대하시라.

에스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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