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수사반장] 폐주유소 밑에 55m 땅굴 판 그들..전기요금서에 덜미

전효진 기자 2018. 9. 26. 16:4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찰, 대전·충청 지역 송유관 절도범 40명 검거
폐주유소 밑에서 두 달 동안 땅굴 파던 중 붙잡혀
지난 8월엔 시가 25억원 상당 기름 훔쳐 팔기도

"거의 폐가(廢家) 수준인데, 망한 주유소에 아직도 전기요금서가 날아간다고 합니다. 거기 밑에 송유관이 지나간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지난 5월 대전 둔산경찰서에 익명의 도유(盜油) 의심 신고 제보가 들어왔다. 신고를 접수받은 경찰은 현장 주변 수사부터 시작했다.

"공사장 인부들이 드나든다" "밤에 나갔다가 아침에 돌아오는데 흙이 잔뜩 묻어서 왔다" 같은 목격자 진술을 확보했지만, 결정적 증거 확보가 어려웠다. 폐주유소가 인적이 드문 충북 영동군 광평리 국도 옆에 위치한 데다 폐쇄회로(CC)TV도 없었기 때문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의 한 폐주유소/전효진 기자

하지만 김상석(53) 둔산경찰서 강력3팀장은 계획적으로 장소를 옮겨다니는 조직화된 도유범들의 소행임을 직감했다. 결정적인 단서는 이 폐주유소의 전기사용량이었다. 이 폐주유소에서는 매달 5만~6만원의 전기요금이 청구됐다. 이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8시간씩 약 440㎾h의 전기를 사용했을 때 부과되는 요금 수준. 폐주유소 안에 사람이 살거나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앞서 김 팀장 등 강력 3팀은 지난해 8월에도 대전의 한 콩밭에 매설된 송유관에 구멍을 내고 휘발유 150만ℓ(약 19억원 상당)를 훔친 현장을 검거한 적이 있었다. 당시 현장에서 드릴·용접기 20여 점을 수거했지만, 주범(主犯)은 달아난 상태였다. 김 팀장은 당시 도망간 도유범들이 이 폐주유소를 다음 범행지로 삼았음을 직감했다.

폐주유소 사무실 밑으로 판 땅굴 내부./전효진 기자

현장을 한 번에 덮치는 것이 수사의 관건이었다. 6월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침, 현장에서 ‘퇴근’하던 송유관 절도범들이 잠복해 있던 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폐주유소 사무실 안쪽 바닥에서 가로·세로 1m 크기의 네모난 땅굴 입구도 발견됐다. 범인들은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송유관 아래로 땅굴을 파서 지하에서 도유를 시도할 계획이었다.

김 팀장의 예상대로 검거된 범인들은 지난해 8월 대전 콩밭 송유관 절도 사건의 일당이었다. 주유소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박모(58)씨는 탄광에서 갱도작업을 한 신모(58)씨와 함께 범행을 계획했다. 폐주유소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도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들을 불러모은 주범은 사기죄로 징역을 살고 출소한 강모(41)씨였다. 강씨는 교도소에서 송유관 절도에 필요한 용접기술 등을 익혔다고 한다.

지난 14일 범행에 쓰였던 폐주유소를 찾았다. 16㎡(약 5평) 남짓한 주유소 사무실에 들어서자 먹다남은 빵과 캔커피, 흙투성이인 철제모, 형광조끼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책상에는 하루에 일과를 적어둔 메모장과 노트북, 전기요금서가 놓여 있었다. 사무실 안쪽으로 더 걸음을 옮기자 5m 아래까지 파인 땅굴이 보였다. 땅굴 안에는 늦여름 더위가 무색하게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퍼낸 흙을 담은 2만개의 포대자루가 땅굴 내부에 벽돌처럼 쌓여 있었고 철제 지지대도 있었다.

"하루에 8시간씩 밤 잠을 자지 않고 두 달 동안 총 55m 길이의 땅굴을 팠다고 합니다. ‘성공하면 노다지’라는 일념으로요. 30대 초반에서 60대까지 ‘이것만 성공하고 인생 역전해보자’는 식으로 설득했다고 하는데, 정말 위험했어요. 폭발 위험도 있지만 땅굴 위는 왕복 4차로 도로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무너질 경우 더 큰 인명 피해가 날 수 있어요. 여러 사람 목숨 잃기 전에 (범인을) 검거해서 천만다행인 거죠" 경찰관계자의 설명이다.

강씨 등이 아지트처럼 삼았던 폐주유소 사무실 모습. 강씨 등은 노트북을 비롯해 사무실에 소화기도 배치해 뒀다./전효진 기자

경찰은 지난 13일 강씨 등 18명을 송유관안전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땅굴파기’에 가담했던 22명은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2016년 11월부터 지난 6월까지 대전과 충북 3개 지역의 송유관에서 모두 189만ℓ(시가 25억원 상당)의 경유와 휘발유를 훔쳐 판 혐의를 받는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