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건의 추억]④"악마 중 악마는 정남규..유영철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전효진 기자 2018. 9. 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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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22일 새벽 4시쯤. 서울 신길동 한 다세대 주택에 한 남자가 몰래 침입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훔칠 것’을 찾던 그는 자고 있던 청년(당시 24세)이 뒤척거리자 대뜸 미리 준비해간 길이 40cm의 파이프렌치로 청년의 머리를 내리쳤다.

‘기습공격’을 감행한 강도범의 예상과 달리 청년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청년의 아버지까지 합세해 결국 이 남자를 제압한 뒤 경찰에 넘겼다. 강도가 훔친 건 고작 현금 2만 4000원과 1만원 문화상품권이었다.

경찰에 붙잡힌 강도는 "모든 게 끝났다. 완전범죄는 다 끝났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경찰은 단순 ‘잡범(雜犯)’인 줄 알았던 이 남자의 전과를 조회해 보고 깜짝 놀랐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강간·방화·강제추행 혐의로 수시로 교도소를 들락거렸던 상습범이었던 것이다.

즉각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가 투입됐다. 권일용(55) 전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관 범죄행동분석팀 팀장이 나섰다. 권 전 팀장은 1시간여 동안 면담한 끝에 그가 2년 전부터 2004년 여름 전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유영철에 버금가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정남규의 범행 사건일지./그래픽=김란희 디자이너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정남규의 실체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는 2004년 1월부터 2년 3개월 동안 서울·경기 지역에서 부유층, 노인, 여성 등 13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20명을 중태에 빠뜨린 것으로 조사됐다. 검거 당시 혼잣말처럼 정남규의 연쇄살인 행각도 그날로 ‘모든 게 끝났다’. 2007년 4월 사형이 확정된 정남규는 만 40세였던 2009년 11월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정남규는 왜 그렇게 살인을 ‘즐겼을까’?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노인과 여성 등 20명을 연쇄살인해 영화 '추격자'의 모티브가 됐던 유영철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은 지난 19일 국내 제1호 프로파일러인 권 전 팀장을 만나 정남규의 실체에 대해 물었다. 그는 경찰에서 30년간 근무하며 정남규·유영철·강호순·김길태 등 흉악범 960여 명을 인터뷰하며 범죄 수법과 동기·행동의 원인 등을 탐구해 왔다.

권 전 팀장은 "유영철도 악인(惡人)이었지만 정남규는 정말 악인 중에 악인이었다"고 했다. 그는 "정남규는 죄책감도 없었고 검거 후에는 계속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괴로워할 정도였다. 유영철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정남규의 범행 수법에 대해선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고 평했다.

그는 유영철과 정남규는 같은 연쇄살인마였지만 범행 수법이나 성격은 상반된 스타일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4월 명예퇴직한 그는 현재 연세대·동국대 대학원 등에서 수사 기법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 19일 오전 서울 천호동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권일용 전 팀장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이날은 권 전 팀장이 현직에서 경험한 내용을 담은 책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국내 최초 프로파일러의 연쇄살인 추적기)’이 출간된 날이기도 했다. 그는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12년 전 정남규 사건과 관련해 모든 기억을 떠올릴만큼 꼼꼼하고 섬세했다./박상훈 기자

◇"검거 후 살인 못 해 괴로워한 ‘악인 정남규’…유영철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Q. 프로파일러로서 만나본 960여 명의 범죄자 중 가장 악인은 누구였나?
"나는 기본적으로 성선설(性善說)을 믿는 사람이다. 유영철도 악인이었지만 정남규는 정말 악인 중에 악인이었다. 정남규는 사람을 살인하는 게 담배 피는 행위 같은 기호(嗜好)였다. 죄책감도 없었고 검거 후에는 계속 사람을 죽이지 못 해서 괴로워할 정도였다. 유영철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연쇄살인범들은 공통적으로 주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을 선택한다. 정남규는 어머니·동생과 함께 살았고, 유영철은 근처에 가족이 살았는데 우월감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관계 맺지 않는 잉여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굉장히 잘난 사람이고, 상대방의 삶과 죽음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Q. 연쇄살인범들과 첫 면담 장면이 궁금하다.
"유영철은 굉장히 오만했다.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 끊임없이 자기 자랑, 자기 말만 했다. 조사하는 사람(경찰)들도 비하하고, 경찰 계급을 가지고 ‘내가 저 정도는 돼야 대화를 하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정남규는 소심하고 회피적 성향이 있는 사람인데, 전과가 많았다. 교도소 안에서 생면부지의 범죄자들과 함께 있다고 하면 스트레스 지수가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너 교도소에서 무지하게 고생했겠구나’라고 했더니 놀란 눈으로 ‘어떻게 알았어?’라며 쳐다보더라. 그 뒤 1시간 정도 면담이 진행됐다. ‘너 불 왜 질렀냐’라고 했더니 ‘내가? 나 불 안 질렀어’ 이러는 식이었다. 반말하지 말라고 기선제압부터 했다. 그러던 중 유영철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서울 이문동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도 자신이라고 하더라."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지난 2006년 5월 이문동 여성 피살사건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방송 캡처

◇ 정남규 "그냥 죽이면 재미없어, 고통 봐야 더 재미"…‘악마를 보았다’
‘이문동 살인 사건’은 유영철과 정남규가 경쟁하듯 서로 자신의 범행이라고 주장했던 사건이다. 2004년 2월 6일 오후 7시쯤 서울 이문동 한 골목길에서 의류상가 여종업원 전모(24)씨가 4차례 흉기에 찔려 숨졌다. 경찰이 증거를 찾지 못해 사건은 미제(未濟)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5개월 만인 7월 18일 유영철이 검거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유영철이 사건 송치를 하루 앞두고 갑자기 이문동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경찰청이 난리가 났다. 곧바로 현장검증까지 실시했고, 유영철은 '이번 사건을 저지른 것이 맞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2년 뒤 정남규가 붙잡히면서 진범은 정남규로 밝혀졌다.

Q. 이문동 사건과 관련해 정남규는 뭐라고 하던가?
"유영철이 현장검증하는 것을 TV로 봤다고 하더라. ‘내가 한 건데 왜 지(유영철)가 나서서 했다고 하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정남규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고 6개월 동안 범행 현장에 나갔다. 정남규는 단 한 차례도 예외 없이 밤에 여성의 뒤를 따라가 골목길 가로등 아래서 여성의 팔을 붙잡고 돌려세워서 배와 가슴을 찔렀다. 살인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어두운 곳에서 등 쪽을 찔렀을 것이다. 하지만 정남규는 피해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봐야만 하는 거였다. 정남규가 ‘나는 그냥 죽이는 거 재미없다. 고통스러워하는 거 보는 게 더 재미있다’고 하는데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
정남규는 처음엔 길거리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다른 사람의 집에 침입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노상(路上) 살인 사건이 나자 뉴스에서 종종 ‘서울판 살인의 추억’이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후 범행 도구도 칼에서 파이프렌치로 바꾼다. 집으로 침입했을 때 정남규는 꼭 작은 방으로 갔다. 큰 방은 남자나 어른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약자가 있을 것 같은 곳으로 간 것이다(정남규는 검거됐던 당시에도 신설동 다세대 주택 작은 방에 침입했다)."

Q. 정남규와 유영철, 서로 다르지만 닮았다.
"둘 다 계획적 범행을 저지른 연쇄살인범이지만 정남규는 사회적으로 학습받을 기회가 없어서 치밀하지 않고 ‘무작정 발로 뛰는 스타일’이었다. 정남규에게 ‘피해자를 물색하지 못했을 때는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예전에 살인을 저질렀던 곳으로 가서 눈을 감고 회상하면 즐거워진다’라고 말하더라. 정남규에게 그야말로 ‘살인의 추억’이었던 것이다. 추억의 일부인 칼도 절대 안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집을 다시 압수수색했다. 거짓말처럼 장롱 서랍 밑에 칼이 있었다. 거기에서 피해자들의 DNA를 채취해 여죄를 밝힐 수 있었다.
반면 유영철은 정남규보다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범죄를 저질렀다. 경찰 신분증을 위조해서 아슬아슬하게 법망을 피해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직업여성 등)을 공략했다. 금전 갈취로 돈도 많이 벌였다. 노점상인을 죽인 뒤 인천 월미도에 시신을 유기할 때는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게 손도 잘랐다. 시체를 불태우고는 구경을 하다가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택시를 5번이나 갈아탔다고 했다. 아주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 도구도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유영철은 출소하고 나서 개를 산으로 끌고 가 죽이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 칼로 죽이니 개가 피를 흘리면서 안 죽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가방에 딱 들어가는 크기인 4kg짜리 쇠망치를 제작했다. 반면 정남규는 칼을 가지고 다니며 찔렀는데, (피해자가) 자꾸 소리 지르니까 파이프렌치로 바꾸고 집에 침입했다. 정남규는 파이프렌치가 커서 가지고 다닐 수 없자 남의 집 장독대 밑, 전봇대 쓰레기통 옆 등 곳곳에 숨겨놓고 그 지역을 돌아다니다 대상을 물색해 살인을 저지르는 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둘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공통점은 있다. 언론은 ‘희대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하고 주목도 받으니 스스로는 얼마나 우쭐하겠나. 방화범, 바바리맨 등과 심리적으로는 같은 범주다. 상대가 놀라서 도망치는 반응을 보고 싶은 거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지난 2004년 7월 18일 시체를 묻은 서울 봉원사 인근 안산 계곡에서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공동취재단

Q. 연쇄살인범 집도 가봤나. 성격이 드러날 것 같은데.
"정남규 집에 갔을 때는 내 사진과 과학수사 관련 책들, 자신이 범행한 사건과 관련된 기사들이 수북이 스크랩돼 있었다. 유영철은 강박적 증세가 있을 정도로 집을 깔끔하게 해놨다. 유영철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직업여성들을 불러 살해했는데, 자기 스스로는 욕실 문턱을 ‘죽음의 문턱’이라고 표현하더라.
두 연쇄살인범의 패턴은 정반대였다. 유영철은 범행 시각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다. 이때는 집에 노인과 어린이, 여성이 있다.유영철은 자기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부자를 처단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 집에 침입해 약자들만 공략했다. 그 뒤 직업여성들을 자신의 오피스텔로 불러들였다. 피해자가 없어져도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 범행 후 뒤처리가 편리한 곳으로 진화한 것이다.
반대로 정남규는 뒤처리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빨리 도망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달리기를 연습한 사람이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모티브로 한 영화 ‘추격자’ 스틸컷./인터넷 캡처

◇"사람 죽이지 못해 괴로워했던 정남규, 마지막 대상은 자기 자신"
Q. 한 명(유영철)은 살아있고, 다른 한 명(정남규)은 구치소 독방에서 생을 달리했다.
"정남규는 재판을 받으며 판사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내용 중에선 ‘담배는 끊었지만 죽이는 건 못 끊겠다’, ‘사람을 죽이지 못해 괴롭다’는 표현이 들어있다. 결국 마지막 살해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범행을 자백하고 자신과 같은 악마를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형제가 폐지되면 안 된다고도 했다."

Q. 흉악범죄 형태가 시간이 흐르며 바뀐다. 일정한 공식이 있나.
"범죄는 사회를 대변하는 지표 같은 것이다. 1990년대까지 범죄는 드라마 ‘수사반장’처럼 형사가 뛰어다니면 다 잡았다. 그런데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이후 중산층이 급격히 몰락하면서 1994~95년 ‘지존파’ ‘막가파’ 같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사건이 나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유영철, 정남규 같은 애들이 연쇄살인을 저질렀고 이후엔 (범죄) 계획을 수립하는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묻지마 분노 범죄’로 변했다. 시대별로 진화된 범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앞으로 프로파일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변화를 읽고 예측한다면 다음 범죄를 조금이나마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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