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삭둥이 백호, 앞으로도 웃길” 아버지가 말하는 ‘슈퍼루키’ 강백호

입력 2018-09-2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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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강백호(오른쪽)는 2018 KBO리그 강력한 신인왕 후보다. 강백호가 부친인 강창열 씨와 함께 손을 맞잡고 부자의 정을 나누고 있다. 수원|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김재현(43)은 신일고를 졸업한 1994년 LG 트윈스에 입단해 125경기에서 21홈런을 때려냈다. 이후 숱한 고졸 루키들이 KBO리그 무대를 밟았지만 데뷔 첫해 김재현보다 더 많은 홈런을 기록한 이는 없었다.

24년 묵은 기록은 2018년 강백호(19·KT 위즈)의 손에서 다시 쓰였다. 보는 이들마다 감탄하는 타격 매커니즘에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세를 치를 만큼 확실한 스타성, 우리나이로 약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배짱까지…. 강백호는 KBO리그의 어엿한 스토리 메이커다.

리그 전체를 ‘강백호 신드롬’에 빠뜨렸던 그는 과연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을까. 그리 길지 않은 강백호의 역사를 기록한 가족은 ‘사관’이다. 특히 아버지는 강백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제격이었다. 추석 연휴를 눈앞에 둔 19일, 강백호의 아버지 강창열(59) 씨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만났다.


● 팔삭둥이 강백호, 야구는 운명이었다

강창열 씨는 KT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야구장을 찾는다. 딱히 응원하는 팀이 없던 그는 이제 KT 홈경기가 있을 때면 매일 같이 경기장을 찾는 열성팬이 됐다. 운영하는 치킨집이 있는 김포에서 수원까지 왕복 120㎞를 왕복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그의 야구사랑은 지금의 강백호를 만든 작은 불씨였다.

사업을 하는 강 씨는 주말마다 시간을 내 사회인야구를 즐겼다. 강백호가 태어나기 전부터 ‘백호 팀’이라고 이름 지은 팀을 운영했다. 그러던 중 아들이 태어났다. 출산 예정일보다 한 달 이상 먼저 태어난 팔삭둥이였다. 일곱달 때부터 출산 징후가 보여 어머니 정연주(55) 씨가 이를 지연시키는 약까지 복용했을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강백호가 태어났을 때 체중은 3.4㎏. 강창열 씨는 “열 달을 다 채웠다면 우량아가 나왔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3남1녀 중 차남인 강창열 씨 가족의 유일한 아들. 신화 속 백호에서 이름을 딴 배경이다. 아들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강백호가 태어난지 6개월 만에 야구장에 데리고 갔다. 기저귀를 찬 강백호를 유모차에 앉히고 젖병을 물리며 야구장을 찾았다. 강창열 씨가 타석에 들어서거나 수비할 때면 팀 동료들이 강백호를 챙겼다. “백호는 야구인이 키웠다”는 아버지의 설명이다.

부모님이 사업을 한 탓에 아들을 돌봐줄 이가 없었다. 결국 강백호는 초등학교 입학 직후부터 학원 9곳을 다녔다. 바둑, 수영, 플루트, 검도, 태권도 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단 하루도 ‘땡땡이’ 친 적은 없었다. 수영은 3개월 만에 영법을 전부 익히며 수영 선수 제안을 받았을 정도다. 아버지는 “야구를 시작하기 전 백호는 반 석차 1~2등을 오갔다. 공부머리도 제법 있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를 따라간 야구장에서 공을 만지고 놀던 강백호는 성남고 박성균 감독의 눈에 띄었다. 박 감독은 도신초 채수병 감독에게 백호를 소개했고, 강창열 씨와 강백호 모두 선뜻 야구부 입단을 결정했다. 갓난아기 때부터 야구에 익숙했기에 주저함은 없었다.

야구단 입단 첫해인 2학년 때부터 주전 2루수로 발돋움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홈런을 쳤고, 무사만루에서 고의4구를 얻는 ‘천재’ 강백호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강백호가 야구를 막 시작한 8세 시절 모습. 사진제공|강창열 씨


● ‘천재’는 헌신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강백호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은 단연 가족이었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강창열 씨는 가게 옆에 그물을 쳐놓았다. 아들이 귀가 후에도 훈련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배트를 돌리게 만든 배려였다. 타이어에 공을 매달아 10초에 10개씩 때리는 훈련도 그곳에서 진행됐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9㎞, 18㎞ 러닝도 주저하지 않았다. 강백호가 김포에서 서울 도신고까지 통학할 때는 매일 새벽 5시에 기상해 아들을 등교시킨 아버지였다.

어머니 역시 집 전체가 불에 탈 뻔한 몇 차례 위기에도 수년째 사골을 고아준다. 산삼과 1년에 한 번 구할 수 있다는 말뼈도 아마추어 시절 강백호의 주 메뉴였다.

든든한 지원이 가끔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진 않을까. 강백호는 7월 열린 2018올스타전에서 투수로 깜짝 등판했다. ‘한국판 오타니’라는 별명답게 이용규와 오지환을 삼진처리하며 팬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강백호는 전반기까지 16개의 홈런을 폭발했다. 김재현의 기록을 넘기까지 6개의 홈런이 더 필요했던 상황. 부담감을 느끼지 않냐는 질문에 “부모님이 홈런 때마다 ‘신기록까지 몇 개 남았다’고 압박을 준다. 그 덕에 오히려 야구장 안에서 홀가분할 수 있다”고 너스레 섞인 답을 내놓았다.

부모님의 원칙은 단 하나, ‘잘 했을 때 압박하기’였다. 아버지는 “백호는 ‘잘 한다, 잘 한다’하면 정말 잘 하는 스타일이다. 칭찬에 춤추는 고래라고 생각하면 된다. 백호의 동기부여를 자극하는 방식이다. 단, 백호가 부진했을 때는 어떤 질책이나 부담을 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KT 강백호(왼쪽)와 아버지 강창열 씨. 수원|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아들과 딸 1인2역

인터뷰를 진행한 날, 강백호는 기자에게 염려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 기사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기사 내용으로 인해 아버지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강백호는 팬들의 비난에도 언제나 의연하만 공인이 아닌 아버지가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볼까 염려했다.

강창열 씨는 강백호를 ‘아들과 딸, 1인2역’이라고 표현했다. “야구장 안에서는 정말 듬직하지 않나. 집에서도 그렇다. 밖에서 있었던 일이나 고민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학생 때도 학교에서 있던 일을 백호 동기의 부모님에게 전해 들었을 정도다. 고민은 티내지 않는 대신 애정표현은 확실하다. 내가 가게 운영 때문에 집을 비우니 아내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백호는 귀가하면 엄마에게 달려간다. 살가운 말 한마디나 마사지 등은 일상이다. 듬직한 아들 같으면서도 애교 많은 딸 같은 아이다.”

강백호의 인성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 각종 용품업체는 아마추어 때부터 강백호에게 장비를 제공했다. 하지만 강백호는 사정이 어려운 팀 동료, 후배들에게 이를 전해줬다. 계산 없이 장비를 건네주다 보니 정작 본인이 경기에 사용할 도구가 없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강창열 씨가 직접 동대문의 야구용품 매장을 찾아 용품을 구매해 배달하거나, 퀵 서비스를 이용한 주문으로 급히 불을 끄곤 했다. 이러한 인성이 강백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질투나 시기로 바뀌지 않은 이유다.

KT 강백호의 아버지 강창열 씨. 수원|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미소를 잃지 않고, 팬들에게 감사를 잊지 않고”

인터뷰 도중, 강백호와 명절에 얽힌 추억이 있는지 물었다. 강창열 씨는 “추석 때는 대부분 팀 훈련 기간이었고, 설날 때도 개인 운동을 했다. 딱히 친척집을 가거나 하진 못했다. 올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강창열 씨는 ‘꼬마’ 강백호를 품 안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야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해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제주도와 부산을 거쳐 동해안을 쭉 도는 열흘짜리 국내 캠핑 투어도 성공했다. 아들에게 야구를 권유한 것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지만, 함께 한 시간이 조금씩 줄어든 것은 아쉽다는 아버지였다.

품안의 자식이었던 강백호는 이제 어엿한 스타다. 그를 지켜보는 아버지는 오히려 더 걱정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힘든 시기일 것이다. 관심의 대상이 됐다. 몇 차례 슬럼프 때는 인신공격성 댓글도 달렸다. 물론 관심에서 나오는 반응이지만, 당사자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또 팀이 최하위로 떨어졌다. 백호 역시 이에 책임감을 느낀다.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럼에도 팬이나 가족 앞에서는 해맑게 웃는다. 오히려 더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들에게 바라는 점을 물었다. 한참 고민한 아버지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건강한 게 최우선이다. 앞으로도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는 게 그 다음 바람이다. 마지막은 팬 서비스다. 백호가 국가대표를 하고, 홈런왕에 오른다면 좋겠지만 그보다 ‘팬에게 감사할 줄 아는 선수’가 되는 걸 더 바란다. 야구선수는 팬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없다. 다행히 백호도 이를 알고 있다. 백호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아들에게 사인 요청하는 장면을 먼발치에서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때 느낀 뭉클함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수원|최익래 기자 ing1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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