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바로가기

기사 상세

문화

해리 포터와 노팅힐의 도시-런던의 숨은 보물, 햄프스테드

입력 : 
2018-09-20 10:51:48

글자크기 설정

얼마 전 다이앤 키튼과 브렌던 글리슨이 주연한 영화 『햄프스테드Hampstead』를 보면서 예쁜 골목과 넓은 공원이 있는 영국 런던의 햄프스테드가 궁금해졌다. 마침 런던 여행 일정이 있어 햄프스테드를 둘러볼 수 있었다. 예술과 문학의 흔적이 짙은 그 곳, 숨통이 트이는 커다란 공원 햄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가 있는 그곳, 햄프스테드에 단 하루 만에 푹 빠져 버렸다.

사진설명
▶그레이트 브리튼, 런던 햄프스테드 색색의 파스텔톤 집들이 붙어 있는 노팅힐의 포토벨로 로드나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에 에너제틱한 그래피티가 가득한 브릭 레인, 레이스 담장으로 꾸민 하얀 집들이 줄을 잇는 얼스 코트 등 런던에는 개성 있는 동네가 많다. 런더너에게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여행자로 런던에 도착한 이들은 부러움의 탄성만 연발하게 된다.

산업 혁명의 중심 국가로 19세기를 거쳐 21세기를 살고 있음에도 도심 곳곳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그레이트 브리튼’의 시대를 일깨우는 역사적 건축물들, 세계적인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하다.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슨, 오스카 와일드가 다니던 식당과 서점이 그 발걸음을 기리고, 이제는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의 막대기를 들고 전 세계를 마법의 세계로 유인하고 있다. 버버리 상표의 트렌치코트, 포트넘 앤 메이슨의 찻잔, 해롯백화점의 테디베어에 이어 이제는 화력 발전소를 리뉴얼해 만든 테이트 모던과 V&A에서 예술적 경험을 판매한다.

‘런던이 지겨운 사람은 인생이 지겨운 사람’이라던 새뮤얼 존슨의 말처럼, 런던은 다녀도 다녀도 역사와 문학의 스토리가 넘쳐 난다. 영화 『햄프스테드』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런던의 가 볼 만한 곳 리스트 중 57번째 쯤에 끼여 평생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곳이다. 정작 가 보니 이 영화의 감독인 조엘 홉킨스에게 어찌나 고마운지.

햄프스테드는 런던 코번트 가든에서 북쪽으로 6km쯤 떨어져 있다. 지하철 노던 라인이나 자동차로 30분 이내에 도심 진입이 가능하고, 큰 공원이 있어서 런던에서도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부자 동네다. 오래 전부터 시인 존 키츠를 비롯해 문인과 예술가가 많이 살았고, 지금도 가수 스팅과 조지 마이클이 산다고 하는데, 골목마다 빈티지 숍과 아트 숍이 늘어서 예술적 감성이 철철 넘친다.

사진설명
토요일 아침의 햄프스테드는 청량하다. 햄프스테드 역에 내려 하이 스트리트를 따라 걸어 가자니 막 문을 연 카페와 빵집,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온다. 폴, 르 팽 쿼티디앵, 게일스 베이커리 등 런던에서 유명한 베이커리들이다. 빵집들 사이에 워터 스톤즈, 돈트 북스 등 서점들이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끌려 페린스 코트로 들어서니 영화에서 봤던 이탈리안 레스토랑 빌라 비앙카Villa Bianca가 나타난다. 아직 오픈 전이라 지나쳐 웃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편안한 옷차림으로 반려견을 끌고 나온 주민들이 카페 진저 앤 화이트Cafe Ginger&white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일주일 치 수다를 다 털어내고 있다. 환한 햇빛, 삼삼오오 모여서 밝은 목소리로 즐거운 사람들, 고소한 커피 향기까지. 그냥 영화의 한 장면이다.

하이 스트리트의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플라스크 워크Flask walk란 간판이 보인다. 유서 깊은 햄프스테드의 펍인 플라스크가 있는 길이다. 골목 초입에 앤티크 숍에서 내놓은 간이 판매대 위에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그릇들과 하드커버의 클래식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가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다가 화들짝 돌아 나온다. 이 골목에서도 큼직한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동네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햄프스테드가 이렇게 여유로운 첫 번째 이유는 10만여 평에 달하는 녹지인 햄프스테드 히스 덕분이다. 숲과 호수, 들판이 조화롭게 구성된 이 공원은 햄프스테드 주민뿐 아니라 런던 시민들도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반려견을 데리고 달려와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산책과 조깅, 수영과 놀이를 하는 런더너들로 주말이면 햄프스테드 히스 전체가 북적거린다.

또 하나는 동네 곳곳에 넘치는 예술의 향기. 존 키츠, T.S.엘리엇, D.H.로렌스, 조지 오웰 등 작가를 비롯해 헨리 무어, 피엣 몬드리안 같은 아티스트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또 리처드 버튼, 주디 덴치, 제러미 아이언스 등의 영화 배우와 감독인 리들리 스콧, 사진가 세실 비튼, 건축가 조지 길버트 스콧, 화상 찰스 사치, 미술사가 언스트 곰브리치 경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문화 예술계의 유명 인사가 태어나거나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영화 『노팅힐』의 촬영 장소인 이곳이 요즘 ‘제2의 노팅힐’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이번 가을, 런던에 간다면 꼭 들러 봐야 할 곳은 햄프스테드다.

사진설명
플라스크 워크를 따라 가면 햄프스테드 히스가 나온다, 숲 산책로와 잔디밭, 벌판 등이 펼쳐지는 햄프스테드 히스.
▶런더너의 초록빛 휴식처, 햄프스테드 히스 런던 북쪽 교외라고는 하나 지하철로 20분만 가면 햄프스테드 역에 닿고, 거기서 플라스크 워크를 따라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 십여 분 걸어가니 공원 입구가 나온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산책길에 긴 그늘이 드리운 공원 속으로 들어가니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처럼 밀려오고 밀려간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나온 주부, 조깅을 하는 커플들, 한쪽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팔로는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걷는 할머니, 딸과 함께 뛰다 걷다를 반복하는 중년의 남자. 공원은 꽤 커서 숲길을 따라 걷는 동안 옆길에서 툭툭 사람들이 튀어나온다. 나무의 호위가 끝나니 무릎 높이의 잡초가 가득한 벌판이 나온다. 반려견들에게 막대기를 던지며 같이 놀아 주는 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햄프스테드 히스는 햄프스테드 지역을 감싸고 있는 약 10만 평(33만578㎡) 넓이의 오래된 공원이다. 이 안에는 십여 개의 연못과 늪지, 숲, 풀밭이 있어 주말이면 런던 사람들이 와서 달리기, 수영, 공놀이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고 일광욕을 하며 쉬어 간다. 햄프스테드 히스에서 꼭 봐야 할 곳은 팔리아멘트 힐Parliament Hill과 캔우드 하우스Kenwood House 그리고 천연 수영장인 믹스드 배딩 폰드Mixed Bathing Pond.

사진설명
조깅하는 런더너들, 숲속 고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 자전거족들이 많은 팔리아멘트 힐의 풍경.
팔리아멘트 힐은 자전거를 타고, 조깅으로 헐떡거리며 언덕을 올라온 이들이 잠시 누워 쉬면서 탁 트인 런던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이들과 함께 연을 날리는 아빠들,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 결혼식 기념사진을 찍는 커플 등 많은 이가 팔리아멘트 힐을 다양하게 즐긴다. 이곳의 백미는 벤치에 앉거나 잔디 위에 누워 런던을 파노라마 앵글로 관람하는 것. 런던에서 가장 높은 더 샤드The Shard, 원 캐나다 스퀘어One Canada Square, 헤론 타워Heron Tower, 비티 타워BT Tower, ‘거킨(Gherkin)’이란 별명을 가진 30 세인트 메리 엑스30 St.Mary Axe 등이 멀리 빌딩 능선을 이룬 모습이 보인다. 영화 『노팅힐』에 등장했던 캔우드 하우스는 18세기에 커다란 도서관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물로, 파스텔톤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기타를 치는 여인』을 비롯해 램브란트와 터너의 작품 등 월드 클래스 아트 컬렉션 등으로 관람객이 줄을 잇는 곳이다. 잘 관리된 넓은 잔디밭과 정원도 이곳의 자랑거리.

햄프스테드 히스 안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연못이 있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믹스드 배딩 폰드다. 매일 수질을 점검하므로 언제든 누구나 연못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연 수영장이다.

사진설명
▶영화 속 그 장소, 이탈리안 레스토랑 빌라 비앙카 영화 『햄프스테드Hampstead』에서 다이앤 키튼이 점심을 먹던 이탈리안 레스토랑, 빌라 비앙카. 햄프스테드 역에서 멀지 않은 골목 안에 있다. 골목 전체가 작은 식당과 앤티크 숍, 소품 숍들로 예쁜 골목이다. 1969년부터 시작해 빌라 비앙카, 피콜라Piccola, 피터스Peter’s, 피시 카페Fish Cafe, 커피컵 햄프스테드Coffeecup Hampstead, 커피컵 머스웰 힐Coffeecup Muswell Hill 등 햄프스테드 역 인근의 식당 여러 곳을 운영하는 F&B그룹이다. 그중 대장은 빌라 비앙카.

12시가 되자 카리스마 넘치는 매니저의 우렁찬 인사와 함께 홀 전체가 공연이 시작된 듯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밝은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미소를 머금은 스태프들의 눈치 빠른 서비스가 맘에 든다. 1층과 2층 모두 캐주얼한 분위기에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어 편안하게 지인들과 식사할 수 있고 2층에는 피아노가 있어 즉흥 연주도 가능한 분위기다. 삼삼오오 테이블마다 서로 인사하고, 직원들과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모양새가 딱 동네 맛집이다. 송아지 요리, 랍스터, 생선 요리 등 다양한 이탈리안 메뉴가 있는데, 아침을 먹고 나와서 양이 많을까 부담스러워 아스파라거스, 토마토와 크림소스를 얹은 리코타와 시금치를 넣어 만든 라비올리 레귤러 사이즈를 주문했다. 왁자지껄 시끌벅적한 이탈리안 비스트로 분위기에 화이트 테이블크로스 위의 로맨틱한 세팅에 맘이 풀어져 게 눈 감추듯 라비올리를 먹는다.

사진설명
▶영국의 낭만 시인 존 키츠가 살던 곳, 키츠 하우스 영국의 낭만 시인으로 주옥 같은 시를 남기고 25세에 세상을 떠난 존 키츠John Keats가 살던 햄프스테드 집은 현재 키츠 하우스Keats House라는 이름으로 기념관이 돼 있다.

존 키츠는 1795년 런던에서 태어나 의사 수업을 받고 의사 보조로 일하다가 18살에 시를 쓰기 시작해서 시집 『Poems』, 『Endymion』 등을 출간하고 유명해졌다. 시 쓰기에 전념하고자 하는 키츠에게 친구인 찰스 브라운Charles Brown이 햄프스테드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같이 살자고 권했고, 그곳에서 1년 반 정도 지내면서 시를 쓰고, 2층에 살던 친구의 여동생 파니 브라운Fanny Brown과 사랑하게 되었다. 문단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열정적으로 저술 활동을 하던 키츠는 가족력인 폐결핵으로 25세에 사망했다.

낭만 시인으로 유명했던 키츠의 일생도 궁금했지만 그를 기리는 기념관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방문했다. 햄프스테드 히스에서 멀지 않은 키츠 로드에 키츠 하우스가 있다. 단아한 2층 건물에는 존 키츠의 초상화부터 자필 원고, 그의 책과 사용하던 가구들을 그 시대 스타일로 재현해 놓았다.

사진설명
키츠 하우스의 전경, 키츠 하우스의 입구, 키츠의 초상화가 있는 접견실
사진설명
보통 기념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만지지 마세요’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쓴 팻말을 만나는 게 익숙한데, 여기에는 ‘만져 보세요’ ‘앉아 보세요’라 쓰여 있다. 키츠의 얼굴을 본뜬 부조 옆에는 ‘만져 보세요’, 키츠가 앉아서 정원을 내다보던 벤치에는 ‘앉아 보세요’라고 쓰여 있는 팻말들. 키츠가 방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방의 의자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사진 속의 키츠처럼 앉아 보세요.’ 의자를 살짝 비뚤게 놓은 것은 키츠가 팔을 기대기 위해 그렇게 놓고 쓰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벽난로 위에는 읽을 책도 놓여 있다. 왼쪽 의자에 앉아 책을 들고 오른쪽 의자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본다. 마치 그 당시의 키츠처럼. 그리 앉으니 키츠가 봤을 눈높이로 나무를 내다보고, 책을 보게 된다. 초록빛이 다르고, 책 한 줄이 의미를 갖는다.

2층은 키츠의 연인 파니 브라운의 방. 그녀의 당시 복식이 전시되어 있다. 키츠와 파니처럼 젠틀멘스 해트와 타이를 매고 여성용 보닛을 써 보라고 준비해 놓은 소품이다. 지하 부엌으로 내려가는 복도에 써 놓은 키츠의 글을 읽다 보니, 의사란 직업을 버리고 시를 택해 짧지만 불꽃 같은 인생을 살다간 존 키츠의 인생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글과 사진 신혜연(헤이컴 대표, 콘텐츠 기획자)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47호 (18.10.02)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