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에코 트레일|15~16구간 역사문화] 임금이 태실을 옮겨 온 사두혈 명당

글·월간산 신준범 기자 2018. 9. 1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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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직지사와 우두령·괘방령에 얽힌 사연

이번 구간의 시작 지점은 우두령이다. 우두령은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90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해발고도 730m의 고갯마루다. 질매재라고도 하는데,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해 우두령牛頭嶺이 되었다고 한다.

[월간산]영동에서 김천으로 드는 길목에 있는 ‘영남제일문’.

우두산이란 지명도 있다. <산경표>가 발간된 1800년경에는 우두산으로 표기되어 있던 것이 대동여지도가 나온 1860년경에는 우두령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의 저자 권태화씨는 사람의 통행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산’이 ‘령’이 된 것으로 보았다.

우두령을 오르면 삼성산三聖山(985.3m)에 닿는데, 별다른 표지석이 없고 봉우리다운 맛이 약해 그냥 지나치게 된다. 삼성산을 표시하지 않은 지도도 많아, 별의미를 두지 않지만 <산경표>에도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나름 뼈대 있는 산이다. 삼성산은 인근 암자인 삼성암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직지사의 말사인 삼성암은 신라 중기에 창건되었을 정도로 유서 깊기 때문이다.

황악산은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황악산黃嶽山으로 불리는데, 높은 산임에도 바위산이 아닌, 흙산이라 흙의 의미를 담은 황黃을 써서 황악산이 되었다고 한다.

반면 권태화씨는 그의 저서에서 ‘길게 늘어진 큰 산이란 뜻의 늘뫼가 바뀌어 황악산이 된 것’이라 주장한다.

황악산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직지사다.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곧을 직直’에 ‘손가락 지指’를 써서 직지사다. 유래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선산에 신라 최초의 절집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절이 들어설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두 번째는 고려 초 능여스님이 중창할 때 자 대신 손가락으로 측량해 지었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다는 얘기다.

세 번째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마음을 직관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에 이른다)’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직지사가 지금껏 큰 절로 남을 수 있었던 건 ‘태실胎室’의 영향도 있다. 조선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태를 땅에 묻고 석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태실이다. 태를 묻은 이가 왕이 되면 태실의 대접도 달라졌다. 주변을 정비하고 석물을 더 화려한 것으로 바꾸었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른 곳에 있던 자신의 태실을 직지사 뒤편 황악산으로 옮긴 것이다.

정종은 직지사에 자신의 태실을 수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덕분에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태실은 사찰뿐 아니라, 직지사 인근 숲도 지켜줬다. 조선왕실은 태실을 묻은 산을 태봉산으로 봉한 뒤 직지사 인근 30리 일대에서 벌목과 수렵, 경작을 금했다.

정종이 직지사 황악산으로 태실을 옮긴 건 이곳이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기氣를 분출하는 이른바 ‘생기처生氣處’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직지사 황악산의 정종 태실 자리는 풍수의 길지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형상의 머리 부분인 ‘사두혈蛇頭穴’ 자리였다고 한다.

[월간산]직지사 대웅전.

하지만 정종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다지 덕을 본 건 아닌 것 같지만, 상왕이 되어 19년 동안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며 유유자적 생활하다 세상을 떠났으니 권력을 지키며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에 휘말린 것보다 더 나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정종 태실은 1928년 일제에 의해 파헤쳐져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추풍령 우회

황악산에서 북으로 가면 독특한 이름의 여시골산이다. 과거 여우가 많았다 하여 유래하는데, 혹자는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여시’는 우리말의 ‘옅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시골산은 ‘물이 깊지 않은 골짜기가 있는 산’이란 것.

괘방령은 옛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수험생들이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우회하던 고개라고 한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괘방掛榜은 ‘방을 써서 붙인다’는 의미인데, 과거에서 급제한다는 뜻이기에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추측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掛榜이든 卦方이든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궤방’으로 적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괘방령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이기도 하다. 박이룡(1533~1595) 장군은 황해도에서 순찰사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1,5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곳 괘방령을 근거지로 삼아 김천, 지례, 개령, 선산 등지에서 여러 번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괘방령을 지나면 장군봉을 만나는데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장군張君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인근 마을에 장씨 성을 가진 총각들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어 만나는 눌의산은 ‘어눌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최근에는 ‘눌의’의 또 다른 의미로 더디다는 뜻이 있어, 이곳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경상도의 양쪽 인정의 교류가 뜸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지명이 그렇듯 정확한 풀이는 알기 어렵다.

황악산에서 김천시내로 가는 4번 국도에는 ‘嶺南第一門영남제일문’이라 적힌 김천을 상징하는 관문이 있다. 과거 김천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곳이었다. 상업은 대구, 평양, 전주, 강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5대 시장으로 꼽혔을 정도다. 그러나 근대화되면서 교통 발달로 현대에 들어서는 ‘지나치는 곳’이 되었다. 열차나 고속도로를 타고 지나며 창밖으로 보는 곳, 직지사가 있는 곳, 포도와 복숭아가 유명한 지방 소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백두대간을 타는 등산인들에게는 영남과 중부지방을 잇는 유일한 대간 줄기, ‘영남제일문’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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