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루페·1만4800원

“난 우리 엄마를 ‘슬럿 셰이밍’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너도 우리 엄마가 제법 ‘걸레’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해……”

페이지를 넘기다 어느덧 이 대목을 발견할 때쯤이면 읽는 당신의 목이 메어올 것이다. <비바, 제인>에는 겹겹의 인생이 펼쳐진다. 청춘은 불패이며 인생은 길다, 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미국 마이애미에서 정치인을 꿈꾸며, ‘당연히’ 스페인어와 정치학을 열심히 공부하던 여학생은, 선택을 요구하는 인생의 ‘끝없는 게임’ 속에서 실패한 선택을 거듭한 나머지 가장 절망적인 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마이애미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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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유명 정치인의 인턴으로서, 그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발각돼 수없이 “슬럿(slut)”으로 호명되던 아비바 그로스먼의 이야기다. 그녀는 블로그를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생활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걸레’라는 낙인이 찍힌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더욱 잘나갔을 남성 정치인이 가엾다고. 그 실수만 아니었어도. 그러나 그는 재선에 거듭 성공하며 마이애미에 살아남고, 그녀는 실종되어버린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어지지 않은 채로.

소설은 그 ‘아비바’의 엄마를 초점 화자로 두고 시작한다. 그리고 정체 모를 싱글맘, 그녀의 딸,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정치인의 아내, 다시 아비바로 시점을 옮겨 이야기를 펼쳐낸다. 일상은 주로 유쾌하고, 가끔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오며,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고 어느덧 직면한 뼈저린 절망의 나날들 속에서도 농담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 인생이 대개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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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작가 개브리얼 제빈. 루페 제공
의 작가 개브리얼 제빈. 루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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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혀 있는 시간의 틈새에서 오가는 다섯 명의 화자들은 각자에게 당면한 일상을 덤덤하게 이야기해내는데, 소설을 거의 다 읽었을 때쯤이면 이 시간의 주름이 어떤 필연적인 까닭으로 발생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독자에게 도래하는 것은 아마도 ‘용기’일 것이다.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젊음은 언제라도 다시 시작된다는 용기.

미국 정치인뿐만 아니라 누구나의 인생에는 2막이 있다.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었던 그것―정치든 무엇이든―을 주저함 없이 다시 바라보게 하고, 자신을 조롱했던 사람들 앞에서 다시 자신을 어필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한가? 소설은 묻는다. 놀랍게도 그것은 가능하다. 우리 인생이 ‘끝없는 게임’에 불과하고 언젠가는 ‘끝’을 보고 말았다면, 다시 몇 발자국 되돌아가 선택지를 다른 것으로 골라도 되니까.

소설가 박민정
소설가 박민정

물론 세상은 한 번 찍은 낙인을 쉬이 거두지 않고, 소문은 다시금 재생된다. 오래전 실패한 연애를 피해 세상 끝까지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종점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만난 연인이 다시 그 연애를 들먹이며 당신을 비난한다면 절망감이 사무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놀랍게도 또 새로운 인생을 허락한다. 나 자신 외에는 모두가 비정한 세상에서 내가 나의 이름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 소설은 허상과 같은 용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인간은 결코 소문만으로 주저앉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복합적인 존재이며 인생은 중층적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강하고 환하게 밝혀 보여준다.

박민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