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빈 "죄 많은 소녀는 저에게 온 마지막 기회였죠"

양유창 2018. 9. 1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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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괴물신인 전여빈 인터뷰.. "아무도 안 쳐주지만 제 데뷔작은 뮤지컬"
배우 전여빈 / 사진=양유창 기자

영화 '죄 많은 소녀'(13일 개봉)의 영희는 시한폭탄 같다. 같은 반 친구의 실종 이후 자신을 의심하는 따가운 눈총 속에서 보호막을 치며 감정을 쌓아놓다가 어느 순간 터뜨린다. 절망과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위태롭게 버텨가는 이 어려운 배역을 몸으로 체화해 연기한 배우는 장편영화 주연이 처음인 배우 전여빈(29)이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드라마 '구해줘' '라이브' 등을 통해 얼굴을 알려온 그녀는 영화 '죄 많은 소녀'를 통해 그전까지와 전혀 다른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이 놀라운 연기를 미리 알아보고 전여빈에게 올해의 배우상을 주었고, 올 연말 각종 영화상 시상식에서도 신인 여자배우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지난 1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전여빈은 영화 속 영희와 달리 밝고 꾸밈없는 모습이었다. 솔직하고 다혈질적인 면은 영희와 닮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처음 오디션을 볼 땐 고등학생 역을 맡기엔 나이가 많아 고민이었지만 나중엔 나이를 잊고 역할에 빠져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영희의 깊은 고통을 떠올릴 땐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고, 최근 주목받는 여성 신인 배우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말에는 해맑게 웃어보이기도 했다. 신인답지 않은 신인, 전여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죄 많은 소녀`의 전여빈 / 사진제공=국외자들

-2016년 겨울에 촬영했으니 2년 만의 개봉이네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아요.

▷이제 비로소 영화를 정리하는 기분이에요. 2016년 가을에 있었던 오디션부터 촬영,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지금 개봉하는 것까지 연속된 하나의 과정으로 느껴져요. 김의석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다 같이 애쓰면서 만든 영화인데 개봉할 수 있어 감사해요.

-'죄 많은 소녀' 영희는 쉽지 않은 배역이에요. 남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싸워야 하잖아요. 어떻게 준비했어요?

▷매 장면이 도전의 연속이었어요. 어떤 일이 월요일에 벌어진다면 화요일, 수요일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이 달라지잖아요. 다른 사건과 맞물리면 또 다른 파장이 생기고요. 감정들을 계속 쌓아나가면서 발버둥 쳐야 했어요. 현장에서 일부러 고립돼 있으면서 감정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어떤 장면이 가장 힘들었나요?

▷모든 장면이 다 힘들었지만 하나를 꼽자면 영화 후반부에 경민 엄마를 찾아가는 장면이에요. 원망의 대상은 사실 경민 엄마가 아니라 세상 혹은 인간에 대한 환멸일 텐데 영희는 그걸 경민 엄마로 상정하는 거죠. 그런데 경민 엄마도 알고 보면 되게 불쌍한 인물이잖아요. 하지만 저는 영희로서 더 치달아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마음이 많이 무너졌던 기억이 나요.

배우 전여빈 / 사진=양유창 기자

촬영 당시를 회상하는 전여빈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혔다. 영화 '죄 많은 소녀'에서 서영화 배우가 연기한 경민 엄마는 딸이 실종된 이후 집착적으로 영희를 추궁한다. 영희가 아무리 아니라고 발버둥 쳐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는 스크린에 영희와 경민 엄마가 함께 등장하기만 해도 공포스러울 만큼 긴장감이 감돈다. 영화는 그 긴장감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는 최근 한국 영화 중 가장 파격적이다.

-아직도 영희의 감정이 남아 있나요?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젠 내장기관처럼 몸 안에 새겨진 것 같아요. 영희라는 기억이 몸 한구석에 있어요. 언론시사회 때 영화를 한 번 더 봤는데 많이 아프더라고요.

-촬영이 끝나고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어요?

▷영화 찍는 도중에는 악몽을 자주 꿨어요. 영화에 경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 모습이 꿈에도 나타났어요. 처음엔 많이 놀랐는데 나중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다행히 동료들이 큰 도움이 돼줬어요. 서영화 선배님과도 연락하고, 감독님과도 계속 말을 하면서 이겨냈어요. 덩그러니 남겨진 슬픔은 아니었어요. 만약 혼자 감당해야 했다면 엄청 힘들었을 것 같아요.

-'여배우는 오늘도'의 신인배우 이서영, '여자들'의 자유로운 여빈, 드라마 '구해줘'의 홍소린 기자 등 그동안 맡아온 배역은 사실 '죄 많은 소녀'만큼 무겁지는 않았어요. 실제 성격은 어때요?

▷저는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에요. 기쁠 땐 기뻐하고 슬플 땐 슬퍼할 줄 알고요. 무엇보다 재미있는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여배우는 오늘도'의 이서영처럼 푼수기도 제 안의 어딘가에 있을 거고요. 사실 저희 가족이 전부 다혈질이에요(웃음). 태생적으로 뜨거운 편이에요. 미지근하지 않아요. 최대한 긍정적이려고 하고요. 감정 표현에 솔직하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이게 좋은 성격인지는 잘 모르겠네요(웃음).

배우 전여빈 / 사진=양유창 기자

-데뷔작은 2014년 '간신'의 중전 관상 역할이더라고요?

▷포털에 찾아보면 그렇게 나오긴 하는데 제 마음속 데뷔작은 따로 있어요. 제가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1세 때였거든요. 대학(동덕여대 방송연예과) 시절인 2009년 '루나틱'이라는 뮤지컬에 출연한 적 있어요. 선배님들 사이에서 치매 앓는 할머니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 무대 위에 선 것이 배우로서 강렬한 기억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무도 안 쳐주긴 하지만, 그 작품을 데뷔작으로 생각해요.

연기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나 전여빈의 첫 번째 꿈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눈물을 쏟으면서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진로를 바꿨다. 대학 진학 이후엔 뮤지컬 스태프, 연극 스태프로 일하다가 더 늦기 전에 배우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독립영화와 단편영화의 문을 두드렸다. 기업 광고와 윤종신, 이승환, 지코 등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2017년 SK텔레콤 광고에 출연한 전여빈 / 광고영상 캡처

-그렇게 치면 꽤 오랫동안 배우로 살아온 셈이네요.

▷사실 '죄 많은 소녀'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 어쩌면 이 영화가 (배우로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른이 되기 전까지 잘 안 되면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을 너무 좋아해 포기할 용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도 사람으로서 밥벌이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접어야 할 수도 있다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행복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젠 '죄 많은 소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어요.

▷이 영화가 연기자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큰 동력이 돼주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사실 배우를 하겠다고 오랫동안 기다려왔기 때문에 지금 아주 큰 감흥이 있지는 않아요. 지나갈 일 중 하나겠지라는 생각이 더 커요. 지금을 잘 보내고, 다음 작품을 잘 만나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계속 나아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죄 많은 소녀'를 찍은 것도 벌써 2년이 다 돼가는 걸요. 과거 일로 지금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영광이 며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각오를 다지게 돼요. 처음 마음을 잊지 말고 다시 잘해봐야겠다는 각오요.

-이제 영화가 개봉했으니 '죄 많은 소녀'로 전여빈을 처음 만나게 될 관객이 많아질 텐데 이들에게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면 좋을까요?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잖아요. 어떤 곳에서는 지금도 절망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영화는 그 아픔과 절망을 보여주는 영화예요.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약한 인간들이 완전한 선인도 악인도 없는 세상에서 발버둥 치는 이야기예요. 그 고통과 절망을 있는 그대로 봐주시면 좋겠어요.

배우 전여빈 / 사진=양유창 기자

-'죄 많은 소녀'는 여성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죠. 최근 충무로에서 연기력을 갖춘 신인 여배우가 많이 탄생하고 있고 전여빈 배우도 그중 한 분이예요.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남성 위주였던 영화계도 조금씩 바뀌는 듯한데 신인 배우로서 어떤 기대가 있나요?

▷사실 독립영화 진영에선 최근 여성 배우가 주축을 이루는 영화가 많아졌고 반응도 좋아요. 이야깃거리가 많으니 보는 재미도 풍요롭고요. 이런 경향이 상업영화로 옮겨가면 좋겠어요. 이야깃거리는 다양할수록 좋으니까요.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신인 배우로서 정말 기대가 커요.

[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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