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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역사의 섬' 강화 교동도

송고시간2018-09-0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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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곳에서 상전벽해의 현장으로

(강화=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유구한 역사의 페이지를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

세계유산이 된 고인돌과 '시조' 단군이 쌓았다는 마니산 참성단이 남아 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몽골의 침입기에는 수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왕과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던 이 섬은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시작되는 출발점(강화도조약)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북한 땅을 바로 마주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여망이 공존하는 곳으로 주목받는다. 강화도가 품은 '섬 안의 섬' 교동도에서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봤다.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 [사진/조보희 기자]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 [사진/조보희 기자]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48번 국도를 따라 강화도의 서쪽 끝으로 향했다. 교동대교를 건너기 전 해병대 2사단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북한 땅이 맨눈으로 건너다보이는 이곳은 여전히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이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8월의 여름날 해무와 아지랑이가 뒤섞여 눈앞이 뿌옇게 흐리긴 해도 북한 땅은 손에 잡힐 듯 코앞이었다.

교동대교를 건너 닿은 교동도는 섬 같지 않은 섬이기도 했다. 고려 말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강화도에서는 많은 이주민을 먹이기 위해 간척 사업이 벌어졌다. 강화도는 꼬불꼬불한 해안선이 메워졌고, 교동도는 주변의 작은 섬과 하나가 되면서 기반암보다 훨씬 넓은 평야를 갖게 됐다.

2014년 강화도와 묶는 다리가 생기면서 생기를 잃은 포구 대신, 벼가 자라는 드넓은 논과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대규모 인공 저수지가 교동도를 '섬 같지 않은 섬 안의 섬'으로 각인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자 초상을 모신 교동향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자 초상을 모신 교동향교

◇ 최초로 공자 초상 모신 교동향교

드넓은 논과 저수지를 지나면 닿는 교동도 동쪽 화개산 아래의 교동향교(시도유형문화재 제28호).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지어졌다. 교동향교는 향교 중의 으뜸이라는 뜻의 '수묘'(首廟)로 꼽힌다.

서해 고도(孤島)의 향교가 수묘로 꼽히는 이유는 이 땅에서 공자상을 처음 모신 곳이기 때문이라 한다. 어찌 된 사연일까.

고려의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은 국제적인 무역도시였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그 관문이었다. 교동도는 벽란도로 가는 상인과 사신이 탄 배가 물때를 맞추기 위해 기다리던 기착지였다. 충렬왕 12년(1286년) 원나라에 간 안유(안향, 1243∼1306)가 공자의 초상을 가져왔다. 배를 타고 개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교동도에서 물때를 기다리는데 공자의 초상을 아무 데나 둘 수 없어 교동향교에 모셨다고 이순희 문화유산해설사는 설명했다.

사당이나 무덤, 관아 등의 정문 역할을 하는 홍살문 오른쪽으로 하마비(下馬碑)가 남아있다. 말에서 내려 예의를 지키라는 뜻이다. 감나무와 코스모스가 양쪽으로 늘어선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깥문인 외삼문이 나타난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는 유학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의 서재는 양반 자제들이, 오른쪽의 동재는 평민이나 중인 자제들이 숙식하며 공부하는 기숙사다.

대성전

대성전

명륜당 뒤 내삼문을 거쳐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대성전이 있다. 공자를 위패와 화상을 봉안한 사당인 문묘(文廟)다. 공자 외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4성과 주자(주희), 정호 등 송조(宋朝) 2현 그리고 설총부터 최치원, 정몽주, 김굉필, 안유, 이이, 이황 등 동국(東國)의 성현 18인 위패도 함께 있다.

그 아래 동무와 서무는 선현을 배향(配享)했던 곳으로, 현재는 강의 공간으로 쓰인다. 원래 화개산 북쪽에 있던 교동향교는 조선 영조 17년(1741년) 현재 자리인 화개산 남쪽으로 옮겨왔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 이념 보급을 위해 향교를 전국적으로 확대 설치하면서 토지와 노비, 책까지 지원했다. 서민 백성의 삶보다는 풍족했을 터. 향교의 굴뚝이 지붕이 아닌 허리 높이 아래 낮은 곳에 있는 것은 잘 먹지 못하는 서민의 위화감이나 박탈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낮은 곳에 만들어진 굴뚝이 눈길을 끈다.

낮은 곳에 만들어진 굴뚝이 눈길을 끈다.

◇ 목은 이색이 책 읽던 화개사

향교를 나와 화개산 기슭으로 올라가면 화개사가 있다. 20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선 고적한 사찰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푸드덕' '퍽' 하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사람보다 더 놀란 고라니 한 마리가 산기슭에서 미끄러져 임도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헐레벌떡 도망간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다른 부속 건물도 없이 최근에 덧붙여 지은 듯한 살림집이 딸린 작은 법당 건물 하나가 축대 위에 홀로 올라앉아 있다. 법당 앞마당에 서니 남쪽으로 석모도가 보인다.

이 작고 적막한 사찰에 이야기를 더해주는 것은 고려 말 문신이자 정치가인 목은 이색(1328∼1396)이다. 화재로 모든 것이 불에 타는 바람에 고려 때 창건됐다는 것 말고는 다른 역사를 알 수 없는 이 사찰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곳이라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화개사가 자리 잡은 화개산(259m)은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황해도의 연백평야와 예성강 하구, 개성의 송악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서해와 석모도가 보이는 이 산을 이색은 전국의 8대 명산으로 꼽았다 한다.

화개사

화개사

◇ 왕족들의 유배지

강화와 교동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 년 동안 왕족들의 유배지였다. 서울과 가까운 섬이기에 감시와 격리가 쉬웠기 때문이다. 고려의 희종과 강종, 충정왕, 우왕, 창왕이, 조선의 광해군, 안평대군, 영창대군,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이 이곳에 유배됐다.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하는 사화(士禍)를 일으키며 폭정을 일삼던 조선 10대 왕 연산군(1476∼1506)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된 곳도 바로 교동도다.

당시 백성들이 가시 울타리 안에 갇힌 연산군을 조롱하며 불렀던 노래가 연산군일기에 전한다.

"충성은 거짓(詐謀)이요/ 거동은 교동일세/ 일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 끝 뉘 따라가는고/ 두어라, 예 또한 각시집이니/ 날 새우기 무방하고 조용도 하네"

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 사모(紗帽)를 남을 속여넘기는 모략을 뜻하는 사모(詐謀)로 바꾸고, '가시' 울타리에 둘러싸인 것을 '각시'(婦)집으로 바꿔 주색에 빠졌던 왕을 비꼰 것이다. 연산군이 전국에서 불러 모은 기녀가 '흥청'이었다. 흥청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뜻의 '흥청망국'이 우리가 지금 흔히 쓰는 '흥청망청'의 어원이다.

연산군은 이곳에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역질에 걸려 31살의 나이에 숨졌다. 연산군의 무덤은 부인인 폐비 신씨의 청에 따라 중종 7년에 경기도 양주(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연산군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만들어진 '교동도유배문화관'에서는 이런 왕족 유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한쪽에는 탱자나무를 두른 초가집 안에 들어가 앉은 연산군과 주변을 지키는 나인, 군사 등을 모형으로 재현해 놨다.

재현해 놓은 연산군의 유배 모습

재현해 놓은 연산군의 유배 모습

◇ 흔적으로만 남은 군사 요충지

지금은 강화군에 면으로 속해 있지만, 고구려에 속했을 때 교동도는 별도의 현(고목군현)이었다. 고려 때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으로써 교역의 요지였다면,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적 중요성이 커졌다.

인조 7년(1629년)에는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현재 경기도 화성)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도로 옮기면서 교동도호부로 승격됐다. 이때 쌓은 교동읍성(시도기념물 제23호)은 둘레 870m에 동·남·북에 세 개의 성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고,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문(아치형태의 문)과 석축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해체 복원했다. 문루는 최근에서야 완성됐다.

인조 11년(1633년)에는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읍성 아래 섬 남단의 남산포에 설치됐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수군의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이 하나 남아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주민에게 물어물어 찾은 계류석은 민가의 창고 옆 구석, 쓰레기더미에 가려져 있었다.

교동읍성

교동읍성

◇ 분단의 아픔 속 피어오르는 통일의 희망

한반도가 두 동강 나기 전의 교동도와 북한 황해도 연백군(현 황해남도 연안군·배천군)은 같은 생활권이었다. 교동도에서 북한 땅과의 거리는 3㎞ 남짓, 최단 거리는 2.6㎞에 불과하다. 교동도와 황해도 사이 바다는 물이 빠지면 모래톱이 드러난다.

이 해설사는 "고무 대야 하나를 타고 건너올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몇 년 전까지 북한 주민들이 맨몸이나 통나무를 붙잡고 헤엄쳐 건너와 귀순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황해도 주민 3만여 명이 잠시 피난 왔다가 한강 하구가 가로막히면서 실향민이 됐다. 이들은 고향 땅과 그곳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섬 서쪽 북단 율두산 아래에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이곳 망향대에서는 맨눈으로도 발아래 논과 철책선, 바다 건너 북한 땅이 보인다. 설치된 망원경에 눈을 대니 북한 땅이 불쑥 다가오고, 해안을 걷는 북한 주민 한 명도 눈에 들어왔다.

대룡시장 골목

대룡시장 골목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시장은 북한 이주민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고향에 있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곳이다. 100명 남짓 남은 실향민들은 여전히 대룡시장 인근에 모여 산다. 대룡시장은 50여 년 동안 교동도의 경제 중심이었으나 교동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쇠락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크게 줄었다.

교동대교 개통 이후 1960∼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새 단장을 했다. 골목 곳곳에 향수를 자극하는 벽화가 그려졌고,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대룡시장 옆 관광 안내소인 교동 제비집은 첨단 ICT(정보통신기술) 시설을 갖추고 관광객을 맞는다. 민관이 함께 추진하는 '평화와 통일의 섬 교동도' 프로젝트의 하나로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다.

터치스크린이나 360도 가상현실(VR) 영상을 통해 교동도 구석구석을 찾아볼 수 있고, CCTV에 녹화된 황해도 지역 모습을 560인치 초대형 화면으로 볼 수 있다. 교동도와 북한의 연백평야를 잇는 가상의 다리를 만들거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들어간 교동신문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자전거 대여와 지역 농특산품 판매도 하고 있다.

'시간이 멈춘 곳'이었던 교동도의 변신은 계속된다. 섬을 한 바퀴 도는 평화자전거길이 만들어진 데 이어 화개산~고구 저수지~서한 습지를 잇는 관광 코스가 개발되고 있다.

교동 제비집

교동 제비집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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