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95주년,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는 세 가지 방식 [김진우의 도쿄리포트]

도쿄|김진우 특파원 2018. 9. 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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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본 간토대지진 95주년인 지난 1일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 내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95주년인 지난 1일 도쿄(東京) 스미다(墨田)구 도립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선 3가지의 ‘추도 행사’가 열렸다.

요코아미초 공원은 대지진 당시 피난민들이 화염 돌풍에 휩싸여 3만8000명이 희생된 곳이다. 공원 안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도쿄도 위령당(慰靈堂)과 함께 학살당한 조선인을 추도하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방화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무고한 재일조선인이 일본인 자경단, 경찰, 군인 등에 의해 학살됐다.

이날 오전 11시 추도비 앞에선 일·조(日·朝)협회 등 일본 시민단체들이 주관한 추도식이 열렸다. 1973년 추도비가 세워진 뒤 매년 진행되고 있는 행사다. 추도식에선 각계에서 보내 온 추도문 낭독과 함께 희생자를 위로하는 독경(讀經)과 진혼무가 펼쳐졌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는 지난해에 이어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앞서 고이케 지사는 “지사로서 모든 희생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며 “개별적인 형태로 추도문을 보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조선인 학살 사실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역대 지사는 매년 추도문을 보냈고, 고이케 지사도 취임 첫해인 2016년 추도문을 보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입장을 바꿨다. 추도비에 적힌 ‘희생자수 6000여명’을 문제삼은 우익 인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미야카와 야쓰히코(宮川泰彦) 추도식 실행위원장은 “고이케 지사는 과거의 비참한 역사를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라며 “역사적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날 추도식에서도 학살의 역사를 지우려는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조선인 학살 국가 책임을 묻는 모임’ 다나카 마사타카(田中正敬)사무국장은 보내 온 추도문에서 “일본은 95년 전의 배외의식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도 여러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며 “가해의 역사를 두 번 다시 반복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가메이도(龜戶)사건추도회실행위원회의 에노모토 기쿠지 부위원장은 “재해로 사망한 이들과 학살당한 이들을 한꺼번에 다루는 것은 허용될 일이냐”라고 지적했다.

각계에서 보내온 추도 메시지도 소개됐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역사를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시아 이웃 친구와의 공생사회 실현에 사명감을 보이는 것이 전후 일본의 원점”이라고 밝혔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도 “역사의 사실을 확실히 마주보고 평화로운 사회를 목표로 하겠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는 기억돼야 할 잔혹한 역사의 진실을 규명, 추도하는 것에 전력을 다하고, 일본 정부가 진실에 눈을 뜰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행사가 끝난 뒤 추도비 앞에는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700명(주최측 추산)이 참석했다. 300명 정도이던 예년은 물론, 고이케 지사가 추도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지난해 500명보다 많았다. 미야카와 위원장은 “매스컴 등을 통해 관심이 커진 것 같다”며 “이런 뜻이 식지 않도록 여러 고민을 해야겠다”고 밝혔다.

재일 무용가인 김순자 한국전통예술연구원 대표가 지난 1일 열린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무를 추고 있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앞서 추도비 인근 위령당에선 오전 10시부터 간토대지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대법회가 열렸다. 고이케 지사는 부지사가 대독한 추도사를 통해 “희생이 된 분들의 원통함과 유족의 깊은 슬품을 생각하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열린 같은 시각, 추도비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선 ‘진실의 간토대지진 이시하라(石原) 희생자 위령제’가 진행됐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적힌 ‘희생자수 6000여명’이 근거가 희박하다면서 학살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는 우익 단체가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는 행사다. 행사장에는 ‘조선인 수 천명 학살은 날조다, 일본인의 명예를 지키자’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경찰들이 행사장 주변을 삼엄하게 통제하면서 다소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지만, 특별한 충돌은 없었다.

이날 오전 11시58분 종소리에 맞춰 요코아미초 공원을 찾은 전원이 묵념을 했다. 11시58분은 95년 전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시각이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세 가지 행사는 역사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일본의 현재를 고스란히 드러내보였다. 미야카와 위원장은 “일본인이 봐도 부끄러운 역사를 보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것”이라면서 “과거를 제대로 보고, 이를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일본인 여성이 지난 1일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추도비에 헌화한 뒤 추도비 내용을 적고 있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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