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영웅에서 6선 상원의원, 존 매케인 별세

최희진·심진용 기자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

참전영웅, 6선 상원의원, 대선 후보. 화려한 이력에 걸맞지 않게 정계의 ‘이단아(maverick)’라 불렸던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25일(현지시간) 애리조나주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지난해 7월 악성 뇌종양의 일종인 교모세포증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매케인은 1982년부터 36년간 애리조나주 상·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원칙주의자에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평가받았다. 원칙과 소신을 위해 정파를 넘나드는 그의 행보에 이단아라는 별칭이 붙었다.

매케인 의원은 1936년 8월 29일 파나마운하의 미 해군항공기지에서 해군 장교 존 매케인 주니어와 로버타 매케인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존 매케인 시니어)와 부친이 모두 해군 4성장군을 지냈다. 매케인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학창 시절 그는 역사와 문학을 좋아하지만 수학은 낙제만 간신히 면했던 전형적인 ‘문과생’이었다. 교칙에 복종하지 않았고 계급이 높은 인사들과 종종 충돌해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1958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매케인은 해군에 소위로 임관해 전투기 조종사 교육을 이수했다. 1965년 첫 번째 부인 캐럴 셰프와 결혼한 매케인은 1967년 전투 부대에 배치돼 베트남으로 파병된다. USS 포레스털 함에서 A-4 스카이호크스 조종사로 복무하던 중 134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발 사고가 함상에서 발생했다. 매케인은 간신히 생사의 고비를 넘었으나 두 달 후 하노이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비행기가 격추돼 북베트남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이 때 당했던 고문후유증으로 그는 평생 한 쪽 다리를 절게 된다.

전쟁이 진행되며 수세에 몰린 북베트남은 매케인 의원의 아버지가 통합전투사령부 태평양사령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협상용으로 석방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매케인 부자는 포로는 붙잡힌 순서대로 풀려나야 한다는 원칙과 선전용으로 이용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석방을 거부한다.

포로 생활 5년 반만인 1973년 석방된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1980년 신디 루 헨슬리와 재혼하고 1981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1982년 중간선거에서 애리조나주 제1선거구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전쟁영웅’ 매케인은 단숨에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1984년 재선에 성공했고 1986년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최근 선거까지 상원의원으로 내리 6선에 성공했다.

매케인은 총기 규제, 세제 개편 등을 두고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대립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때는 경기부양책과 오바마케어를 비판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이제 아무도 미국의 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정부를 질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도 여러 차례 충돌했다. 그의 중동정책을 비판했고, 러시아 대선개입 의혹이 불거지자 전면수사를 촉구하며 압박했다. 상원 동료 수전 콜린스 공화당 의원은 25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상원의 역할을 신봉했고,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과 맞서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소신에 따른 행보였다. 2007년 그는 양당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 병력 증파를 지지하며 “조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내가 선거에서 지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경쟁당과 협력했다. 2002년 민주당과 손잡고 정치자금법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2013년에는 초당파 의원 모임 ‘8인위원회’의 일원으로 이민법 개혁안 초안을 마련했다. 뇌종양 투병 중이던 지난해 7월 그는 생애 마지막이 된 상원 연설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날 그는 오바마케어 폐지를 위한 안건에 투표하기 위해 애리조나 병원에서 워싱턴 의사당으로 날아왔다.

매케인의 소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2008년 대선 때다. 당내 경선 후보였던 매케인은 부시 정부에 맞서 고문 반대를 강력히 주장했다.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 3분의 2가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필요하다면 고문도 해야 한다고 답하던 때였다. 뉴욕타임스는 25일 칼럼에서 그때가 “매케인이 가장 용감했던 순간”이었다고 적었다.

매케인은 두 차례 대권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2000년 대선 경선에서 부시에게, 2008년에 본선에서 오바마에게 각각 패했다. 정치 인생에서 오점도 적지 않았다. 1989년 정치자금 수수로 ‘키팅스캔들’에 휩쓸렸고, 2000년 대선 경선 때는 ‘인종주의의 상징’ 남부연합기 철거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2008년 대선 때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것은 지금도 최악의 결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그가 늘 용감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그는 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누구보다 엄격하게 자신을 비판했다”고 전했다. 키팅스캔들 이후 그는 정치자금법 개혁에 진력했다. 남부연합기 문제에 대해서도 훗날 “여론을 의식했다. 정직하지 못했다”고 했다.

매케인의 포로 이력까지 들먹이며 그를 조롱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로 “우리 마음과 기도가 당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우리는 서로 경쟁했지만, 더 높은 차원의 이상을 향한 믿음을 공유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고인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화가 한반도를 넘어 전세계에 뿌리 내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추모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Today`s HOT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지구의 날 맞아 쓰레기 줍는 봉사자들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한국에 1-0으로 패한 일본 개전 200일, 침묵시위
폭우 내린 중국 광둥성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황폐해진 칸 유니스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