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남현희 ④] 남현희에게 펜싱이란… 말하지 않은 이야기

입력:2018-08-25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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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국가대표 남현희, 이제 태극마크를 내려놓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하는 남현희가 2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신의 플뢰레 경기를 모두 마무리한 남현희는 이날 대표팀 동료들의 에페 단체전을 응원하기 위해 자카르타 컨벤션센터를 찾았다. 자카르타=윤성호 기자

남현희는 2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말미에 “그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 있다. 여자 플뢰레 개인전이 끝난 뒤 화장실에서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남현희는 16강전에서 동료 전희숙을 만나 패했다. 전희숙은 개인전 금메달을 딴 뒤 남현희에 대한 미안함을 언급했었다. 전희숙은 “단체전에서 꼭 금메달을 따 현희 언니가 7번째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갖도록 돕겠다”고 말했었다.

화장실에서 울었어요. 희숙이한테 져서 운 게 아니예요. 개인전 시작할 때, 희숙이한테 ‘우리 예선 잘 해서 1, 2등으로 찢어지자. 메달권에서 만나자’ 했어요. 저는 원래 전광판을 안 봐요. 그런데 3승을 한 뒤에 전광판으로 희한하게 희숙이 스코어가 보였는데, 희숙이가 1패를 한 거예요.

기운이 빠지고, 저도 어떡하지 하고 들어가서 싱가폴 선수에게 1패를 한 거예요. 이러다 일찍 만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이런 거 원래 계산을 하지도 않는데, 희숙이가 예선에서 4~5등을 하면 8강에서 만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좀더 가서 4강에서 만나려면 내가 한 번 더 져야 하나 싶기도 하고….


남현희는 “그런데 희숙이가 3등이었다. 너무 빨리 16강에서 만나게 됐다”고 했다.

또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다리를 찢는 게 주특기인데, 왼쪽 햄스트링이 찢어졌습니다. 선수생활을 오래 하고 찢어졌다 붙었다를 많이 하다 보니 굉장히 뭐랄까, 햄스트링이 타이트해졌어요. 희숙이랑 저랑 16강 붙었을 때 고민 많이 했어요. 이 악물고 뛰어야 하나? 희숙이를 이기려고 최대한으로 하면 햄스트링이 더 찢어질 텐데, 그러다 모레 단체전에서 내 역할을 못 하면 어쩌지?

무엇보다도 내가 만일 희숙이를 간발로 이긴다 해도, 그 다음은? 우리나라 선수는 이겨놓고 다른 나라 선수와 붙을 때 경기운영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생각 끝엔 차라리, 아픈 선수보단 안 아픈 선수가 다른 나라 선수를 상대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피스트 위의 둘은 서로의 복잡한 심정을 어렴풋이 느낀 모양이다. 남현희는 “희숙이도 마지막 아시안게임이었다”고 말했다. 남현희는 “희숙이와의 경기 초반에 내가 계속 실점하자, 희숙이가 한두 번 일부러 찔려 주는 듯했다. 마음속으로 ‘그러지마, 너답게 해’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윤성호 기자는 24일 자카르타 컨벤션센터 펜싱 훈련장에서 남현희의 사진을 촬영하던 중 ‘카메라를 찔러 보라’고 제안했다. “그래도 되느냐”던 남현희가 가볍게 칼을 뻗었다. 둘이 칼과 카메라로 서로를 겨눴다. 자카르타=이경원 기자

-그렇게 끝나고 나니 눈물이 나던가.

경기에 집중하려고 휴대폰을 껐었습니다. 희숙이한테 지고 끝난 뒤에 휴대폰을 켰어요. 메시지가 들어오는데, 주변에서 ‘넌 이미 금메달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보내 주셨어요.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그런 메시지가 계속 와요. 감동을 받아 울컥했는데, 지금까지 펜싱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어요. ‘여기가 화장실이니까, 차라리 누구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실컷 울어버리자.’ 울고 홀가분하게 단체전을 준비하는 게 동료들에게도 제가 도움이 되는 거라 생각했어요.

-남현희를 응원했던 이들께 한말씀.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펜싱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몸 상태든 환경이든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돼 은퇴 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까지 응원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 한국 펜싱이 승승장구합니다. 오히려 선수들이 부담이 큽니다. 후배들이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응원의 말씀을 건네 주시고, 더욱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은퇴를 하더라도 한국 펜싱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겠습니다. 지도자든 해설위원이든, 정해진 길은 아직 없습니다. 당분간은 쉬고 싶습니다.

-‘펜싱’할 때 남현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남현희에게 펜싱이란 무엇이었나.

펜싱은 인생이었고 희로애락이었습니다. 펜싱을 통해서, 저는 슬픈 일도 좋았던 일도 다 겪었습니다. 한 종목의 운동선수라서 한 길만 밟은 것 같지만, 저는 그 안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굿바이 남현희 完]


자카르타=이경원 기자, 사진=윤성호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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