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경감서 자리 늘리기로…‘상고법원 논리’의 허상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대한민국 판사는 누구인가 - 법관 승진제도의 명암

사건 경감서 자리 늘리기로…‘상고법원 논리’의 허상

양승태 전 대법원장, 상고법원 도입 위해 ‘재판거래’까지 한 정황
고등부장들 장악 의혹…법조계에선 ‘부장판사 제도’ 폐지 주장도
학계·판사들 “1심에서 좋은 재판해 항소·상고를 줄이는 게 해답”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판거래까지 벌이며 상고법원을 추진한 공식적인 이유는 대법원에 사건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법관 12명이 연간 4만건 가까이 처리하는 상황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법원의 사건 부담을 줄이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분모인 대법관 수를 늘리거나 분자인 사건 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은 두 가지 방법을 모두 거부했다.

우선 대법관 수를 늘리면 중요 사건을 처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합의하기가 어려워진다고 했다. 일종의 언어유희였다. 지금은 대법관 12명에 대법원장을 포함해도 13명에 불과해 이들이 모두 참여해 전원합의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이름도 전원합의체로 붙인 것이다. 대법관 수가 늘어도 이 가운데 적당한 수가 참여해 중요 사건을 결정하면 된다. 이름을 굳이 전원합의체로 유지할 필요 없이 ‘15인합의체’ 정도로 붙여서 운용하면 될 문제였다. 실제로 대법관이 수십명에서 수백명인 나라도 많다.

다음으로 사건 수를 줄이는 방법은 이유 없이 회피했다. 대법원 상고를 제한하는 상고허가제는 국민이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별다른 근거는 없었다. 학계에는 상고허가제가 올바른 방향이라는 설명이 많았다. 소송법 대가인 호문혁 서울대 법과대학 명예교수는 “법과 사법제도가 정비된 문명국가 중 재판받을 권리가 상고심에서 재판받을 권리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나라는 없다. 우리 대법원처럼 1년에 3만건이 넘는 사건에 파묻혀 있으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과감하게 상고를 제한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호 교수 같은 명망 있는 학자들을 무시하고, 사이비 학자의 이름으로 상고법원이 유일한 대안이란 식의 칼럼을 언론에 실었다.

이러한 양승태 대법원의 태도에는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 상고허가제로 사건을 줄이는 게 어렵다면 하급심을 강화해서 항소와 상고를 줄이는 근본적인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왜 추진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하급심 강화는 양승태 대법원도 부인하지 못하는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은 판사들이 이런 문제를 제기해도 검토하는 시늉만 했다. 이를 두고 “전·현직 대법관들이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상고심 사건 수를 유지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즉 하급심이 강화돼 상고심 사건이 정말로 줄어들면, 대법관 퇴임 후 전관예우로 거액을 버는 기회가 사라질 것이란 얘기다.

또 다른 의혹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상고법원을 밀어붙인 이유가 ‘고등법원 부장판사들과 이들의 판결을 장악하기 위해’라는 것이다. 대법관은 증원이 되더라도 대법원장에게 그렇게 큰 힘을 주지는 못한다.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제청해도 국회 동의와 대통령 임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상고법원 판사는 대법원장이 임명하면 그걸로 끝이다. 게다가 대법관은 늘어봐야 10명 안팎이지만, 상고법원 판사는 120명 정도를 예정했다.

상고법원 추진은 없던 일이 됐지만 법원이 풀어야 할 과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판사들은 입을 모은다. 우선 시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위해 판사가 처리해야 할 사건을 적정수준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1~3심이 서로 뒤엉켜 있다. 가령 “1심이 어설프니 2심에 가는 것인데 2심도 일이 많다며 대충 재판한다. 그러니 사건이 3심까지 간다”는 주장이 있지만, “법률심인 3심이 부당하게 사실관계를 뒤집으니 상고가 늘고, 그러니 2심도 파기되지 않으려 1심 재판을 작은 이유로 뒤집는다”는 주장이 맞선다. 문제의 시작이 3심이든 1심이든 결국 해결방법은 1심 강화라고 판사들은 입을 모은다. “학계나 판사들 모두 해답은 1심 강화라고 본다. 1심에서 좋은 재판을 해서 항소와 상고를 줄여야 한다. 상고법원에 판사들이 동의하지 못한 이유는 3심 판사를 늘려 사건 증가에 대응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는 사건은 더 늘어나고 재판은 더 부실화할 우려가 있었다.”

이와 함께 남겨진 과제가 승진제도를 이용해 대법원장이 법관을 통제하는 문제다. 판사들은 승진을 이용한 법관 통제가 판결 내용을 바꾸는 것은 물론 처리 건수에 집착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판사들이 얼마나 사건을 많이 처리했는지를 기준으로 평정을 하라고 현행 법원조직법에 정해져 있다. 이와 관련, 헌법에는 법관 승진제도가 없다. 헌법이 정한 법관은 3종류다. 판사, 대법관, 대법원장이다. 각각 새로 임명되는 것이지 승진이 아니다. 그래서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합의부 판결문에도 재판부 세 사람 이름 앞에 판사라고만 적혀 있다. 이 가운데 재판장인 판사 앞에는 재판장이라고도 적혀 있다.

그리고 법원조직법은 재판장을 부장판사가 맡게 했다. 여기서 부장판사는 직급이 아니다. 판사 세 사람 가운데 재판장 맡을 사람을 편의상 부장판사로 부르고 행정사무도 관장하게 한 것뿐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 조항을 특이하게 해석해왔다. 재판장이 되려면 대법원에서 부장판사로 발령받아야 한다고 했다. 부장판사가 역할이 아니라 신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사는 헌법위반이라는 지적이 많다. “헌법이 예정하지 않은 새로운 판사계급을 만든 것으로, 헌법위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실제로 부장판사를 계급으로 운영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에게는 공용차를 주고, 지방법원의 법원장과 수석부장도 시켜준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의 폐해를 판사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대법관은 12명에 불과해서 좀처럼 임명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요새는 재야에서도 많이 되고 있어 연수원 한 기수에 한 사람 되기도 어렵다. 이렇다 보니 대법관이 되기 위해 대법원 눈치를 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극소수 법원행정처 출신 사법관료들 얘기다. 오히려 대법원이 판사들을 쥐고 흔드는 것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이라는 미끼다.”

이런 폐해를 없애려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아예 분리하기로 했다. 지방법원에서 일할 판사와 고등법원에서 재판할 판사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방법원 법원장도 지방법원 판사들이 맡게 된다. 이를 통해 고등법원 부장판사라는 헌법에도 없는 판사계급을 없애고 대법원장 영향력도 줄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상고법원 판사까지 만들려다 실패했다.

그런데 최근 양승태 키즈로 불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이용훈 대법원은 2011년 일정 연차 판사들 가운데 희망자를 고등법원으로 아주 가게 했다. 이들이 고등법원 판사다. 고등법원 판사 세 사람이 재판부를 이루고 재판장과 부장판사도 돌아가면서 하도록 했다. 2011년 이후 고등법원 판사는 계속 늘고 새로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은 중단되면서 이른바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없는 재판부가 최근 생겼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기존 부장판사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법원조직법에 부장판사만 재판장을 하도록 정해져 있고, 그 부장판사는 역할이 아니라 신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고등법원 판사들은 재판장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주축인 이들은 사법행정권 남용에 한 번도 발언하지 않다가, 수사하면 안된다는 결의만 한 번 냈었다.

이렇게 되자 근거가 불분명한 부장판사를 없애라는 얘기가 나온다. 현재 지방법원에는 부장판사라면서 단독판사인 경우도 있는데 법원조직법이 잘못 운용되는 것을 드러내는 사례로 꼽힌다. “당초부터 위헌적인 제도이던 고등법원과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없애야 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유지하려는 것은 판사를 통제하는 상고법원 시도와 다를 바 없다”고 판사들은 지적한다.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승용차와 법원장 자리 같은 혜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지적이 많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라는 이유로 주어지던 공용차를 지방법원 법원장 같은 기관장에게 주는 것 등을 우려한다는 것이다. 일부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은 고등법원 판사들이 재판장이 되어서 한 재판은 무효이며, 기존의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그냥 고등법원 판사로 낮추는 것도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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