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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도시 그리고 영화… Jerusalem in `킹덤 오브 헤븐`…‘神과 인간이 공존하는 천국의 도시’

입력 : 
2018-08-22 14: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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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역사가 있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하든, 지극히 평범한 민초들이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 왔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역사, 도시 그리고 영화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한데 모아 본다. 인간이 이룩하고 때로는 지우고 싶었던 역사적 사실들도 하나의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도시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에는 돌 하나, 성벽, 흙과 공기에도 인류사가 켜켜이 쌓였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발원지이자 성지라는 그 태생적 의미 때문에, 수천 년간 인간은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곳에 자신만의 신을 찬양하는 깃발을 휘날리고 싶어 했다. 이 예루살렘을 짧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버전은 단연 리들리 스콧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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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

지난 5월14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한 건물이 개관식을 했다. 바로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이다. 미국 측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가 참석했다. 테이프를 커팅하고 이스라엘과 미국이 서로 손을 잡는 ‘축제의 순간’, 대사관 너머 가자지구 접경 지역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아랍인들은 “오늘은 분노의 날이다”라고 외쳤고 그들을 향해 이스라엘 군경은 강력 진압을 펼쳐 무려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 세계 각국과 언론은 비난을 퍼부었지만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국 대사관 이전이라는 지엽적인 문제에 왜 세계 여론은 들끓고, 아랍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고, 이스라엘은 피로써 이를 제압했을까? 이곳이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1948년 국가를 건국하면서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당시 UN 등 국제 사회는 이를 인정치 않았다. 예루살렘은 분할되어 서쪽은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이, 동쪽은 팔레스타인 인이 거주했다. 이런 불안한 동거가 가능했던 것은 UN이 ‘예루살렘은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닌 국제 사회 공동의 도시이며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아랍국과의 1967년, 1973년 등 몇 차례 중동전 이후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은 물론 동예루살렘까지 점령하면서 예루살렘을 온전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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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인 가자지구를 삥 둘러 거대한 벽을 구축했다. 보호와 격리, 감시가 모두 가능한 선택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대한 실효적 지배에도 국제 사회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공존의 도시, 국제 도시’로 규정했다. 이스라엘은 건국 때부터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수도라고 선포했지만 이 규정에 의해 모든 행정 조직과 각국의 대사관은 텔아비브에 존재했다. 이 불문율을 트럼프 대통령이 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 대사관 이전은 예루살렘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와 지위에서 무슬림의 지분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준 행동이다. 지중해 연안 이스라엘의 국토 중앙에 위치한 예루살렘. 인구 90만 명의 소도시인 이곳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신의 도시’다. 그것도 하나의 신이 아닌 세 신이 공존하는 인류의 지속, 진화와 함께한 도시 자체가 인류의 거대한 역사인 것이다. 유대교는 통곡의 벽 앞에서 모세가 출애굽의 신화를 이룩하기 훨씬 전부터 기도를 올렸고, 다윗과 솔로몬이 전성기를 연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것이 이 예루살렘의 돌, 흙, 공기에 묻어 있다. 즉 예루살렘은 신이 유대 민족을 위하여 마련해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상징되는 유대교 성지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음을 맞고 그리고 부활하고 묻힌 성지이며 예수님이 묻혀 있다고 믿는 성묘교회가 있는 곳이다. 지구상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예루살렘을 성지로서 의심하지 않는다. 이슬람교 역시 마찬가지다. 선지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바위의 돔이 있는 예루살렘은 지금의 메카가 있기 전 모든 이슬람교인이 어느 곳에 있어도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올리던 부정할 수 없는 성지다.

역사는 참으로 흥미롭다. 그 어떤 위대한 연출가가 예루살렘이란 무대를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각색하고, 쉽게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이끌며, 화합과 갈등, 반목과 공존, 소통과 불화를 한곳에 버무릴 수 있을까.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은 그 신을 지속시키는 상호 호환의 절묘한 역할 속에서 예루살렘은 약 5000년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어떤 순간은 ‘천국’으로, 또 어떤 순간은 ‘지옥’과 같은 혼돈으로 모두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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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계인의 공동의 도시 예루살렘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고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수많은 종교인, 학자, 정치가, 상인, 권력자 등이 예루살렘의 가치를 수식화 하고 그것에서 자신들만의 공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시작의 목적은 굉장히 위대하고 보편타당했다. 바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 종교의 가치를 동등하게 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숨은 욕망이 개입되는 순간, 공존의 가치는 ‘나만의 유일한 신’을 위한 것-어쩌면 이것 역시 명목뿐이겠지만-이라는 공식으로 변환되어 왔다. 마찬가지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 사악한 뱀의 혀 같은 폭력과 배타의 이기심을 누가 ‘먼저’ 내밀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폭력은 복수를 낳고 그 복수는 또 다른 보복을 불러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만이 피를 흘렸다. 수천 년의 이 지겨운 역사를 그들은 단 한마디로 갈음한다. ‘신의 이름으로, 신의 뜻으로’이다.

예루살렘의 영광과 찬양 그리고 피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 책 등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구약부터 신약까지의 성경, 초창기 코란의 역사, 유대교 경전 등. 이 셋의 시작은 동일했다. 그러다 위대한 신과 예수님, 마호메트가 탄생하고 승천하는 가운데 거룩한 혈통에 의해, 장자와 둘째 자녀의 분리로 인해, 또 믿는 자의 선택에 의해 ‘유일했던 신’은 분화하고 그 나름의 교리를 내세우며 진화했다.

당연히 그 진화의 주체는 인간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했던 이 세 종교는 각기 성전의 형태와 신을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공존이 가능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혹은 ‘신의 뜻으로’라는 논리로 신을 인간 세상으로 하강시키고, 개입하면서 종교는 각자의 옷을 입고, 나와 다른 옷을 입은 이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로마,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교황, 술탄 등의 다양한 이름의 ‘티끌만한 작은 권력들’이 신의 권위를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이 수천 년 성전의 횃불은 꺼지지 않고 번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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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리들리 스콧, ‘진정한 신의 뜻’을 질문하다 여기 영화 한 편이 있다.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 2005년에 거장 리들리 스콧이 만든 이 영화는 기독교, 이슬람, 비잔티움, 로마, 유럽 왕조, 교황, 살라딘, 십자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집결하는 12세기의 예루살렘 왕국의 성벽에 깃든 역사를 압축해 대변한다. 사실로 증명된 역사를 배경으로 상상력의 픽션을 결합한 영화는 종교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예루살렘이란 도시가 갖는 역사적, 종교적 배경과 가치를 한눈에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높은 완성도, 성공적인 흥행, 평단의 호평이 어우러지며 신성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인간의 그릇된 욕망과 오만의 비극적 결말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영화의 메인 카피는 ‘운명이 이끈 만남…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이다. 운명은 인간과 종교, 이슬람과 기독교, 남자와 여자의 사랑, 삶과 죽음 모든 것을 의미한다. 리들리 스콧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억5000만 달러(한화 약 1700억 원)를 들여 이 대작을 완성했고 무려 2억1000만 달러(한화 약 2400억 원)를 벌어들였다. 영화는 역사물과 남녀의 사랑이라는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썼지만, 종교물, 한 걸음 더 들어가 진정한 종교의 의미와 우리가 믿는 신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담고 있다. 영화는 1180년대, 광풍과 같은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약 100년 후, 제2차 십자군 전쟁 당시를 무대로 한다. 평범한 대장장이 발리안(올랜도 블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한번에 몰아닥친다. 아이를 사산한 아내가 자살하자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것. 그런 발리안을 수도사들은 감금한다. 당시 기독교에서는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이때 한 무리의 기사단이 이 마을을 방문한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십자군들이다. 이들은 감옥에 있던 발리안이 대장장이인 것을 알고 그를 풀어준 뒤 기사들의 장구류를 손 보게 한다. 그 기사 무리 안에 고프리(리암 니슨)가 있다. 고프리는 한눈에 발리안이 자신의 혈육임을 알아본다. 옛날, 고프리는 발리안의 어머니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십자군 원정을 위해 그녀 곁을 떠난 것. 평생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던 발리안은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 고프리로 인해 혼돈에 빠진다. 고프리는 발리안에게 용서를 구하고 같이 십자군 원정길에 오르자고 제안하지만 아내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상실한 발리안은 고프리와의 동행을 거부한다.

기사들이 떠난 밤, 발리안에게 수도사가 찾아온다. 그는 발리안에게 십자군 원정길에 동행하라고 말한다. 자살한 아내의 죄를 면죄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며. 그 순간 발리안은 수도사의 목에 걸려 있는, 자신이 아내에게 걸어준 목걸이를 발견한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수도사는 오히려 당당하게 발리안에게 말한다. “자살은 죄악이고 너의 아내는 자살했기에 목을 자르고 묻었을 뿐이다”고 강변하지만 발리안은 수도사를 찌르고 그를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에 밀어 넣어 죽인다. 그리고 고프리를 쫓아가 “나는 살인죄를 지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원정에 동참하겠다”고 한다. 고프리와 발리안 일행은 지중해를 건너는 배를 타기로 결정한다. 이 여정에서 고프리는 발리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전술, 검술은 물론이고 기사들의 진심의 충성을 얻는 방법도. 마을에 도착할 무렵, 그 마을의 영주 아들이 고프리를 습격한다. 그는 고프리의 조카다. 고프리는 습격을 막아 냈지만 중상을 입는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항구에서 고프리는 발리안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4세(에드워드 노턴)를 지켜 달라”고 부탁하고 발리안에게 자신의 영지인 이벨린의 영주 자리를 물려준 뒤 죽음을 맞이한다.

지중해는 풍랑의 바다다. 당시 배 10척이 뜨면 그중 7척은 지중해에 수장 당하던 때였다. 발리안의 배 역시 거친 풍랑을 만나 난파되고 발리안은 겨우 파도에 몸을 의지해 해안에 도착해 목숨을 부지한다. 발리안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도중에 고프리의 영지 이벨린의 무사들을 만나 합류한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발리안은 보두앵 4세를 알현하고 충성을 다짐한다.

보두앵 4세는 은 가면을 쓴 일명 ‘나병 왕’이다. 어릴 때 다쳤지만 상처가 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진료를 받아 보니 나병에 걸린 것. 성인이 되면서 점차 몸이 썩어 가던 보두앵 4세는 자신의 얼굴을 은으로 만든 가면으로 가리고 예루살렘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어진 보두앵 4세에게 하늘 이 내린 천형은 참으로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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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는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발리안은 기사단을 이끌며 뛰어난 검술과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보두앵 4세는 그를 신임한다. 발리안은 예루살렘 공주, 즉 보두앵 4세의 누나 시빌라 공주(에바 그린)를 만나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녀는 보두앵 4세의 후계를 이을 왕자의 생모다. 한편 시빌라 공주의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영주가 있다. 그는 기 드 뤼지냥(머르톤 초카스). 기는 악명 높은 야심가였다. 그는 보두앵 4세의 목숨이 길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다음 왕위에 오를 왕자의 생모인 시빌라와 정략 결혼하기로 한 상태다.

발리안은 갈등한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기사로서 시빌라와의 사랑에 주저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은 거역할 수 없는 것, 발리안은 이 금지된 사랑에 더욱 빠져든다. 시빌라를 발리안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기는 발리안에게 분노를 폭발시키고 이를 전쟁으로 풀어낸다. 기는 무모하게도 무슬림 상단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힌다. 그러자 당시 분화된 이슬람 세력을 통일하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던 이슬람의 왕 살라딘(가산 마소드)이 무슬림 상단을 보호하기 위해 전선에 나선다. 그는 지혜로우면서도 위대한 전략가였다. 어쩔 수 없이 보두앵 4세도 아픈 몸을 무릅쓰고 군을 이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발리안과 기는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힌다. 이어 전선에 도착한 보두앵 4세는 살라딘에게 “내가 기를 처벌할 것이니 군대를 물리라”고 요청한다. 살라딘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기와 발리안을 예루살렘 군에 넘긴다. 보두앵 4세는 기를 엄하게 꾸짖고 감옥에 가둔다. 하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무리하게 전장에 출전한 보두앵 4세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발리안을 조용히 부른다.

“발리안, 시빌라 공주와 결혼하고 예루살렘 왕을 이어받아 이 성과 백성들을 지켜 달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왕위에 오르면, 보두앵 4세의 이름으로 이 전장에 참전한 기사들이 떠날 것입니다.”

결국 보두앵 4세는 시빌라의 아들에게 다음 예루살렘 왕위를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어린 왕 역시 보두앵 4세와 같은 나병에 걸려 있었다. 시빌라는 아들이 오빠인 보두앵 4세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두렵고 슬퍼 아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욕망과 사랑에 눈이 먼 기는 시빌라와의 결혼에 방해가 되는 발리안을 죽이려 암살자를 보내고 자신의 심복 레날드를 시켜 살라딘의 누이를 암살한다. 살라딘은 복수를 다짐하고 기는 살라딘의 위협을 이용하여 시빌라와 결혼해 예루살렘의 왕위를 잇는다.

왕이 된 기는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발리안과 예루살렘 기사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끌고 살라딘을 공격하려 사막으로 나간다. 하지만 기는 살라딘의 전술에 말려들어 대패하고 치욕스럽게도 포로가 된다. 살라딘은 기의 심복 레날드의 목을 베어 누이의 복수를 하고 “아무리 전쟁이라도 왕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기를 풀어 준다. 살려줌으로써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안겨 준 것이다. 그리고 살라딘은 대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한다.

예루살렘에는 불과 수백 명의 병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발리안은 살라딘의 대군을 간신히 막아 내지만 결국 성벽은 무너지고 만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을 직감한 발리안에게 살라딘이 회담을 요청한다.

살라딘은 뜻밖에도 발리안에게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철수하라고 제안한다. 발리안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시빌라 역시 발리안을 따라 나서기로 결정한다. 그 와중에도 기는 발리안에게 결투를 신청하지만 발리안의 칼에 무릎을 꿇는다. 기는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소리치지만 발리안은 “이제 왕이 아닌 올바른 기사의 길을 다시 시작하라”는 충고를 남긴다. 발리안과 십자군, 기사들, 주민들이 떠난 텅 빈 예루살렘, 살라딘은 조용히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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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거룩한 성전에 숨어 있는 역사 이 영화를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예루살렘과 십자군이다. 서기 4세기경,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그는 밀라노 칙령으로 국교화를 선포했다. 그는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예수님이 태어나고 숨을 거둔 예루살렘은 모든 기독교인이 살아 있는 동안 한 번은 가야 하는 성지가 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행한 성지 순례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에서도 변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곳은 무슬림의 세상이었다. 물론 성지 순례에 무슬림들이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 638년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도 성지 순례는 이루어졌다.

오히려 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지중해를 건너는 것. 하지만 위험한 바다 지중해는 이용할 수 없었다. 대개의 순례자들은 육로를 이용했다. 로마에서 무려 3000km에 이르는 대장정은 보통은 1년, 길게는 2년이 넘게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1071년 셀주크 투르크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이 성지 순례는 위험한 길이 되었다. 이를 기회로 생각한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성지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한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황제와 교황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의 기세에 눌려 제국의 위용을 잃고 겨우 콘스탄티노플만 지배하던 약체였다. 황제는 십자군 원정을 빌미로 제국의 확장과 왕권 강화를 계획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배권, 특히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를 자신의 권위로 통합하려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유럽에서 교권에 도전하는 왕과 영주들의 무력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십자군 원정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1095년 12월27일. 프랑스 클레르몽 교단 회의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다. 교황은 군대 규모를 늘리기 위해 이른바 ‘면죄론’을 들고 나왔다. ‘죄를 지은 자, 성스러운 전쟁에 참전하여 그 죄를 면죄 받으라’는 논리였다. 이때 무려 6만 명의 제1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십자군은 마침내 1099년,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무슬림 세력은 분화되어 있었고 강력한 구심점도 없었다. 그들은 유럽과 로마 교황청의 이러한 십자군 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조직적인 저항도, 대응도 없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피의 살육을 벌였다. 희생자는 무려 2만5000여 명. 그중 십자군이 ‘짐승’으로 치부한 이교도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몰살되었고 살육 대상에는 여자, 아이도 포함되었다. 교황은 약속대로 이 피의 살육전에 참가한 십자군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죄를 면죄받기 위해 저지른 ‘또 하나의 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곳일지라도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십자군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십자군의 목적은 예루살렘, 즉 성지 수호가 아닌 성지 점령과 면죄부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작은 왕국이 세워지고 왕국을 수호하는 군사는 고작 2000명이었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서서히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지기 시작했다.

마호메트의 묘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자신들의 성전이 십자군의 마구간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이슬람교도들은 각성하기 시작했다. 시대는 영웅을 만들어 낸다. 살라딘은 이슬람교도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점차 제국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연 살라딘은 이제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다시 탈환하기 위해 ‘무슬림판 성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차례 전쟁을 거쳐 1187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무슬림교 깃발을 성묘교회(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안장된 교회) 위에 휘날렸다.

물론 십자군 전쟁은 전쟁의 성과와 관계없이 유럽에 정치 사회는 물론이고 문화, 과학적 발전을 가져왔다. 영주와 기사 계급의 약화로 봉건 제도가 쇠퇴하고 왕권이 강화되는 중앙 집권제가 정착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재건을 위한 전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 전쟁 이후 서서히 국력을 상실하고 1453년 멸망했다. 경제적으로는 군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 상권이 강화되면서 이후 왕권, 교권과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하게 된 ‘돈, 즉 상권’의 태동을 알린 것이다. 문화적으로도 유럽에서는 무슬림을 ‘이교도에 짐승 같은 야만족’이라고 치부했지만 사실 그들은 유럽보다 훨씬 발달된 문명을 이룩하고 또 누리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발달된 수학과 과학은 유럽에 유입되었고 유럽 각국의 문화 부흥에도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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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빚어낸 비극,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다 영화는 제1차 십자군 전쟁 약 90년 이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한 11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 중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 무슬림의 지도자 살리딘 그리고 발리안과 시빌라 공주는 모두 실존 인물이다.

물론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은 단연 발리안이다. 발리안은 이 영화가 던지는 강한 메시지의 전달자다. 영화는 ‘천국 Heaven’을 특정 종교 즉 기독교, 이슬람교만의 세상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이 사는 세상이라고 강조한다. 종교를 위해, 하나님의 뜻으로, 알라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며 서로를 죽이는 것은 ‘진정한 신의 뜻’이 아닌 ‘신의 뜻을 가장한 인간의 욕망’이라고 질타한다. 이 메시지를 위해 리들리 스콧은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을 교차시켜 드라마를 빚어낸 것이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탄생하고 승천한 곳,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이며 유대교도에게는 이집트를 탈출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영원한 성지다. 누구만의 천국일 수 없는 태생적 조건에서 예루살렘은 그 어떤 도시보다 인간의 눈물과 피를 요구했다.

수십 세기 전, 인간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예루살렘은 모두가 원하는 도시가 되었다. 바빌로니아의 공격에 도시가 무너진 것이 이미 기원전 6세기경이고, 이후 로마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거의 흔적이 없어질 정도로 파괴된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합법화 되면서 예루살렘은 성지로서 온전한 자격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백 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굳건하게 견디어 오던 예루살렘을 다시 피의 강물이 흐르는 비극의 도시로 만든 것은 이곳을 성지로 한 신도들에 의해서다. 그들은 1099년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구출하자’는 구호로 씻을 수 없는 비극을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아이, 기독교도와 유대교는 물론이고 이슬람교도까지 십자군의 칼날 아래 쓰러져 갔다. 그 어떤 이유도, 변명도, 논리도 필요 없었기에 900년이 흐른 뒤 2001년 교황 바오로 2세는 ‘그때의 행동’에 대해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신의 뜻이다(God wills it)!”에 대한 너무 늦었지만 진정한 용기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예루살렘에 깃든 증오와 복수, 배타와 차별을 완벽하게 제거하기에는 부족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예루살렘에는 총성이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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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무엇인가? Nothing or Everything! 영화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신, 종교, 인간, 사랑, 증오, 복수 그리고 인간의 원죄에 대한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한 묵직한 주제 의식을 전한다. 그 장치들은 주로 발리안과 살라딘의 행동과 말에서 드러난다. 살라딘의 대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발리안은 예루살렘 백성들 앞에서 피를 토하는 연설을 시작한다.

“여러분에게 과연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그대들의 성지는 로마인들이 무너뜨린 유대인들의 성지 위에 지어졌고, 무슬림의 성지는 그대들의 성지 위에 지어졌다. 무엇이 더 신성한가. 통곡의 벽? 바위 돔 모스크? 성묘교회? 그 누가 이 땅을 가질 권리를 갖고 있는가?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모두가 갖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예루살렘을 지킬 것이다. 무엇을 위해? 바로 그 신성시하는 돌이 아닌 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서이다.”

이후 살라딘에 의해 성벽이 무너지고, 살라딘은 발리안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살라딘은 발리안에게 “도시를 넘겨주겠는가?”라고 묻는다. 발리안은 굳은 얼굴로 단호한 목소리로 답한다. “이 도시를, 사람들을 점점 미치게 하는 예루살렘을 다 태워 버리고 말겠다. 당신의, 또한 우리의 성지까지 모두.”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 신전에 놓인 마지막 돌 하나까지 모두 태워 버리겠다. 그리고 우리의 기사 한 명이 살라딘의 무사 10명씩 죽음의 길에 동행할 것이다. 당신이 이 도시를 점령한 순간 당신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살라딘은 무심하듯 발리안에게 말한다.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장하겠다. 아이, 노인, 여자는 물론이고 기사와 병사들까지도.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발리안은 살라딘의 제안을 듣고 놀랐다. 그가 과연 순순히 보내 줄 것인가. 발리안은 묻는다. “백 년 전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도시의 모든 이슬람교도를 죽였다.” “나는 옛날의 그들이 아니다. 나는 살라흐 앗 딘이다.” 발리안은 대답한다. “그 조건이라면 예루살렘을 내어 드리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앗살라무 알라이쿰(신의 평화가 당신에게).” “당신에게도 평화가 함께하기를.” 각자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길, 발리안은 발을 멈추고 살라딘에게 묻는다.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What is Jerusalem worth)” “아무것도 아니네(Nothing).”

살라딘은 돌아서 간다. 발리안은 그 자리에서 살라딘의 말을 곱씹는다. 살라딘이 가다 말고 갑자기 돌아서서 발리안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기도 하다!(Everything)”

이 마지막 장면에 영화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살라딘은 발리안에게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 모두가 죽음으로써 지켜야 하는 성지로서의 가치가 있기에 예루살렘은 ‘모든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이다. 신의 뜻과 신의 이름으로 움직여야 하는 종교적 믿음의 가치로서는 당연한 뜻이다. 하지만 그 종교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백성이, 모든 군인이 목숨을 기꺼이 내놓아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귀중한 생명이라면, 종교적 신념도 이 생명의 절대 가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도 내포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과연 신이 원하는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를 인간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신의 뜻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너머가 아닌 바로 내 곁에 있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나와 내 이웃의 가슴에 있는 평화와 사랑이 아닐까. 리들리 스콧은 이를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가 깃드는 곳’, 아랍어로는 ‘알투드스, 신성한 도시’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이 진정 이 뜻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백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그곳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과연 신과의 공존을 통해 무엇을 얻은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평화로운 곳이자 가장 첨예한 대립과 배타의 이기심이 존재하는 공간 예루살렘, 과연 이 예루살렘을 어떻게 이끌지 진정 신의 뜻이 궁금해진다.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실질적인 행정수도는 텔아비브)

-언어: 히브리어, 아랍어

-면적: 약 2만2000㎢

-인구: 약 850만 명

-위치: 지중해 동남방 연안, 폭이 좁고 길이는 273㎞에 달한다.



예루살렘 -인구: 약 90만 명

-위치: 이스라엘 중심부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르단강 사이의 도시

-특징: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가장 중요한 성지로 도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이슬람교의 성지인 바위의 돔, 알아크사 모스크와 유대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 그리고 예수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기독교의 성지인 성묘교회가 한곳에 공존하는 도시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미디어, Daum 영화,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43호 (18.08.2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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