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영월 선암마을. 사진 이우석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영월 선암마을. 사진 이우석

 산을 넘는다는 것. 예전에는 큰일이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한 번도 떠난 적 없이 살다 죽는 게 지극히 당연했던 농경 정착 사회였기 때문이다. 금의환향하기 위해 과거를 보러 가고, 보부상이 돼 떠돌아다니고. 전란이 나서 징용을 가지 않는 한 여행(旅行)은 없었다. 외지로 떠돌다 죽으면 객사라 해 집 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때다.

호사로운 고관대작이나 권세 좋은 양반네야 좋다는 금강을 찾아 유람도 가고 친지를 찾아가고 했을 테지만 장삼이사 필부들은 꿈도 못 꿀 것이 여행이었다. 그런데 산을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영월에서 매년 한양까지 천리를 왕복하는 이들이 있었다. ‘떼돈’을 벌기 위해 떼를 띄우는 뗏꾼들이다.


산 따라 물 따라 영월을 갔다

영월(寧越), 산을 넘는 길목이다. 월(越)은 커다란 산맥을 앞둔 고을 지명에 붙는 명칭이다. 일본 니가타(新潟)현도 예전엔 에치고(越後)라 불렸다. 태백산맥과 차령산맥에서 뻗어 나온 고산준령을 등진 영월은 고려 때 이름이 붙여졌다. 백운산과 태화산 등 해발 1000m 이상 급 ‘칼 같은 산’들이 득실하다.

동강과 서강이 있어 물도 좋다. 서쪽 술 담그기 좋은 주천강도, 동북 평창강도 영월에 흐른다. 한마디로 산수가 좋단 얘기. 산수는 풍경을 뜻하니 그야말로 풍광이 좋단 뜻이다. 고려 말 문신 정추(鄭樞)는 자신의 시문집 ‘원재집’에서 영월을 일러 “칼 같은 산들은 얽히고설키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이 비치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찬란한데 풀과 나무에는 연기가 잠겼다”고 했다.

#이홍위(직업=왕·1441~1457년). 영월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김종서를 죽인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이홍위(단종)를 폐위하고 영월로 보냈다. 멀고도 험한 곳이라야 무탈할 것이라 여겼다. 열세 살 단종은 노산군이 돼 영월 청령포에 갇혔다. 숲도 좋고 물도 좋은 아름다운 곳이라 참 역설적이다. 이후 몇 번이고 복위 움직임이 일자 결국 살해되고 만다. 왕의 나이 고작 열일곱이었다.

궁궐을 떠나 청령포 단출한 초가에 여린 몸을 누인다. 솔숲을 벗 삼아 단종은 서러움을 달랬다. 청령포 앞 냇물을 따라 외로움도 두려움도 함께 흘렀다.

장릉(莊陵).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다. 언덕에 올라앉은 능은 여전히 외로워 보인다. 꼿꼿한 노송들이 남아 서러운 왕의 영면을 지키고 섰다.

#김병연(직업=시인·1807~1863년). 이름보다 별명(김삿갓)이 유명하다. 영월 태생이나 영월에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영월 땅에 묻혀 있다. 영월군에는 김삿갓면이 있다. 김병연은 삿갓을 쓰고 세상을 등졌다. 그의 조부 김익순을 능멸한 죄를 스스로 물었다.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임을 모른 채, 특유의 풍자와 타고난 글재주로 신랄하게 나무랐다. 사실을 알게 된 후 김병연은 당장 벼슬을 버리고 방랑시객 김삿갓이 됐다. 시로 세상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깎아지른 절벽과 계곡이 감탄을 자아내는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는 김병연의 묘와 주거지, 묘, 노래비, 시비 등이 있다. 전남 화순군에 묻혔다가 영월로 이장했다. 김삿갓문학관도 영월에 있다.

#최곤(직업=가수·1960년초 생 추정). 최곤은 1988년도 가수왕 타이틀을 따낸 스타 록커다. 이후 추락의 길을 걸은 최곤은 영월에 오게 된다. 이 내용은 픽션이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줄거리다.

박중훈이 분한 최곤은 대마초 사건과 폭력 등으로 얼룩진 세월을 보낸다. ‘왕년’만 바라보고 살아가던 그를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가 연인 이상으로 챙기지만 여전히 천방지축인 최곤은 그의 진심을 모른다.

폭력사건 합의금 마련을 위해 박민수의 손에 이끌려 원주MBC 영월지국까지 내려온 최곤. 그곳엔 수많은 ‘비주류’들이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먹은’ 지국장도, 천덕꾸러기 박 PD도 마찬가지 신세다. 최곤을 만나 열광하던 시골 록밴드 이스트리버(노브레인 분)는 처음부터 철저한 비주류였다.

‘주류’의 때가 지워지지 않은 최곤은 이곳에서 살며 ‘잡초’ 같은 삶과의 공존, 전파를 통한 소통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영월의 맑은 자연만큼이나 깨끗하게 정화돼 가며 소중한 사람의 존재를 비로소 깨닫는다.

#뗏꾼(직업=벌목꾼·연대 미상). 다시 돌아가 뗏꾼의 여행 이야기. 뗏꾼은 강원도 영월과 정선 등 산골짜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떼(뗏목)를 띄워 한양까지 내다 팔던 이들을 말한다. 떼는 운목용 배요, 떼돈은 운목으로 받은 거액의 삯이다. 거친 여울에 휩쓸려 죽지 않는다면 떼돈을 번다. 그들이 다시 육로로 귀향하는 길엔 어김없이 들병이들이 목을 지키고 있다. 술과 음식, 웃음을 파는 들병이에게 돈을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돼 집이라고 찾아 돌아온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뗏꾼을 기다리던 아낙은, 돌아온 남편의 알거지 행색에 기가 막히지만 무사귀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때 나온 노래가 바로 ‘뗏꾼 아라리(아리랑)’다.

영월 고향원조칡칼국수의 ‘칡칼국수’. 사진 이우석
영월 고향원조칡칼국수의 ‘칡칼국수’. 사진 이우석

‘술 잘 먹고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이더니 술 못 먹고 돈 못 쓰니 적막강산일세 돈 없어 술도 못 마시는 뗏꾼을 누가 알아 주리오’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선암마을에서는 뗏목 체험을 할 수 있다. 한반도 모양으로 따지면 포항 인근에서 출발해 서해 인천까지 돌아나오는 코스다. 심산유곡에서 돈을 벌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떼를 타고 머나먼 도성으로 나갔던 그들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숨소리 하나도 메아리쳐 돌아올 것 같은 적막한 물길. 고즈넉한 그곳에선 청정 산수의 매력에 빠져든다. 절벽 아래 바위에는 자라도 올라앉아 볕을 쬐고 떼 아래 수정 같은 물속에는 버들치, 쉬리 등 토종 물고기가 산다. 산그늘 물그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덤이다.

#고종원(직업=의병·1538~1592년). 임진왜란 당시 형제들과 분연히 일어나 왜병과 싸웠다. 패색이 짙어지자 가족을 데리고 동굴에 숨어들었다. 고씨동굴(천연기념물 제219호)은 고종원의 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면적 48만762㎡, 길이 약 3.4㎞에 이르는 중대형 석회암 동굴이다. 약 4억8800만 년 전 오르도비스기에 형성된 굴이다.

굴에는 4개의 호수를 비롯해 3개의 폭포, 10개의 광장 등이 있으며, 저마다 재미난 이름이 붙은 종유석·석순·석주들이 조화있게 배치돼 있다. 여러 신비스러운 풍경도 좋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시원해서 매력적이다. 동굴 내부 기온이 약 16도를 유지하는 까닭에 초가을 노염(老炎)을 피해 시원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5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인근 관광지
영월 10경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별마로 천문대는 별자리 관찰하기에 최적인 곳이다. 해발 고도가 높고 주변에 밝은 도시가 거의 없어 총총 빛나는 별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영화 ‘라디오 스타’ 촬영지 청록다방은 젊은 여행객들이 들르는 필수 코스. 그냥 다방 커피맛이지만 왠지 낯익은 분위기에 쉬어 가는 기분이 색다르다.

먹을거리
영월동강사진박물관 인근 사랑방식당은 오징어불고기와 보리밥 정식으로 유명한 집이다. 너른 주차장이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가득 찬다.
영월읍 덕포리 성호식당은 다슬기 해장국으로 유명한 곳. 토실토실한 다슬기에 우거지를 넣고 한소끔 끓여낸 다슬기탕은 어떤 숙취도 해소해낸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뿔소라만 한 다슬기를 잔뜩 넣고 비벼 먹는 비빔밥도 맛이 좋다.
고씨동굴 앞 고향원조칡칼국수는 이름처럼 칡칼국수를 잘하는 집. 덥지만 이열치열로 뜨거운 국물에 김치를 송송 썰어 넣은 칡국수 한그릇이면 허기를 한 방에 떨쳐낼 수 있다. 시원한 비빔국수도 있다. 이름처럼 강원도 명물인 감자로 만든 감자전과 감자떡도 입맛을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