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그리기란 재편된 시공간을 보는 것…양자역학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김상욱·유지원

보다

기하학적 선원근법인 ‘일점투시도법’ 개념도.

기하학적 선원근법인 ‘일점투시도법’ 개념도.

■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불일치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친구가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빗길에 우리 차가 미끄러지면서 앞차를 박은 사고였다. 추돌 일보 직전의 짧은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은 갑자기 슬로모션으로 흘렀다. 그러더니 앞차의 엉덩이가 눈앞에 거대하게 부풀어 보였고, 그때 공포를 느끼며 큰 사고를 직감했다. 운전한 친구도 나처럼 그 ‘거대한 엉덩이’를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그 순간 ‘미래’를 봤던 것이다. 극히 짧은 다음 순간의 미래. 그런 비과학이 어딨냐고? 진짜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만은 않는 우리의 뇌가 다급한 나머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물체의 다음 순간을 앞서 보여주며 비상 경보를 울린 것이다.

지난 번 칼럼에서는 ‘스케일’ 이야기를 했다. 공간 속에서 같은 비례의 닮은꼴이 있어도 서로 크기가 다르면 인간에게 주는 감정이 달라진다. 크기는 그 자체로 인간과 반응하는 고유한 속성을 가진다.

서구원근법의 ‘순차적 시간’은
하나의 소실점에 시선을 고정
평면에 3차원의 세계를 담는다

이번에는 여기에 ‘시간’을 덧대어보자. 일단,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해본다. 같은 크기의 대상이 여러 개 있을 때 나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상일수록 작아 보인다.

2차원 평면에 3차원의 세계를 담는 ‘마술’을 부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게 나란히 마주선 2차원 화면에 가로·세로 같은 간격으로 직교하는 평행선들을 그려보자. 2차원 평면에는 화면 뒤로 펼쳐지는 3차원 축이 없다. 하지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기하학적 선원근법인 ‘일점투시도법’이다. 세로 방향 평행선들의 한쪽 끝을 한 점을 향해 가지런히 모은다. 그러면 평행선들이 한 점으로부터 원형으로 펼쳐져 나오는 방사형 선들이 된다. 가로 방향의 평행선들은 내게서 ‘멀어질’수록 간격이 점점 좁아진다. 이렇게 바뀔 때, 이 간격은 등간격 등차수열에서 조화수열이 되어간다. 이때, 저 멀리 사라져가는 한 점을 이름 그대로 소멸되는 ‘소실점(vanishing point)’이라고 부른다(맨 위 사진 참조).

소실점 가까이 있던 대상이 내게로 다가오는 운동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공간 속에서 대상의 위치가 변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크기가 커져 보일 것이다. 우리는 운동하는 물체를 평면 공간에 표현할 때에도 이 원리를 응용한다. 빈 종이에 야구공 하나를 그려보자. 멈춘 듯 보일 것이다. 여기에 야구공을 중심으로 퍼져나오는 방사형 선들을 그려보자. 그러면 야구공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오는 듯 보인다.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방향 운동이 생긴 듯 보이는 ‘마법’이 일어난다.

물체가 광속에 가까운 운동을 하면 시공간이 휘어지는 상대성이론이 적용된다. 다만 일상 수준의 속력에서는 그 효과가 극도로 미미하다. 그러나 물리적인 좌표계는 별 변화가 없더라도, 인간의 눈과 뇌는 공이 내게 날아오는 속도만 바라봐도 공간이 휘어진 듯 인식한다.

한 점에서 펼쳐 나오는 방사형 선들 위에 두 개의 세로 평행선을 놓아보자. 분명 평행선인데, 어안렌즈로 보는 것처럼 가운데가 불룩하게 휘어져 보인다. 방사형 선들은 실제로는 정지해 있지만, 하나의 소실점이 생긴 상황은 빠른 운동이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과 유사해 보이기에 인간의 뇌는 이를 운동하는 상황이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바로 착시다. 인지과학자 마크 챈기지(Mark Changizi)에 따르면, 날아오는 공이나 운전 중 다가오는 물체가 갑자기 커 보이는 착시는 인간이 이를 재빨리 피하기 위한 반사 기제를 진화시켜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눈과 뇌는 빠르게 내게 다가와 해를 입힐 수 있는 물체의 운동에 대해 예지력을 가진 셈이다. 1초도 되지 않는 극도로 가까운 미래이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고’ 피하라고 경고한다.

하나의 소실점에 시선을 고정하는 일점투시도법은 관찰하는 사람을 정지시켜 둔다. 그런데 인간은 움직이는 동물이라, 오랜 시간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은 사실 부자연스럽다. 유럽에서 원근법을 발명해서 사람을 멈추도록 한 동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문화에서는 ‘기운생동’이라 해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중히 여겼다.

사방을 담은 ‘울릉도외도’는
움직이는 관찰자의 모든 시점을
‘동시적시간’으로 펼친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지도 ‘울릉도외도(鬱陵島外島·작자 미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후기에 그려진 지도 ‘울릉도외도(鬱陵島外島·작자 미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울릉도와 그 주변 섬을 그린 조선시대 그림지도인 ‘울릉도외도’에는 폐화식(閉花式) 구도가 적용되어 있다. 지도는 3차원 실제 공간을 가급적 정확하게 2차원 평면에 축소 ‘번역’하는 그래픽이다. ‘울릉도외도’는 인간이 실제로는 한눈에 볼 수 없는 풍경을 신통하게 펼쳐낸다. 실제 울릉도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면 섬의 일부만 볼 수 있다. 새처럼 내려다보면 섬의 윗부분만 보일 것이다. 한눈에 섬의 사방의 모습이 다 보이도록 하기 위해, 이 지도는 섬의 측면 풍경이 가운데를 향해 안으로 엎어진 듯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관찰자는 섬 주위의 바다를 뱅뱅 돌며 움직이고 있다. 저 멀리 떨어진 소실점의 물체가 다가오는 듯한 서구 원근법의 ‘순차적 시간’과 달리, 이 지도에서는 움직이는 관찰자가 보는 모든 시점을 한번에 보여주는 ‘동시적 시간’ 관념이 드러난다.

과학과 기술이 망원경과 현미경 등 보이는 스케일을 확대하는 도구를 통해 인간 시력의 한계를 넘어 가시 범위를 확장해준다면, 그림은 실제 현상을 재배열함으로써 물리적 공간 속 인간 신체의 한계를 넘어 재편된 시공간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해준다.

유지원

■ 본다는 것

중세의 규칙으로부터 탈피한
보이는 대로 그리는 원근법은
르네상스 미술의 혁명적 발견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이탈리아의 화가 마사초(1401~1428)의 프레스코화 ‘세례를 베푸는 성 베드로’(1425,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랑카치 예배당)의 부분.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이탈리아의 화가 마사초(1401~1428)의 프레스코화 ‘세례를 베푸는 성 베드로’(1425,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랑카치 예배당)의 부분.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글이다. 이 소설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세밀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에게 그림이란 본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대로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규칙을 어기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들에게 궁극의 경지란 밤낮으로 연습하다가 눈이 멀어서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중세유럽의 미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림의 주인공은 신과 성인(聖人)이다. 주인공은 거대하게 과장돼 표현됐고, 표정이나 그림자도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얼굴엔 고통의 흔적조차 없다. 그러니 그림은 천편일률적이었으며, 작가는 자신의 서명도 남기지 못했다. 그림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도래하자 화가들은 규칙을 깨뜨리기 시작한다. 아니, 규칙으로부터의 일탈이 르네상스를 도래시킨다.

1325년 조토의 프레스코에는 고뇌하는 표정의 인간이 나타나고, 1420년대 마사초의 ‘세례를 베푸는 성 베드로’에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등장한다. 추운 겨울 세례를 받기 위해 옷을 벗고 기다리는 사람이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중세의 감각이라면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장면이다. 마사초는 더 나아가 그림에 원근법을 도입한다. 원근법이야말로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정신을 오롯이 구현한 르네상스 미술의 혁명적 발견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서양의 르네상스 미술이 이룩한 이런 혁명적 발견의 도입을 놓고, 이슬람 세밀화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새로운 규칙은 19세기 인상주의에 이르러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달 관측은
지동설로 나아갈 증거를 얻었다
보는 것이 과학혁명을 일으켰다

르네상스가 끝나갈 무렵, 보는 것의 혁명이 과학을 강타한다. 1609년 갈릴레오는 20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다. 망원경으로 달을 본 갈릴레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표면이 울퉁불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정받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달과 같은 천상의 물체들은 완벽한 구형이고 완전한 원 궤도를 움직여야 했다. 1610년 갈릴레오는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을 발견한다. 천동설에 따르면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 했다. 이제 갈릴레오는 지동설로 나아갈 증거를 얻은 것이다. 과학혁명의 시작이다. 혁명은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갈릴레오는 운동법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찾아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 낙하거리가 무게에 비례한다면 10㎏의 물체는 1㎏의 물체보다 같은 시간 동안 10배의 거리를 움직여야 할 거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과 맞지 않다. 더구나 이 두 물체를 실로 연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해보라. 느리게 움직이는 1㎏ 물체가 빠르게 낙하하는 10㎏ 물체를 잡아당길 것이다. 전체의 속도는 무거운 물체의 속도보다 느려질까? 이제 두 물체는 연결되었으니 하나의 11㎏ 물체다. 그렇다면 10㎏ 물체보다도 빨리 떨어져야 한다! 대체 어떤 예측이 맞는 걸까? 결국 모든 물체는 똑같은 속도로 떨어져야 한다. 이런 결론은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그림은 사실적이긴 했지만 규칙에 따른 그림이 주는 균형과 질서가 부족할 수 있다. 폴 세잔은 인상주의가 순간의 감각에만 집중하다보니 그리스철학이 추구했던 자연의 본질과 근본적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세잔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물을 과장하거나 심지어 변형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화가는 보이는 것을 캔버스에 기계적으로 옮기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형상’을 그림으로 구현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피카소는 대상을 완전히 해체해 단순한 도형으로 만들어 재배치했으며, 마티스는 색채가 주는 즐거움을 위해 명암법을 희생했고, 칸딘스키는 음악을 그리려 했으며, 몬드리안은 아예 직선과 원색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현대미술의 목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시대적으로는 시민사회의 성립이 개인의 자유에 많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고, 기술적으로는 사진의 발명이 보는 대로 그리는 인간능력의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어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면 길이가 짧아지고 시간이 느리게 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물론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속도에 도달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극미(極微)의 세상을 다루는 양자역학에서는,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있고 보는 행위가 대상의 상태에 영향을 준다. 이런 세상에서는 우리의 경험이나 언어가 무용지물이 된다. 이제 우리는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세밀화가는 보지 않아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아니 보기 전에 대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보는 것이 대상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세상이 존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김상욱



[김상욱·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3)그리기란 재편된 시공간을 보는 것…양자역학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유지원은 타이포그래퍼로 홍익대 겸임교수다. 서울대와 독일 라이프치히 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다. 전시, 북디자인, 저술과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김상욱·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3)그리기란 재편된 시공간을 보는 것…양자역학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김상욱은 물리학자로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다. KAIST를 졸업하고 독일 막스플랑크 복잡계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김상욱의 양자공부> <김상욱의 과학공부>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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