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무리 뽑아도 줄줄이 퇴사, 지옥이 따로 없다

엄지 2018. 8. 1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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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침묵을 깨다] 간호사의 노동환경은 환자안전의 지표

[오마이뉴스 엄지 기자]

지난 2월 서울아산병원 내과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태움과 과로 등 극심한 스트레스로 박선욱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후 '고 박선욱 간호사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및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출범했습니다. 지난 2월부터 현재까지 유족에게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는 서울아산병원이 이 문제에 책임있게 나서도록 하기 위해 공대위는 지금까지 서울아산병원 내 문제점을 알리고 전국 어딘가에서 제2, 3의 박선욱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태움과 과로를 겪고 있는 간호사들의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알리고자 합니다(이 글은 공대위에서 발행합니다). 
ⓒ unsplash
어느 간호사의 죽음

올림픽의 열기가 뜨겁던 지난 2월 17일, 임상의 동료 간호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자 누군가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 쓴 글이 나타났다. '연휴 첫날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죄송하다'라고 운을 뗀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간호사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다고 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취업을 기뻐한 가족과 미래를 약속한 연인을 뒤로한 채 입사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끝이 가볍게 떨렸고, 어느새 뺨이 젖었다. 나와 친구는 서로에게 '이거 진짜일까?'라고 묻지 않았다. 간호사라면 누구나 그 이야기가 진짜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수많은 간호사들이 언론보다 빠르게 소식을 퍼트렸고, 각종 SNS를 통해 추모가 이어졌다. 다음 날 지인이 '대학 동기'라며 슬퍼했고, 며칠 뒤 또 다른 지인이 '학교 후배'라고 했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문득 눈물을 흘렸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노트북을 접었다. 그녀를 구했을지도 모를 말들이 목구멍을 콱 틀어막았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별 것 아닌 일로 겁주는 거야."
  SBS스페셜 ‘나는 어떻게 나쁜 간호사가 되었나’ 갈무리
ⓒ SBS 스페셜
죽음에 공감하는 간호사들

기사에 달린 댓글과 SNS를 보면 '남일 같지 않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그 마음 너무나 잘 안다'는 고백도 줄줄이 터져 나왔다. 동종업계 사람들이 어찌나 깊이 공감하는지 등골이 서늘할 정도다. 돌이켜보면 내 주위의 동료들 역시 "차에 치이고 싶다", "뛰어내리고 싶다", "한강에 빠지고 싶다" 등등 위험한 말을 내뱉곤 했다. 문자 그대로 '살인적인' 업무량과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환경이 간호사를 활활 태우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병원 시스템이 우리의 숨통을 조인다.

2005년 11월에는 전남에서 3년 차 간호사가, 2006년 4월에는 15년 차 간호사가, 2015년 2월에는 충남에서 3개월 차 신규 간호사가, 그리고 2016년 6월에 또 전남에서 25년 차 간호사가 자살했다. 그리고 지난 2월, 박선욱 간호사까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연차의 간호사들이 삶을 끝낸 이유는 모두 같았다. 비인간적인 조직문화와 극심한 직무 스트레스. 나는 임상을 떠났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숨이 턱 막혀 온다. 정말이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연료로 태워지는 간호사
ⓒ pixabay
병원은 사람을 태워 연료로 쓴다. 병원 노동자 중 간호사가 제일 많기 때문에 언뜻 '간호사 문화(?)'로 보이지만, 태움은 간호사뿐 아니라 인턴과 전공의 등 상대적 약자를 쥐어짜는 '병원의 갑질'이다. 컨베이어 벨트로 수백 개의 인형이 쏟아지고 직원들이 허덕이며 눈알을 붙인다.

문제는 병원이라는 공장은 인형이 아닌 '사람'을 다룬다는 데 있다. 특히 간호행위는 지금 여기서, 지금 이 순간, 사람이 사람에게 행한다. 인형 눈알이야 뒤통수에 붙어도 웃어넘길 수 있지만, 병원에선 작은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긴다. 단순 작업은 몸에 금세 익지만 의료인이 숙련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병원은 이 모든 걸 무시한 채 무지막지하게 굴러간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회전하는 속도에 맞춰 모두가 전속력으로 뛰어야만 한다.

현재의 커리큘럼과 시스템은 의료인을 '양성'하지 않고 '배출'하기에 급급하다. 학교에선 실무와 동떨어진 이론만 배우다가, 실습 땐 잔심부름만 겨우 하고, 병원에 입사하면 갑자기 현장에 내던져진다. 신규 간호사는 자기 일로도 허덕이는 프리셉터(신규 간호사를 교육하는 지도 간호사)에게 맡겨지는데 그 교육 기간이 고작 1~3개월이다.

프리셉터와 신규 간호사 모두 극한에 내몰려 한계를 경험한다. 여기에 인증평가, 질향상 활동, 내부 컨퍼런스, 각종 병원 행사, 동료의 사직(또는 휴직)과 병가까지 더해지면 지옥의 불구덩이가 따로 없다.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의료사고가 나면 개인을 탓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방어적으로 일하게 된다.

언뜻 선배 간호사와 신규 간호사의 갈등처럼 보이지만, 태움이라 불리는 폭력적인 병원문화는 이처럼 구조적인 문제다. 그래서 신규 간호사뿐 아니라 3년 차, 15년 차, 25년 차도 자살하고, 아무리 많이 뽑아도 줄줄이 사직한다. 더 다니고 싶어도 몸과 마음이 병들어 다닐 수가 없다.

일회용 간호사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2015년까지 12년 동안 OECD 자살률 1위를 기록한 나라다. 하루 평균 40여 명이 목숨을 끊어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20~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단기간에 급속도로 일궈낸 경제 성장은 여러 부작용을 낳았는데, 내실을 다지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

사람의 몸을 다루는 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인테리어는 번쩍번쩍한데 노동환경은 엉망이다. 돈 아낀다고 일회용품은 재사용하면서 간호사는 일회용처럼 쓴다. 찢어지거나 구겨지면 버리고 새로 뽑으면 그만이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덮어씌운 채 모르는 척 방관한다. 간호사들이 '병원' 얘기에 치를 떠는 건 단순히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생명을 살린다고 하지만, 실은 얼마나 비인간적인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병원을 떠난 간호사지만 언제든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안전한 병원을 원한다. 죽을 만큼 힘든 간호사가 환자를 제대로 케어할 수 있을까? 신입 직원이든 경력 직원이든 우수수 사직하는 병원을 과연 믿고 찾아갈 수 있을까?

아산병원 앞 1인 시위에 함께하며

서울아산병원 신규 간호사의 죽음은 많은 간호사를 행동으로 이끌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 역시 죽을 뻔했는데 운 좋게 살아남았구나,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되겠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힘들어진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고, 마이크를 잡고, 1인 시위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산병원은 여전히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으며, 최근 공채 면접에서 고인을 질문 주제로 삼기까지 했다. 이에 SNS에서는 서울아산병원을 보이콧하자는 해시태그 운동까지 벌어졌다.

서울아산병원은 언제까지 이 사태를 외면할 수 있을까? 병원 홈페이지에 뜨는 '12년 연속 존경받는 병원 1위'라는 홍보 문구가 공허하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간호학과 학생들과 전·현직 간호사들, 그리고 시민들이 아산병원을 감시하고 압박할 것이다. 간호사의 노동환경은 환자안전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고, 간호사가 열악하게 일하는 병원은 환자의 건강도 위협받는 곳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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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엄지는 간호사 에세이 <관계자외 출입금지>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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