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장마'

한국영화 걸작선 '장마'

2018.08.17. 오후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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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걸작선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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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수많은 반공영화가 양산되던 시대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외국영화 수입권을 미끼로 반공영화 제작을 유도했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단순히 냉전적인 태도의 영화만 만들어졌던 건 아닙니다.

한국영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유현목 감독은 언뜻 반공영화처럼 보이지만, 분단의 아픔을 탁월하게 묘사한 수작을 남겼습니다.

한국 전쟁기의 전라도 어느 시골 마을.

긴 장마가 계속되는 와중에 시집간 딸네 집에 피난 와 있는 동만이 외할머니는 괴이한 꿈을 꿉니다.

외할머니: 꿈에 이 하나가 몽땅 나가버리더라니까.
막내 딸: 그 놈의 꿈 얘기 물리지도 않으세요?
외할머니: 너희는 모르는 소리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두고 보거라.

할머니의 직감이 맞은 걸까요?

이날 밤 군대에 간 아들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맙니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저 콩을 까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슬픔을 삭이는 외할머니.

외할머니: 내사 뭐 아무렇지도 않다. 진작부터 이럴 줄 알았으니까. 내사 뭐 아무렇지도 않다.

거센 장맛비, 통곡하는 큰딸의 울음소리.

유현목 감독의 유려한 연출과 유영길 감독의 탁월한 촬영, 그리고 배우 황정순 씨의 농익은 연기가 시너지를 이루며 비극적 상황은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나 보입니다.

영화는 동만의 외갓집 식구들이 이 집에 도착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동만: 어머니, 서울서 외삼촌이 오시는구만요!
길준: 동만아!
순철: 형수 씨, 서울서 사돈댁이 오시네요!

난리 중이긴 하지만 반가운 재회를 하게 된 동만의 친가와 외가.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서 우익 활동을 한 전력이 있는 길준은 인민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은신처를 마련하기로 합니다.

순철: 대나무 숲에 굴을 파고 숨어 있으면 될 거 아냐.
외할머니: 숨어?
어머니: 숨어요?
순철: 그럼요. 길준이 밤중에 도망갔다고 하고서 대나무 숲에 숨어 있으면 1년도 더 숨어 있을 수 있지요.
외할머니: 야야, 제발 좀 그렇게 해라.

이런 와중에 인민군이 마을에 들이닥치고. 세상이 뒤바뀐 틈을 타 순철은 평소 마을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사람을 골탕먹이기로 합니다.

순철: 네 눈에는 이것이 밀주로 보일 것이여. 그러니까 이것을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자시라고.

그런데 그만, 뜻하지 않게도 골탕만 먹이고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순철은 아예 인민군의 부역자로 일하게 되는데요.

한편, 다시 국군이 마을을 탈환하는 상황이 찾아오자 이번엔 거꾸로 순철이 인근 산으로 피할 처지가 됩니다.

순철: 어머니, 저 오늘 밤 건지산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대나무 숲에서 나온 길준은 자진해서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외할머니: 네 뜻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하필이면 그 잘 죽는다는 소대장이냐, 소대장이.
길준: 아, 어머니도. 제가 어디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습니까.

사돈지간에 한 명은 국군 소대장, 또 한 명은 빨치산이 된 기가 막힌 운명.

이런 와중에 길준이 전투 중 사망하고 깊은 슬픔에 사로잡힌 외할머니는 매서운 천둥 번개가 내려치자 사돈 청년이 숨은 산을 향해 저주를 퍼붓습니다.

외할머니: 더 쏘아대거라, 더 퍼부어대거라. 저기 숨어 있는 빨갱이 놈들!
친할머니: 여기가 지금 누구 집이야? 보자보자 하니까 눈 시려서 못 보겠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그 말이 거길 두고 한 말이야!

서로가 적이 되고, 한 사람은 전사, 한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두 아들의 서로 다른 어머니는 그 때문에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합니다.

영화 <장마>는 이렇게 전쟁이 사람들에게 남긴 증오와 적대감을 사돈지간인 두 어머니의 대립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슬픔과 눈물을 상징하는 장맛비 속 어른들의 비극적 상황은 어린 동만의 시선을 통해 오히려 더욱 극명해지죠.

분단을 화두 삼은 1970년대 영화 가운데 단연 최고봉으로 꼽히는 걸작, <장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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